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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에비슨의 사표…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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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에비슨의 사표…진짜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36] 제중원 운영권 ②

1893년 11월 1일부터 제중원 의사로 근무를 시작한 에비슨은 전임자 빈튼의 태만과 불성실로 2년 반 가량 제 구실을 못했던 제중원을 되살리기 위해 힘껏 노력했다. <기독신보> 1932년 4월 6일자 "에비슨 박사 소전"(12)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제중원의 진찰 일지와 그동안 지낸 여러 가지 사정을 정밀히 조사하여 보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춥거나 날마다 빠지지 아니하고 진찰소에 출석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진찰 받으러 왔다가 그저 가는 허물이 내게 있지 않도록 만들려고 했다. 의사가 매일 출석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환자들이 매일 진찰하러 오기 시작하여 한 달 안에 매일 오는 사람이 많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나는 또한 네 가지를 결정하여 실행한 것이 있었다.

1. 약값 낼 수 없는 사람이라도 진찰하여 주기를 거절치 말 것.
2. 통역을 사용하는 대신에 내가 조선말을 배워서 조선말로써 친히 환자를 취급할 것.
3. 방이 있는 대로 청결하게 할 수 있는 대로 다수한 환자를 수용할 것.
4. 수술 방을 넉넉히 준비하여 질병의 성질에 따라서 모든 종류의 수술을 가능하게 할 것. 들으니 큰 수술은 환자들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한 일이 없었고 조그마한 부스럼이나 째고 치료하여 보낼 뿐이었다고 했다.


▲ <기독신보> 1932년 4월 6일자 "에비슨(魚丕信) 박사 소전"(12). ⓒ프레시안
에비슨이 제대로 의사 구실을 하자 제중원의 환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테이트(Mattie T Tate)와 아버클(Victoria C Arbuckle) 등 간호사 역할을 하는 여성들도 있어서 여성 환자들도 적지 않게 찾아왔다.

근무를 시작한 첫 6개월 동안 에비슨은 먼저 빈 방을 병실로 개조해 본격적인 병원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 다음으로 할 일은 위 인용문의 4항처럼 수술실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근무 6개월 말, 즉 1894년 4월 말쯤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수술실을 만들기로 예정했던 즈음인 5월초에 발생했다. 에비슨은 4월말 이틀이나 걸려서 가야 하는 시골(경기도 광주)로 꽤 지위가 높은 중환자를 치료하러 와 달라는 부탁을 받고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거절할 수 없어 언더우드와 함께 왕진을 갔다. 하지만 에비슨이 도착했을 때 환자는 이미 사망했다.

헛걸음을 한 셈이었지만 마침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5일장이 선다는 소식을 듣고 전도에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일행은 그곳으로 갔다. 장에서 언더우드는 전도지를 나누어 주면서 설교를 했고, 에비슨은 진료를 했다. 이렇게 예정에 없던 일을 하느라 에비슨은 일주일이 넘어서야 한성으로 돌아왔다.

에비슨이 그 다음날 제중원에 출근했을 때, 그로서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가 수술실로 예정해 놓은 방을 에비슨이 없는 사이에 한 일본인 의사가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비슨의 회고에 의하면, 주사들은 방들을 적당한 값으로 세를 놓을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그렇게 하는 편이 수술 때문에 애를 먹는 것보다 나았기 때문이었다.

에비슨은 그 날 그 사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중원에서 일한 지 6개월이 되었으니 국왕이 약속한 연봉(annual contribution)의 절반을 받아야 했는데 단지 그것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는 데에도 생각이 미쳤다. 그래서 에비슨은 계속 이런 식으로 주사들로부터 방해를 받든가 아니면 병원 업무들에 관한 권한(authority over its affairs)을 갖든가 양단간에 입장을 취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 (<에비슨 전기>. 알렌 디그레이 클라크 지음. 1979년. 89쪽)

▲ 미국 공사 실이 외아문 독판 서리 김학진에게 보낸 1894년 5월 10일자 공문. 이 공문에서 실 공사는 에비슨이 세 가지 이유로 제중원 의사직을 사임한다고 알렸다. 또한 에비슨뿐만 아니라 알렌도 제중원을 위해 헌신했지만 그 동안 봉급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나아가 제중원은 미국 공사관이 설립했다고 강변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이 공문은 단순히 에비슨의 사임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제중원에 관한 미국 측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프레시안
그리고 며칠 뒤인 5월 10일, 미국 공사 실(John M. B. Sill)은 외아문 독판 서리 김학진(金鶴鎭)에게 에비슨이 제중원 의사직을 사임할 것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공문에서 실 공사는 에비슨의 사직 이유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이유는 약품비 등을 받지 못했다는 것인데, 이 점을 언급한 대목의 한문과 영문에 약간 차이가 있다. 한문으로는 "購買藥料火柴等物之經費銀迄未收領"이고 영문으로는 "He has received no money for conducting the hospital, buying drugs, fuel, etc."라고 되어 있다.

즉, 한문 공문에는 없는 "병원 운영비(money for conducting the hospital)"가 영문 공문에는 있는 것이다. "빈튼 파동" 때 일단락되었던 운영비 문제가 재연되는 듯도 한데, 운영비의 사용 권한이 외국인 의사에게 넘겨졌다는 얘기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니면 약품과 땔감 구입비를 병원 운영비라고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두 번째 이유는 새로 마련된 규칙(arrangements)이 시행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 공문만으로는 구체적인 사정과 새 규칙의 내용은 알 수 없다.

셋째는 에비슨이 근무에 대해 아무런 보수를 받지 못했으며(不食薪水, Receiving no pay for his services), 정부에서 사용토록 허락했던 집(번커 부인, 즉 엘러스가 제중원에 근무할 때 정부가 제공했던 집)에서 쫓겨나는 큰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수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에비슨 자신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에비슨 전기>(제15회)에는 "내가 제중원에서 일한 지 6개월이 되었으므로 국왕이 약속한 연봉의 절반을 받아야 했는데 단지 그것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다(I had been there six months and should already have received half the annual contribution promised by the king, but had received only half of that half)"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6개월치의 절반은 받지 못했지만, 뒤집어 말하면 절반은 받았다는 것으로 "아무런 보수를 받지 못했다"라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조선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절반은 받았는데 전혀 받지 못했다고 국가 사이의 공식 문서에 허위 사실을 기록한 것은 더욱 큰 문제다.

또한 같은 공문에서 "알렌 의사는 아무런 보수를 받지 않고(該院宜士安連不費薪水, Dr. Allen, who was in charge and working no pay)"라는 표현도 나온다. 알렌은 제중원 의사 자격으로 1887년 1월(음력)부터 1888년 2월까지, 그리고 헤론이 사망한 직후인 1890년 6월(음력)부터 아마도 1891년 초까지 월 50달러의 봉급을 조선정부로부터 받았다(제14회, 제15회).

에비슨과 알렌이 실 공사에게 거짓으로 말했는지, 공사가 거짓인지 알고도 그런 공문을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언급은 국가 간의 외교 관계에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나아가 미국 공사는, 제중원은 애초에 민영익과 공동 협력으로 미국 공사관에서 설립했다("該院之刱起言之由本署洎閔台泳翊共同協力" 영어로는 "This hospital was organized through this Legation with the assistance of Min Yong Ik")고 했다. 엄연한 조선 정부의 기관을 미국 공사관이 설립했다고 주장한 것이 단순한 착오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이 공문은 단순히 에비슨의 사임을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제중원에 관한 미국 측의 원려(遠慮)가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공문은 제중원의 운영권이 에비슨에게 이관되는 과정에 신호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공문과 관련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에비슨이 제중원을 그만 두겠다고 한 계기는 수술실로 쓰기로 작정한 방을 주사들이 에비슨 모르게 일본인 의사에게 빌려준 일이었다. 하지만 이 공문에는 그런 언급이 전혀 없다.

▲ 김학진이 실 공사에게 보낸 5월 22일(음력 4월 18일)자 공문. ⓒ프레시안
미국 공사의 공문에 대해 외아문 독판 서리 김학진은 5월 22일(음력 4월 18일)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제중원 의사 에비슨이 자기 돈 125원으로 약품(藥料)을 산 것을 조사하고 제중원이 받은 비용을 참조하여 그 돈을 완전히 갚도록 했으며, 땔감(火柴) 등의 비용에 대해서는 제중원에서 이를 관장하는 직원을 역시 깨끗하게 다스려 모름지기 염려함이 없도록 했습니다."

"오직 건물에 대해서는, 그 건물을 조사해 보니 원래 육영공원 교사가 머물던 사택으로 지난번에 제중원 의사가 들어갈 곳으로 비준했는데, 사실은 잠시 임시로 빌려준 것이니, 비워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는 육영공원이 돌려달라는 것이 매우 급해서이며 후의를 야박하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청컨대 해당 의사에게 이를 깨우쳐 주어 집을 비울 것을 부탁합니다."

▲ 미국 공사가 외아문에 보낸 5월 23일자 공문. ⓒ프레시안
즉, 에비슨이 제기한 문제 가운데 약품과 땔감 값 등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했고 관련 직원을 징계했다는 것이다. 주택 문제에 대해서는 육영공원이 사용하는 것을 잠시 빌려 쓴 것이니 에비슨이 퇴거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했다. "새로운 규칙"과 월급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이 공문에 대해 바로 다음 날인 5월 23일, 미국 공사는 조선 정부의 허락으로 그 동안 에비슨이 사용해 온 가옥을 비워달라는 외아문의 요청을 에비슨에게 통지했다는 공문을 보냈다. 그런 뒤 이 문제에 대해 양국 사이에 오간 공문이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문제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러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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