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가 정당하다면 현 정권도 정당하다. 나는 여기서 이 정당성을 세 가지 수준으로 나누어 분석해보았다. 첫째는 진실의 정당성, 둘째는 합리적 정당성, 셋째는 기술적 정당성이다. 파우스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기술적 정당성이었다. 부하들에게 노부부를 개간지의 좋은 땅으로 이주시키라고 했는데 그들이 과잉 철거를 해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철거상의 '기술적 문제'가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현 정권은 그것마저도 정당하다고 우겨대는 파렴치한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파우스트건 현 정권이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합리적 정당성'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는다.
아합 왕의 경우도 똑같다. 아합 왕은 나봇에게 포도원을 달라고 하면서 더 좋은 포도원으로 바꿔주겠다고 한 것을 조금도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혜를 베풀어주는데도 고맙게 받아들이기는커녕 고집불통으로 거부하는 걸 몹시 괘씸하게 여길 따름이다.
이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는 '합리적인 정당성'이라는 게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 알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빌려서만 힘을 발휘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아합 왕도 파우스트도 현 정권도 자신들의 정당성을 '합리적 거래'와 '이데올로기(하느님=유토피아=선진화)'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어떠한가? 노부부도 나봇도 평생 살아온 정든 집에서 떠날 수 없고 선조한테 물려받은 유산이라며 그 제안을 거부하였다. 용산 참극 희생자들도 정부나 시공 업체인 삼성, 조·중·동에서 선전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하고 '삶의 터전'에서 이렇게 내쫒길 수는 없다는 극한의 절규 속에서 타협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모두 '진실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가 현 정권의 책임을 묻는 수준이 엄격히 말하면 두 번째(합리적 거래의 정당성)나 세 번째(기술적 처리의 정당성) 수준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모두 파우스트 편에 서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파우스트의 만행이 문학계 내에서나 사회적으로나 한 번도 거론된 적이 없을뿐더러, 어떤 작품 해설서건 파우스트를 근대의 거인상으로서 '심오성 그 자체'—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썼으니 두말할 나위가 없다—로 평가하여 그의 만행을 심오성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뿐이다.
한 예로 시중에서 가장 판매가 활발한 출판사의 옮긴이 해설을 소개해보겠다. (<파우스트>, 괴테 지음, 정서웅 옮김, 민음사 펴냄)
"자연아로 돌아온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는 다시 한 번 욕망과 정열의 즐거움을 마련해주려 한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그의 제안을 단호히 물리친다. 선행의 가치를 깨달은 그는 황제로부터 받은 해안 지대를 비옥한 땅으로 만들도록 독려한다. (이 과정에서 강제 철거가 일어나고 노부부가 불타 죽는다-필자) 이것은 창조적 욕구의 구현이며,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결단인 것이다." (2부 399쪽)
"결국 인간 파우스트의 승리는 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서 기인한다. 버려진 땅을 일구어 만인을 위한 복지낙원을 만들려고 했을 때(이 과정에서 강제 철거가 일어나고 노부부가 불타 죽는다-필자), 그의 의지는 악마와의 계약을 초월한 것이다." (2부 401쪽)
요약하면, 파우스트가 선행의 가치를 깨달은 뒤에 행한 개간 사업은 타인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에서 나온 결단이며, 이 사업으로 일궈질 땅이 만인을 위한 복지낙원이라는 것이다. 파우스트로 표상되는 근대적 욕망이 이처럼 미화되고 선망이 되는 한, 용산 참극을 바라보는 어떠한 시선도 '합리적 거래의 수준'과 '기술적 처리의 수준'을 넘어설 수 없다. 여기에는 좌와 우가 없다. 모두 '진보'라는 근대의 이념 안에 갇혀있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뒤에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이라는 글에서 구체적으로 밝힌다).
그런데 파우스트의 욕망이 미화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파우스트가 세속적인 욕망을 비웃기 때문이다(여기서 자본주의 정신이 금욕의 윤리 위에 서 있음을 밝힌 막스 베버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떠오른다). 파우스트는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자신의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까지 무한히 확대하고, 비록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라 해도 끝없이 추구하는 데서 인간적인 의의를 찾는다.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자아다. 이것은 근대적 인간의 전형이 추구하는 지고의 가치관이다. 특히 이 가치관은 문학과 예술을 비롯해 근대의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다.
파우스트는 더 나아가 자아실현을 통해 신이 되고자 한다. 그는 인식한 것은 손아귀에 잡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파우스트가 과거 전통시대의 위인과 가장 구별되는 특징은 바로 이것, 즉 행동이 아닌 인식을 통해 신이 되려 한다는 점이다. 작품 속에서 행동하는 것은 악마 메피스토이고, 파우스트는 오직 인식을 위해 악마가 이끈 대로 행동할 뿐이다.
개간 사업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애인을 파멸시키며, 부정한 정치 사건에서 맹활약(황제한테 해안 지대를 받은 것도 그 덕분이다)을 하는 등, 파우스트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인식을 신의 경지로까지 드높이기 위한 노력일 때는 마침내 구원받고 천당에 간다. 이것이 파우스트 극의 중심 사상이다.
이 사상은, 현대 문명이 인식에 따라 세계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만행을 저질러도, 그 건축물이 결과적으로 높은 인식을 보여주기만 하면, 신이 건축주인 현대 문명을 용서하고 구원하는 것과 똑같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원주민을 쓸어버리고 신대륙에 세운 미국이라는 건축물을 꼽을 수 있다. 현대인은 이 이데올로기(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다. 현대를 탈이데올로기 사회로 규정하거나 이명박 정권이 탈이데올로기 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은 모두 이 진실을 오도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의 음모에 지나지 않다.
ⓒ김용철 |
들여다보면 합리적 거래를 앞세워 용산 참극을 빚은 배후에 이 이데올로기가 있다. 사실 뉴타운의 청사진은 파우스트가 그의 개간지에 부여한 의의로 가득 차 있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떼를 쓰다가 사고가 터졌다고 가증스러운 주장을 한다. 그런데 문제는 가해자들이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뉴타운 사업을 파우스트의 복지낙원에 버금가는 선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아마도 가해자들 중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뉴타운 사업이 낙후된 도시를 구제하려는 헌신적인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생각과 믿음이 다 이데올로기인데도 외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정의구현사제단이나 시민단체, 그리고 정당들이 이데올로기로 사회분란을 조장한다고 몰아붙인다.
그들의 눈에 이데올로기 세력은 오로지 좌파다. 그들은 좌파를 이데올로기 세력으로 비방함으로써 탈이데올로기 세력의 지위를 차지한다. 탈이데올로기의 지위는 실증주의처럼 '객관적이고 공정한 위치'인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수법으로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가 아닌 마치 판관의 정의봉인 양 사용한다.
어떻게 하면 이를 저지할 수 있을까? 둘째 수준과 셋째 수준으로 대항해서는 첫째 수준인 '진실의 정당성'은 요원해진다. 용산 참극은 이데올로기 또는 합리적 정당성을 넘어서 봐야 할 사건이다. 뉴타운의 적합성, 보상과 철거 방식 따위는 모두 부차적인 문제다. 사람들은 뉴타운 사업의 성공이 얼마나 공정하고 모든 이에게 유익하게 진행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이것은 공범자의 의식에 불과하다. 허름한 집보다 새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 하게 만들어 경쟁시키고, 낙후된 도시의 개발을 발전이라 믿게 하는 현실에서 용산 참극은 우리에게 어떠한 반성도 촉구할 수 없다. 그러한 참극은 반성과 상관없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든 파우스트의 만행을 미화하는 데 동조할 수 있다. 현실을 보면, 우리는 모두 파우스트의 만행을 본받으려 하고 있다. 현대 문명은 한마디로 파우스트의 만행으로 구축된 구조물이다. 우리의 모든 가치는 앞서 말한 '파우스트의 추구'로 집약된다. 못 믿겠으면 다시 반복하겠다. '어느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인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자신의 자아를 인류의 자아로까지 무한히 확대하고, 비록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라 해도 끝없이 추구하는 데서 인간적인 의의를 찾는다.' 천사들은 이처럼 인생의 아름다움과 유토피아를 추구해온 파우스트의 영혼을 천상으로 인도하며 "언제나 갈망하며 애쓰는 자, 그를 우리는 구원할 수 있다"고 찬양한다.
사람들은 고기를 사 먹으면서 푸주한을 경멸한다. 살생이 싫으면 고기를 사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고기를 사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사회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삶을 살지 않으면 푸주한을 아무리 경멸한들 도살은 결코 줄지 않고, 도살된 가축을 아무리 애도하고 반성해도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첫째 수준인 '진실의 정당성'은 예를 들어 전체 사회 문화를 채식주의로 바꾸려 할 때 확보된다. 그것은 근대적인 가치를 벗어나 '삶 자체'를 되찾기 위해 사회적으로 노력할 때만 찾아온다. 모든 생명은 우주다. 그 자체로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훌륭하다. 이것은 내가 줄곧 주장해온 애니미즘의 세계다.
용산 참극 희생자들의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보상이나 명예 회복으로도 그 귀한 생명들이 부활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희생자들의 생명을 자연의 순환에 따라 아름답게 순행하도록 돕고, 사회 전체를 그 순행에 맡기려고 노력할 때에야 비로소 부활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 밖으로 우리의 전체(몸과 영혼)를 해방시키는 일인 동시에 역사 속에서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형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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