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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운영권, 에비슨에게 넘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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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중원> 운영권, 에비슨에게 넘어가다

[근대 의료의 풍경37] 제중원 운영권 ③

에비슨이 제중원 의사직을 사임하겠다며 제시한 이유들에 대해, 외아문은 1894년 5월 22일자 공문으로 조선 정부가 취한 조치들을 설명했고, 다만 에비슨이 사용해온 사택은 원래 육영공원 소관이므로 속히 비워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미국 공사는 바로 다음 날인 5월 23일에 외아문의 요청을 에비슨에게 통지했다고 회신했다.

5월 22일자 공문에 대해 미국 측에서 아무런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외아문의 요청을 에비슨에게 전달했다고 회신했으므로 외아문은 당연히 에비슨이 제중원을 그만 두겠다고 했던 문제는 잘 수습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비슨의 사퇴 문제는 해결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불씨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던 것 같다. 알렌은 6월 9일 엘린우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제가 마지막 보낸 편지(5월 16일자)에서 에비슨 의사가 그 병원을 포기했다(giving up the hospital)고 적었습니다. 그는 제가 전에 소유했던 곳으로 지금은 여학교로 쓰고 있는 낡은 집에서 살아야 합니다."

편지의 뒷 문장은 에비슨이 정부 사택에서 퇴거한 것을 뜻한다. 알렌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4월 18일자 편지에서는 에비슨을 그 집에서 쫓아내려는 미국인의 음모를 언급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시 한성에 있던 미국인들 사이에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앞 문장은 5월 16일의 상황인지, 아니면 6월 9일에도 해당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제중원에 복귀했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에비슨이 계속 제중원에 출근하지 않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즉, 에비슨은 조선 정부의 조치에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제중원 일을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알렌은 이어서 7월 26일 엘린우드에게 다음과 같이 놀라운 소식을 전한다.

"제중원은 폐지(defunct)되었습니다. 조선 정부도 마찬가지로 끝장이 났습니다. 일본이 23일 아침에 궁궐(경복궁)을 점령했고 지금은 그들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중원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8월 18일(음력 7월 18일)자로 제중원의 소속이 외아문에서 내무아문(內務衙門)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는 제도적으로는 오히려 적절한 조치였다.) 즉, 알렌이 위와 같은 편지를 쓴 시점뿐 아니라 8월 18일까지도 제중원은 폐지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제중원이 폐지되었다고 한 것은, 7월 23일 일본군이 무단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7월 25일에는 청일전쟁이 개시되는 혼란 중에 알렌이 잘못 안 것일 수 있다. 아니면 그 며칠 사이에 제중원을 폐지한다는 논의 또는 결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홍집 내각이 성립된 것이 7월 27일이므로 설사 제중원을 폐지한다는 결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조선 정부 차원의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1894년은 조선 사회가 개항 이래 최대의 격변을 경험한 해이다. 연초의 고부(古阜) 봉기를 필두로 갑오농민전쟁이 불타올랐으며, 그것을 구실로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과 청국군이 조선의 국토와 민중들을 유린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고 국가의 위신은 바닥 모르게 추락했다. 제중원의 운영권이 조선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격동의 와중이었다.

8월 하순까지도 에비슨은 제중원 진료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었다. 제중원 의사로 일하기 시작해서 첫 6개월은 근무했고, 나중 4개월은 근무를 하지 않은 셈이었다. 사실 진료 거부의 이유는 불투명하다. 애당초 내건 세 가지 이유는 대체로 충족되었고(제36회), 그 조치에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장기간의 근무 거부 이유로는 명분이 약해 보인다.

따라서 겉으로 내건 이유와는 달리 에비슨은 처음부터 제중원 운영권의 획득을 목표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여러 가지 점에서 사실과 다르고 조선 정부를 겁박하는 뉘앙스를 띤 미국 공사의 5월 10일자 공문도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그리고 시대 상황은 점점 더 에비슨에게 유리해져 갔다.

이러한 가운데 조선 정부로부터 중재 요청을 받은 알렌에게 에비슨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에비슨 전기>, 89~90쪽)

① 국왕은 주사를 한 사람만 남기고 모두 소환할 것. 제중원은 국왕의 소유이므로 국왕과 나 사이에 연락관 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음.
② 하인 35명을 모두 내보낸 뒤, 내게 필요한 조수를 내가 직접 선정하도록 할 것.
③ 제중원의 모든 재산을 선교부에 이관하여 필요에 따라 선교부의 재정으로 제중원을 개조할 수 있도록 할 것.
만약 이렇게 된다면, 우리는 다음의 사항을 보장한다.
① 국왕에게 제중원 사업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지 않음.
② 1년 전에 알려주면 제중원의 모든 재산을 국왕에게 되돌려 주겠으며, 그럴 경우 그 동안 건물 개축 등에 들어간 모든 비용을 우리에게 지불해야 함.


이제 에비슨이 그 동안 진료를 거부해 왔던 이유와 목표가 명백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5월 10일 미국 공사를 통해 제시했던 사직 이유도 아니었고, 제중원 운영의 개선도 아니었다. "사직"도 유리한 협상을 위한 카드였다고 생각된다.

알렌이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보낸 8월 26일자 편지에서 언급한 것이 실제에 가장 가까운 목표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반적인 개혁(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우리는 이 기관(제중원)을 박사님께 증서로 완전히 넘기든지 아니면 정부의 찬조 아래 운영할 수 있는 협약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In the general reconstruction now going on we are trying, from the Legation, to have the institution either given over to you entirely by deed, or suitable arrangements made for its proper conduct under Government auspices.)"

▲ 김윤식이 미국 공사에게 보낸 8월 31일(음력 8월 1일)자 공문. 제중원이 내무부 위생국 소관이 되었음도 밝혔다. ⓒ프레시안
8월 31일(음력 8월 1일), 외무아문 대신 김윤식은 에비슨의 요구를 수락할 것이니 에비슨이 곧 제중원에 복귀토록 해 달라는 공문을 미국 공사에게 보냈다. 이에 대해 미국 공사는 9월 7일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 에비슨의 요구 사항을 공식화했다.

"저는 제중원에 관한 귀 대신의 공문 내용을 에비슨 의사에게 알렸으며, 에비슨은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에비슨이 제중원의 일체 업무를 전담 관리(專管辨理)하게 되면, 필요한 외국인 조수들을 확보할 것이며 자신과 조수 모두 보수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귀 정부에서는 주사들을 임명해 귀 정부를 대표하도록 할 수 있지만 그들은 제중원의 정당한 운영에 간섭해서는 안 되며 따로 떨어져 있는 건물에 거주해야 합니다."

"에비슨과 동료들은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구입하고 피고용인과 조수의 급료를 모두 지급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사들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지급하지 않습니다.) 에비슨은 필요한 수리를 하고 병원 뒤쪽 언덕의 빈터에 자신이 살 집을 지을 것이며, 이 집과 부지는 병원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에비슨은 몇 해 또는 무기한 근무할 것이지만, 귀 정부는 언제든지 제중원을 환수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1년 전에 에비슨이나 대리인에게 통보하고 에비슨이 자기 집과 병원 건물의 수리에 실제로 사용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매우 공정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귀 정부는 경비를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1등 병원을 설치하는(貴政府無用經費而將設置一等病院. 영문으로는 Your Excellency's government will secure a first class hospital for nothing) 것이며, 또 귀 정부가 겪고 있는 자금난을 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제중원의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겨달라는 것과, 그렇게 되는 경우 조선 정부는 운영비를 쓰지 않으면서도 최상급의 정부 병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제중원의 모든 운영권을 넘겨달라고 하면서, 굳이 에비슨이 살 집을 새로 짓겠다고 언급한 것으로 보아 에비슨은 육영공원 소관의 사택에서 퇴거한 것에 대해 커다란 불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리고 에비슨은 제중원의 3년치 예산에 버금가는 8500원을 들여 자신이 살 주택을 신축했다(제24회).

▲ 미국 공사가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보낸 9월 7일자 공문(왼쪽은 한문본, 오른쪽은 영문본). 제중원의 일체 사무를 에비슨이 전담 관리토록 할 것을 요구했다. ⓒ프레시안

▲ 외무대신 김윤식이 미국 공사에게 보낸 1894년 9월 26일(음력 8월 27일)자 공문. 제중원의 모든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긴다는 내용으로, 미국 공사가 9월 7일자 공문으로 요구한 것을 고스란히 수용한 것이었다. ⓒ프레시안
이에 대해 9월 26일 외무대신 김윤식은 에비슨의 요구를 고스란히 수락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미국 공사에게 보냈다.

"모든 병원 업무는 에비슨이 관할하여 운영(專管辨理)토록 할 것입니다. 제중원의 빈 터에 그가 거주할 주택을 짓는 것을 반대할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조선 정부가 언제라도 제중원의 환취(還取)를 요구하는 경우 그때까지 들어간 건축비와 수리비를 모두 지불할 것입니다."

"에비슨에게 운영권을 이관한 이상 조선 정부의 관리와 고용인을 파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중에 에비슨이 업무를 볼 때 우리 정부의 지도(訓勸)을 받지 않거나 우리 정부가 불만이 있을 경우에는 귀 공사에게 공문을 보내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사리에 맞습니다."

김윤식으로서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188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 창설에 책임을 맡았던 김윤식이 9년 반 뒤에는 그 병원의 운영권을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넘기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선교부로 운영권이 이관된 1894년 9월에는 제중원이 내무아문 소속이었지만, 국가 간의 외교적인 문제이기도 하고 또 그 동안 제중원을 관할해 왔기 때문에 외아문이 그러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로써 9년 반 동안 조선 정부 병원 또는 왕립 병원으로 존재했던 제중원이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 병원의 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중성은 조선 정부로서는 마지못한 것이겠지만, 에비슨과 선교부 측에는 유리한 점이 적지 않았다.

▲ 김윤식(金允植·1835~1922). <조선귀족열전>(1910년)에 실린 사진이다. 대표적인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로 1885년 제중원 설립에 책임을 맡았으며,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기는 역할도 했다. 1910년 8월 "합방"에 관한 순종의 물음에 대해 고관대작으로서는 유일하게 반대 의사를 표했으며, 강점 후 일제의 귀족 제의를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고종과 순종의 권유에 따라 수작(受爵)했다고 전해진다. 3·1운동 뒤에는 독립을 청원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제출하여, 1920년 4월 작위를 박탈당했다. 그야말로 굴곡이 극심한 생애였다. ⓒ프레시안
36회에서 언급했던 대로 제중원의 이관과 성격 변화는 조선 정부와 국왕의 뜻을 충실히 수행할 조선인 의사가 없는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는지 모른다. 의사가 반드시 조선인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교부나 거기서 파견한 의사들이 조선 정부와 국왕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웠다. "근대"와 "문명"을 지향하고, "진료"와 "환자"를 위한다고 했지만 동상이몽이었던 것이다.

조선 정부가 제중원을 운영하는 것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제중원을 아예 폐지하는 길도 있었을 것이다. 또 조선 정부의 뜻을 잘 따르는 외국인 의사를 채용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러지 않았다.

여기에는 아마도 국왕의 생각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신이 주도하여 만든 조선 최초의 근대식 국립 병원이고 미국과의 우호를 표상하는 제중원을 국왕이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10년 가까이 인연을 맺어온 알렌(미국 북장로교)과의 관계를 무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갑오개혁기에 조선 정부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던 일본 세력도 뚜렷이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의 운영권 이관이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알렌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11월 29일자 편지에서 "일본인들이 제중원을 원했기 때문에 문제가 어려웠지만, 이제 병원은 박사님의 손에 있으며 박사님이 원하시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는 과정에서 일본 측과 갈등이 없지 않았음을 언급한 것이지만 결국은 미국의 뜻대로 되었다. 힘겹게 청나라와 전쟁을 치르던 일본은 굳이 미국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제중원은 이미 선교 활동에서 별 중요성이 없게 되어 꼭 유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므로 에비슨이 조선 정부에 대해 마음 놓고 강경책을 쓸 수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조선 정부가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제중원을 포기하면 되고, 요구를 받아들이면 선교 병원으로 사용하면 되었기 때문에 부담이 적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면 타당한 해석이다. 그러나 에비슨은 빈튼이나 마펫(제35회)이 아니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이 선교의 발판이 된다는 점은 물론이고 제중원에서의 진료 자체가 궁극적으로 선교 면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또 그런 점을 떠나 의사로서도 제중원은 탐나는 대상이었다. 알렌이 극찬에 가까운 평가를 했듯이, 구리개 제중원은 1886년 당시 한성 최고의 건물이었으며(제22회) 여러 장비, 시설, 기구, 약품도 당시 조선의 형편으로는 최상급이었다. 알렌은 엘린우드에게 여러 차례 제중원의 설비가 훌륭하고 조선 정부의 지원도 만족스럽다고 보고했다.

"제중원은 지원을 잘 받고 있습니다. 선교지부 사람들은 지원 규모와 유용성 등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러한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1894년 4월 18일자)

"상하이에서 일하는 매클로드 의사의 의견에 따르면, 제중원은 상하이의 어떤 것보다 뛰어난 장비들을 많이 갖추고 있습니다." (1887년 8월 2일자)

따라서 에비슨은 포기해도 되는 상황에서 조선 정부와 줄다리기를 한 것이 아니라 제중원을 꼭 수중에 넣겠다는 목표를 관철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에비슨은 탁월한 외교관이고 수완가였다.

에비슨으로서는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제중원의 명칭과 정부의 권위, 그리고 건물과 토지를 활용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병원 건물의 개조와 사택의 신축 등에 들어갈 비용도 제중원을 반환할 때 되돌려 받기로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As good as it gets)."

알렌은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4년 4월 18일자 편지에서 에비슨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에비슨은 인내심 있고 현명하고 쉽게 낙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성공할 것입니다."

게다가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으로 이어지는 1894년의 시대 상황도 에비슨의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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