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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인간성 넘치는 공동체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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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인간성 넘치는 공동체를 꿈꿨다"

[인터뷰] 40년지기 한완상 전 총재가 회상하는 고 이상희 교수

'큰 어른'이 돌아가신 장례식장에서 그가 꾸었던 '꿈'과 '희망'에 관해 듣는 것은 생경하면서도 가슴 저린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그 '희망'과 '인간애'를 전해주는 사람이 고인의 40년 지기 동지라면 더욱 그렇다. 이들이 군사독재시대와 민주화 과정에서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곧은 목소리를 내왔고, 그 민주주의가 다시 퇴행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원로들이라면 더더욱.

10일 고 이상희 서울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만났다. 한완상 전 총재는 이상희 교수의 서울대 사회학과 1년 후배이자 비슷한 시기 함께 서울대 교수로 일했고 시민단체 활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왔다. 또 둘은 분규를 겪는 사립학교 정상화에도 각각 이사장과 총장으로 호흡을 맞추며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사이"로 지냈다.

한완상 : 세상이 잘못 돌아갈 때, 그 울분을 토로할 때 우리는 늘 같이 했다. 다만 이상희 선생은 술을 좋아하는데 나는 술을 잘 못해서, 이상희 선생과 더 깊은 이야기를 못한 것이 아쉽다. 최근까지 이 선생과 나는 참여 민주주의의 실현, 새 시대의 건전하고 신나는 역사 흐름을 흐뭇해하며 지켜봤다. 나로서는 새로운 시대와 구 시대의 대결을 이해하고 함께 박수 치며 환영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이 허전하고 마음 아프다.

"군사독재 시절, '껍데기는 가라'던 신동엽 시인을 참 좋아했다"

세계 대공황이 일었던 1929년 태어난 이상희 교수는 1954년 4월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앞서 1949년 서울대 예술대학 미술부 제2미술부 (서양화과)에 입학했지만 1년 뒤 터진 6.25 전쟁을 겪으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회의를 겪고 다시 입학시험을 쳐서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이 교수는 1958년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63년 일본 동경대학 대학원으로 건너가 '매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한완상 전 총재는 "춥고 배고팠던 1950년대 학부시절에는 서로 잘 몰랐다"면서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1970년 서울대로 돌아오니 이상희 선생도 2년 전에 와서 신문대학원의 교수로 있더라"고 회상했다.

한완상 : 워낙 원칙과 신념이 강했던 분이라서 군사독재 시절 서울대 교수를 하면서 굉장한 울분과 좌절의 시기를 살았다. 이 선생과 나는 군화발에 짓밟히는 캠퍼스를 보고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을 뼛속 깊이 느꼈다. 우리는 자주 군사정권의 폭력에 울분을 나눠 가졌고 한편으론 장준하 선생이나 신동엽 시인을 지식인의 표상으로 생각하고 좋아했다. 군사독재에 짓밟히는 아카데미의 처절한 현실을 보면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를 자주 떠올렸다.

▲ 고 이상희 서울대 명예교수 ⓒ한길사
이어 한완상 총재는 "껍데기는 가라. 4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는 이 시의 첫 구절과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든 쇠붙이는 가라"는 마지막 구절을 읊었다.

이상희 교수의 글과 대담을 묶은 마지막 책 <다시 언론자유를 생각한다>에 실린 박용규 상지대 언론학 교수와의 대담에서도 이상희 교수가 '지성인'을 말하며 신동엽, 김수영 시인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교수는 "(지성인이란) 자기가 갖고 있는 체계적인 지식으로 사회와 민족 그리고 역사에 공헌하고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옳다고 생각하면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행동하는 시인과 같이, 지금 이순간 나는 김수영, 신동엽 시인이 생각납니다"라고 말했다.

이상희 교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목소리 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70년대 유신정권이 <동아일보> 광고 탄압 사태를 벌이자 다른 학자들과 함께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기자들을 지지하는 '격려광고'를 냈다. 또 1980년에는 전두환 정권이 저지른 광주 사태를 두고 '117인 지식인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때 이 교수는 남산 중앙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가 고초를 겪기도 했다.

한완상 : 그 지식인 선언문은 신군부를 아주 격노시킨 선언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 그때 이 교수가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서 신문 당하고 고생할 때 나와의 관계때문에 더 고생했다고 들었다. 나는 이미 4년 전, 1976년에 서울대에서 쫓겨나서 재야운동을 열심히 하던 때였으니, 나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더욱 고생했던 모양이었다.

이후에도 이상희 교수는 항상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했다. 1985년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전신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창립을 주도했고 1990년대 말 언론개혁시민연대 출범도 이끌었으며 2002년에는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역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통일협회 이사장 등을 맡으며 통일이나 부정부패 척결에 관한 NGO에 참여해온 한완상 전 총재는 "분야는 비록 달랐지만 NGO가 역사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새 시대에 관한 인식이 같았다"고 말했다.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연합뉴스
또 두 사람은 1995년과 2001년에는 각각 분규를 겪던 상지대와 한성대에 관선 이사장, 총장으로 취임해 함께 분규 사태를 수습하기도 했다. 이때 한완상 전 총재는 "이 교수가 상지대와 한성대 이사장으로 계실 때 총장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셨다. 그때 함께 어려운 대학를 민주대학으로 발전시키자는 의지로 그 학교 발전에 조그마한 힘을 보탰다"면서 "우리는 눈빛만 봐도 생각이 통하는 사이였다"고 이 교수와의 인연을 회상했다.

한 전 총재는 "이사장으로 역임할 때 보면 이 교수는 소통의 리더십이 대단했다"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정리하고 소통시키는 리더십이 굉장했다. 그 분이 이사장으로 있다가 나가면 소통이 안되고 삐걱거리는게 금방 드러날 정도로 빈자리가 늘 허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함께 힘을 합쳐 어렵게 사태를 수습한 상지대에서 지금 다시 분규가 벌어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말했다.

"지배 이데올로기 담론을 생산하는 언론에 분노했다"

한완상 : 이상희 교수는 동경대학에 가서 언론학으로 박사 공부를 할 때 '일제의 한국 강점이 한국 근대화에 결정적 영향을 줬다'는 수구적인 일본 학자들의 주장에 거부감을 많이 가졌다. 그는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근대화'를 예찬하는 것에 거부감이 많았고 미국식 실정주의 언론학에도 거리를 뒀다. 그가 귀국해서 가르칠 때는 박정희 정권 때라 근대화를 압축적으로 추진하면서 양극화, 노동 통제, 언론 통제, 인권 훼손 등의 정치적 부작용이 크게 생겨나고 있었다. 그는 이런 현실 속에서 언론이 얼마나 지배 이데올로기 담론을 생산하는 가를 굉장히 분노하는 마음으로 관찰했다.

1980년 이상희 교수는 서울대 대학원에 '비판 커뮤니케이션론' 강좌를 개설했다. 이듬해에는 학부에도 '비판 커뮤니케이션론'을 개설한다. 박용규 교수는 "이상희 교수는 언론이 개발독재 수단으로 쓰이는 것이 정당화되던 당시의 현실에 본격적인 비판을 가했다"며 "사회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서의 언론이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의 발로였다"고 말했다.

가까이서 보면 어땠을까. 한완상 전 총재는 "박정희 정권이 민주주의를 훼손시키고 압축적 근대화를 추진하며 유포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언론학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당시로서는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며 "그러나 그의 강의는 젊은이로 하여금 언론이 지배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역기능을 깨닫게 했다"고 말했다.

▲ 고 이상희 교수의 마지막 책 <다시 언론자유를 생각한다> (한길사) ⓒ한길사
박용규 교수는 "이 교수가 1983년에 출간한 <커뮤니케이션과 이데올로기>라는 책은 암울한 세월을 보내던 언론학도들에게는 새로운 전망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했을 정도로 큰 의미가 있었다"면서 "언론 탄압이 극에 달했고 언론이 정권 유지의 수단,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고 하는 당시 상황에서 언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 한 것이 이 책이라는 점에서는 아마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가 남긴 분석 중에 오늘날에도 큰 의미로 와닿는 것 중 하나는 이른바 '유언비어'에 관한 분석이다. 부당한 권력, 정통성 없는 국가 권력이 인간의 생득적인 언론 자유를 부당하게 위축시킬 때 유언비어는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다는 통찰이었다. 한완상 전 총재는 "국가권력이 긴급조치 1~9호까지 내리며 언론 통제를 강화사던 시절에 '유언비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지적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지적은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사태에 제기되는 의혹을 '유언비어'라고 통제하고 있는 현실에도 그대로 들어맞는다. 한 전 총재는 "지금의 이른바 '유언비어'는 천안함 실상에 대한 투명한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생기는 것"이라며 "어느 나라에서든 국가 권력이 인간의 생득적 알 권리를 위축시킬 때는 반드시 유언비어가 생긴다"고 말했다.

"'인간성이 넘치는 공동체'를 꿈꾸며 돌아가셨다"

이상희 교수의 비판 언론학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한완상 전 총재에게 "현 우리 사회의 언론 현실에서 이 교수의 언론학이 갖는 함의는 무엇일까"를 묻자 뜻밖에도 '희망적인 관찰'이 돌아왔다. 한 전 총재와 이상희 교수가 희망을 발견한 '씨앗'은 '누리꾼'이었다.

한완상 전 총재는 기자에게 "20세기 사회의 두가지 특징을 아느냐"고 물었다. 한 전 총재는 "하나는 국가나 모든 조직의 소통이 하향식으로 이뤄진다는 것, 다른 하나는 내부의 의사 결정 과정이 불투명하다는 것"이라며 "21세기로 오면서 이러한 특징을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아래에서부터 용솟음 쳤고 그 핵심에 서있는 것이 새로운 세력, 네티즌이다"라고 말했다.

한 전 총재는 '네티즌'을 '줄씨알'이라고 불렀다. 몸은 떨어져 있으나 하나하나의 씨알들이 줄 안팎의 논의에 의해 움직일 수 있는 새로운 주체라는 의미다. 이들의 활약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상희 교수와 한 전 총재는 한국에서 나타난 '줄씨알'의 활발한 활동을 고무적이고 반갑게 지켜봤다.

한완상 : 이상희 교수는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 때 촛불과 쌍방향 통신 매체가 큰 역할을 했던 2002년 대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그리고 최근의 6.2 지방선거까지를 꾸준한 관심을 갖고 봤다.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는 참여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을 고무적으로 생각했다. 이 교수는 언론학자로서 새로운 시대의 건전하고 건강한, 신나는 역사 흐름에 흐뭇해 했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 상황은 '군부 독재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퇴행적 징후를 많이 보이고 있다. 한 전 총재는 "오늘의 권력이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 들어온 21세기의 새로운 민중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완상 : 새로운 시대가 분명히 우리 삶의 중간에 와있다. 새로운 세력이 21세기 우리 사회의 중심부에 확실히 들어와 있다. 다만 오늘의 권력이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참 안타깝다. 줄씨알은 더이상 이승만 정부가 외쳤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이들이 아니다. 이들은 뭉쳐도 살고 흩어져도 더 잘 사는 방법을 고안해낼 대단히 주체적인 시민세력이다. 오늘의 파워엘리트들이 불안해 하는 것은 그 중심부에 들어온 21세기의 민중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종이신문이 핵심적인 역할을 해온 구시대와 인터넷 신문이 새로운 장을 연 새 시대의 대결이고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대결하는 시대다. 나로서는 이 대결의 의미를 박수치며 환영하는 친구를 잃었다는 것이 아쉽고 마음이 허전한 거다."

이상희 교수는 항상 인간성이 넘치는 공동체를 강조해왔다. 정부와 자본 권력이 합쳐진 세계화의 흐름 속에 약자는 비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다. '쇠붙이는 가라'고 외치던 시대에서 아름다운 소프트 웨어의 시대로 왔다. 지금은 인간성이 넘치는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 '줄씨알'의 시대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공동체적인 유대를 '줄' 안팎에서 만들고 유지시킬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가. 이 교수는 인간성이 넘치는 공동체을 꿈꾸며, 지식인으로서 소중한 꿈을 지닌 채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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