"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
현직 해병대 대령이 자신의 운전병을 여러 차례 성추행했다는 논란에 대해 해병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피해를 당한 사병은 자살까지 시도하다가 현재 폐쇄 병동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상태다.
군인권센터·한국성폭력상담소·여성민우회 등 3개 시민단체는 4일 서울 영등포동 여성미래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최근 벌어진 해병대 성폭력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한 책임자들을 강력하게 징계하고 피해자의 신변 보호와 치료를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군 당국에 요구했다.
피해자를 지원하고 있는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은 "지난달 12일 신변의 위협을 느낀 피해자가 간부 3명에게 성폭력 사실을 알렸고, 간부들은 대대장에게 사건을 보고하였으나, 보고를 받은 대대장은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없었던 일로 하자'며 사건을 은폐할 것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이밖에도 사건이 발생한 해병대 2사단 부사단장 안모 대령은 지난달 13일 피해자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후배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데 이 일이 밖으로 알려지게 되면 그 후배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된다. 또 같은 관사에 지내기 때문에 그 가족들 얼굴 보기도 민망하다"며 가해자를 두둔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이모 상병(22)의 이모부 안모 씨는 "우리 애가 수도통합병원에서 외부 진료 의견서를 받고 민간 병원으로 가기 위해 부대에 들렀던 날, 부사단장과 첫 면담을 했다"며 "그러나 부사단장은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걱정은커녕, 합의를 보자는 말만 반복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 자리에서 부사단장은 "사건의 원만한 처리와 합의를 위해 사단장과 헌병대에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씨는 "가해자인 오모 대령은 이 상병의 어머니가 성추행 사실을 알고 군 부대에 물어오자, 이 상병을 부른 뒤 자신의 권총을 보면서 '군부대 내 자살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아느냐'고 물으며 '너도 죽을래?'라고 위협하는 등 비밀 유지를 강요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군, 입원 치료 피해자에게 "부대 복귀 안 하면 탈영 처리하겠다"
이 사건은 피해자 어머니의 진정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돼 인권위가 피해자에 대한 신변 보호 조치를 권고했으나,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은 오히려 군부대로부터 복귀할 것만을 강요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임태훈 소장은 "피해자가 급성스트레스로 인한 수면 장애와 탈수 증세 등, 극심한 사건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상태인데, 군 당국은 병가가 아닌 휴가만을 내줘 1일까지 부대로 복귀하지 않으면 탈영 처리하겠다고 협박해 왔다"며 "가족들의 끊임없는 항의를 받고서야 이 상병의 치료 기간을 병가로 정정해줬지만, 오는 13일까지만 인정돼 그 이후에는 부대나 군 병원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소장은 이어 "피해자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민간 병원에서 위탁 치료가 가능하도록 군 당국의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며 "만약 군 검찰이 오 대령을 기소하지 않는다면, 구속 중인 오 대령이 풀려나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공간에 있게 되는 심각한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은심 활동가는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군대 내의 수직적인 권력 관계 때문에 피해자가 저항하지 못하거나 사건이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에 대한 신변 보호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활동가는 이어 "군인이 복무와 관련한 고충 사항을 군 외부에 알려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게 한 군인복무규율 때문에 군대 내 성폭력 사건이 은폐되고, 피해자가 외부 상담소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군인복무규율 제25조 제4항의 개정을 촉구했다.
이 조항은 "군인은 복무와 관련된 고충 사항을 진정·집단서명 기타 법령이 정하지 아니한 방법을 통하여 군 외부에 그 해결을 요청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해병대 2사단 오모 대령은 지난달 9일 새벽 군 휴양소에서 술을 먹고 부대 내 관사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운전병인 이 상병을 차량 뒷좌석으로 끌고 가 네 차례에 걸쳐 강제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군 당국은 이 상병의 가족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한 지 사흘 후인 지난달 16일 오 대령을 보직 해임하고, 같은 달 24일 구속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