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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라는 돋보기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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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패'라는 돋보기로 역사를 들여다보면?

[화재의 책] 김정수의 <다리미를 든 대통령>

"1998년 1월 3일, 강 과장이 씨랜드 인허가 건을, 오늘 퇴근을 못 하더라도 끝내라고 지시했다. 1월 30일, 50만 원이 든 봉투를 받고 곧바로 박재천의 주민등록번호와 농협 계좌번호를 확인해 송금했다. 내가 굶어 죽어도 그런 돈은 받고 싶지 않다. 8월 20일, 청소년 수련시설 등록 전 사전영업 행위에 대한 과태료 부과 결재를 올렸더니 강 과장이 사인을 해주지 않았다." - 이장덕 씨의 비망록에서.

1999년 6월 30일, 유치원생 23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어 전 국민을 놀라게 한 '씨랜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당일 밤, 모기향에서 번진 불씨는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덮쳤다. 불길이 번지는 사이 씨랜드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각종 비리가 드러날까봐 화재신고를 하지 않은 채 스스로 불을 끄려 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고 뒤늦게 도착한 소방차는 좁은 도로 탓에 화재가 난 건물까지 진입하기도 어려웠다. 불법 건축, 불법 용도변경으로 지어진 숙소는 빠르게 타올랐고 아이들은 안타깝게 죽어갔다.

그 비운의 사건이 일어나기 1년 여 전 당시 화성군 부녀복지계장으로 일하고 있던 이장덕 씨는 씨랜드의 불법행위를 보고 운영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상급자의 압력과 회유, 씨랜드 사장이 동원한 용역깡패들의 협박에 못 이겨 운영허가를 내주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자식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하는 깡패들을 피해 가족이 도망을 가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씨랜드 사건'은 한국 사회의 부패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참사였다. 이장덕 씨와 같은 양심적인 공무원을 보호하는 제도는 아직 마련되기 전이었다. 2002년 부패방지법을 통해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내부고발자 왕따 만들기' 풍조는 여전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대안교육에 대해 고민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민들레출판사에서 부패에 관한 역사 속의 일화를 엮은 책 <다리미를 든 대통령>을 펴냈다. 청소년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체로 쓰인 이 책은 '씨랜드 사건'과 같은 역사 속 '부패의 현장'을 찾아간다. 유럽의 중세부터 한국의 삼국시대, 그리고 근현대사에 걸친 다양한 사건들이 '부패'라는 주제어를 통해 하나의 줄기로 엮인다. 책의 저자 김정수 씨는 한국투명성기구 정책실장을 지냈으며 현재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의 사무처장을 맡고 있다.

부패는 칼이 되어 되돌아온다
▲ 김정수의 <다리미를 든 대통령> ⓒ프레시안

한국 사회가 변해 온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 정도도 대단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발 빠른 민주화의 과정에서 생긴 부패를 두고, '이 정도의 부작용은 감당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IMF 위기,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참사에서 희생당한 이들을 두고 단순히 '발전과정에서 생긴 부작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또한 그러한 희생을 거쳐서 '발전'을 이루었다고들 하지만 아직도 한국의 정치와 사회는 부패와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직 대통령과 이들을 둘러싼 친인척들의 비리, 그리고 정권창출에 기여한 이른바 '개국공신'들을 포함한 권력자들의 비리는 되풀이되었다. 최근까지도 차떼기 정당 논란, 재벌의 비자금 조성 사건 등 대형 비리사건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부패의 심각성이 사회 내부에 깊이 있게 인식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1999년 한국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상관 또는 동료의 부정부패를 '외부에 고발한다'고 답한 공무원은 거의 없었고, '모른 체 덮어둔다(66.9%), 조직 내에서 시정행위를 한다(91.6%)'는 등 대부분의 응답자가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또한 대다수 공무원이 '외부에 고발한 공무원들은 조직 내에서 따돌림 당하고 개인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밝혀졌다. 저자는 "정작 큰 문제는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왕따 만들기에 적극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의 '내부고발자 왕따 만들기 현상'은 직장 내부에서뿐만이 아니다. 1990년 감사원에 재직하던 이문옥 씨는 재벌들의 부동산 투기를 감시하지 않는 자기 조직의 비리를 공개했다. 그는 이로써 파면됐으나 복직소송에서 승소해, 감사교육원 교수로 재직하다 1999년 정년퇴임했다. 그 과정에서 이문옥 씨가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해직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고 한다. "양심선언 뒤에는 이웃집 초등학생 아이들도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그의 증언에서 보다시피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공익을 위한 용기 있는 고발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분위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용기를 낸 세 명의 여성

저자는 이런 부패의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패를 뿌리 뽑는 데 참여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며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그 중 한 가지는 2002년 미국의 <타임>지 '한 해의 인물'에 실렸던 세 여성의 이야기다. 세계의 유명 정치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실리기 마련이었던 이 코너에 실린 이들은 어찌 보면 평범한 인물이었다. 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점은 바로 '내부고발'을 했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9.11 테러 관련 청문회가 열리던 2002년 6월, 미네아폴리스의 FBI 수사관이었던 콜린 로울리는 침착하게 의원들의 질문에 답했다. 그녀는 "테러 발생 2주 전에 비행학교에서 점보제트기 모의조종 장치를 임대하려던 자카리아스 무사위를 체포했지만 본부는 그를 테러범으로 의심할 만한 근거가 없다고 보고 이를 묵살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그가 비행기로 세계무역센터에 돌진하는 것을 막겠다'며 영장 발부를 강력히 요구했지만 본부로부터 아무런 반응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9.11 테러 발생 후 불면으로 밤을 지새던 그녀는 FBI의 관료주의와 정보부족을 고발하는 메모를 작성해서 폭로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FBI에서 일개 수사관이 반기를 든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로울리는 내부고발 이후 상부의 압력과 동료들의 비난으로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한때 미국 7대 기업에 오르기도 했던 엔론의 파산 직전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파산 신청과 4000명 감원 발표를 하루 앞두고도 회사는 500명의 직원들에게 5500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했으며 고위 간부 140명은 파산보호 신청을 준비하는 가운데서도 6억8000만 달러를 나눠먹었다.

또한 회계 담당자들은 월가의 신용을 얻으려고 큰 이익을 낸 것처럼 장부를 분식하여 그 규모가 11억 달러에 달했다. 외부에 발표된 회계숫자는 실제 수치에 접근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부패에 취해 있던 직원이나 컨설턴트들은 이 사실을 모른 체 넘겼다.

회사발전 담당 부사장이었던 셰런 왓킨스는 파산 이후인 2002년 2월에 열린 하원 청문회에서 전 엔론 최고경영자 제프리 스킬링이 회계부정 사실을 몰랐다고 말한 것은 위증이라고 폭로했다. 그녀가 회계부정이 공론화되기 두 달 전에 신임회장 앞으로 보냈던 메모가 내부고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 장거리 전화업계의 2인자였던 월드컴이 파산한 것도 2002년의 일이다. 월드컴은 엔론이 2001년에 세운 미국 최대 파산규모 기록을 간단히 갈아치웠다. 월드컴 내부 감사인 신시아 쿠퍼는 2000년에 이미 '회계가 너무 앞서간다'고 지적했으나 최고재무책임자에 의해 묵살당했다. 그녀는 2002년 최고경영자 에버스가 물러난 뒤 집중적으로 회계감사를 실시해 이 과정에서 월드컴이 38억 규모의 회계부정을 저질렀음을 밝혀냈다.

그녀가 회계부정을 공개하려 하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진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다져 먹고 법무부에 월드컴의 회계부정 사실을 고발했다. 이 사건은 미국 기업의 회계관행을 개혁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후 미국 기업들의 잘못된 회계관행이 속속들이 드러났고, 소액투자자를 기만하고 이익을 챙기던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에 따끔한 일침이 가해졌다.

"여기 부패가 있소!"

저자는 부패를 없애기 위해서는 "여기에 부패가 있소!"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부패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자세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고발당하지 않고 드러나지 않은 부패는 장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에는 <타임>지에 실린 세 명의 여성 외에도 용기를 낸 이들이 역사를 바꾼 한국과 외국의 여러 가지 사례들이 나와 있다. 또한 역사 속에서 '청렴한 자세'를 보인 이들도 재미있는 일화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책의 끝무렵에 가서야 독자에게 호기심을 남겼던 책 제목의 주인공, '다리미를 든 대통령'이 누구였는지를 밝힌다. 그는 세계적으로 청렴한 나라로 알려진 핀란드의 현 여성 대통령인 타르야 카리나 할로넨이다. 2002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할로넨 대통령은 자기 집에서 쓰던 다리미와 다리미판까지 가져와 호텔 객실에서 손수 옷을 다려 입어 호텔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일화는 지도자로서의 검소한 생활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저자는 호리병 속 지니가 주문 없이는 활동하지 않듯이, 거대한 바위산 속에 있는 알리바바의 동굴도 주문을 외치지 않는 한 결코 열리지 않듯이, 부패 또한 사람들의 감시와 고발 없이는 결코 밝혀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왕따와 조폭식 의리 관행'이 남아 있는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부패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의 '용기있는 참여'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는것으로 저자는 책을 마무리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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