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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는 없다…'적'과 '동지'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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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는 없다…'적'과 '동지'가 있을 뿐!"

[철학자의 서재] <정치적인 것의 개념>

상식만큼 편한 것도 없지만 또 상식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무엇이든 상식으로 한 번 굳어지고 나면 또 다른 관점이나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칼 슈미트의 사상에 대해서도 이 말은 여지없이 적용된다.

상식적 관점에서 슈미트는 법학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뛰어난 헌법학자로 손꼽히는 동시에 이러한 빼어난 학문적 재능을 악용한 '나치의 계관법학자'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슈미트가 나치에 가입한 전력이 있으며 국가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책을 썼다는 우리의 '역사적인 상식'으로 인해 그의 학문적 업적은 쉽게 폄하되거나 무시된다.

그렇다고 슈미트의 나치 참여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옹호가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에 대한 평가와 그 사람의 이론에 대한 평가를 어느 정도 구별하자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에 대한 호불호로 인해 그 사람의 이론이나 학문적인 성과에 대한 재해석 내지 재평가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색안경을 벗고 슈미트의 저서를 보기 시작할 때 그의 저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상식을 허물어 버리는 '급진적인' 저서로 이내 탈바꿈하게 된다.

상식이란 색안경에 갇힌 칼 슈미트

▲ 칼 슈미트(1888~1985). ⓒppl.nl
우리는 흔히 '자유민주주의'라는 말을 '민주주의'라는 말과 바꾸어 사용할 정도로 이 두 개념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사고하곤 한다. 하지만 칼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인 <정치적인 것의 개념>(김효전 옮김, 법문사 펴냄)에서 이런 우리의 상식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가 보기에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 더 나아가 자유주의적인 정치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런 놀라운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그는 '정치적인 것'과 '자유주의'가 너무나 다른 내용을 담고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

"정치적인 행동이나 동기의 기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이란 적과 동지의 구별이다. 이 구별은 규준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을 제공하는 것이지 빠짐없는 정의 내지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서의 개념 규정은 아니다. 적과 동지의 구별은 가장 강한 정도의 결합 내지 분리, 연합 내지 분열의 경우를 나타낸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을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을 둔 인간의 집단적 상호행위로 정의한다. 흥미로운 건 슈미트가 말하는 '적과 동지의 구별'이란 선과 악, 미와 추, 이익과 손해의 구별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란 점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으로 선하고 미적으로 아름다우며 경제적으로 이로운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치적 의미의 동지가 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도덕적으로 악하고 미적으로 추하며 경제적으로 해로운 것이라고 해도 정치적 의미로 반드시 적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적으로 간주하며, 또 그런 적과 싸워 이기기 위해 누구와 연대하는 것이 효과적인가라는 판단에 따라 동지와 적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슈미트에게 정치적인 것은 경제나 종교와는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갈등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슈미트의 주장을 현실에 대입해 보자. 역사상 무수히 많은 종교 전쟁들이 있어 왔다. 표면적으로 볼 때, 종교 전쟁은 선과 악의 대립이나 정통과 이단의 대립이란 모습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순수하게 종교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슈미트에 따르면 이는 종교 전쟁의 본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 같은 것이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초한 집단적 결속력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종교적인 갈등이 전쟁으로까지 치달았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하게 종교적인 전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슈미트의 주장은 이론적인 논쟁의 사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소련의 뤼셍코 사건을 보자. 뤼셍코 사건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는 뤼셍코와 그에 반대하는 멘델 유전학자 간의 논쟁으로 촉발되어 이후 멘델 유전학 지지자들의 학계 퇴출과 숙청으로 비화된 사건을 말한다. 얼핏 보면 과학적인 논쟁이 정치적인 권력 투쟁으로 변질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뤼셍코는 프롤레타리아 과학을 수호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이 부르주아 과학으로 규정한 멘델 유전학을 공격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뤼셍코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멘델 유전학자들은 동지가 아니라 적이었던 셈이다.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초해 이론적 논쟁이 전개될 때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하게 이론적인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 논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논쟁의 결론 역시 이성적인 토론이나 합의보다는 힘의 논리에 좌우될 수밖에 없게 된다.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초한 집단적 상호 행위

슈미트는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의 비정치적 성격과 탈정치적 성격에 주목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이 결합된 사상이다. 따라서 슈미트의 말대로 자유주의가 비정치적이거나 탈정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면, 자유민주주의라는 정치사상 자체가 상충하는 개념들이 조합된 불완전한 사상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라는 순수하게 논리 일관된 개념에서 특수하게 정치적인 이념이 획득될 수 있는지의 여부이며, 이것은 부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떠한 논리 일관된 개인주의에도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마도 이것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치 권력과 국가 형태에 대한 불신의 정치적 실천으로 인도하지만 결코 독자적인 적극적 국가이론과 정치이론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담한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슈미트는 먼저 자유주의가 개인의 권리에 최고의 가치와 우선권을 부여하는 도덕적인 주장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측면 때문에 자유주의자는 국가와 정치에 대해 불신할 수밖에 없다고 슈미트는 분석한다. 국가와 정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보다 제한하거나 침해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자가 국가를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 없이는 개인의 생존이 위협을 받을 수 있으며, 이때 개인의 자유가 실현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는 국가를 인정하되 그 역할을 치안 유지와 같은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최소국가론을 내세우게 된다. 하지만 슈미트가 보기에 최소국가론은 위축되고 왜소화된 국가 권력에 대한 묘사일 뿐 진정한 의미의 국가이론이 아니었다. 정치 권력의 효력과 그것이 미치는 범위에 대해 슈미트는 훨씬 더 강력한 기준을 요구했던 것이다.

자유주의가 비정치적인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는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집단적 정체성의 형성이나 집단 행동을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은 슈미트에 의해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반을 둔 집단적 상호 행위로 정의된다. 따라서 적과 동지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기준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이미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자유주의자는 정치적 행위가 개인들의 행위로 남김없이 설명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표와 같은 비교적 단순한 정치 행위를 보더라도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는 게 드러난다. 왜냐하면 투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거 제도가 있어야 하고, 또 선거권자들과 피선거권자들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거가 집단적인 행위라는 것을 전제해야 선거에 당선됐다거나 낙선됐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정치적인 행위의 주어는 복수이지 단수가 아니다.

슈미트가 주목하는 자유주의의 탈정치적 성격이란 정치적인 갈등이 윤리적 용어나 경제적 용어를 통해 갈등적 성격이 제거된 또 다른 용어로 변형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투쟁'이라는 정치적 개념은 경제적인 '경쟁'으로 변형되기도 하고, 사회적인 '합의'로 변형되기도 한다. 문제는 자유주의의 이런 탈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경제나 종교 같은 영역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이 은폐된다는 것이다.

가령, 슈미트가 예로 들고 있는 자유 경쟁과 자유 무역을 보자. '경쟁'과 '무역' 앞에 붙은 '자유'라는 수식어 때문에 우리는 이런 것들이 대등한 조건에서 똑같은 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게임과 같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슈미트에 따르자면, 경쟁이 벌어지는 시장은 정치적인 투쟁에 버금가는 갈등의 장소이자 투쟁의 지점이기도 하다.

자유주의는 또한 정치적 갈등과 관련한 비현실적인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슈미트의 비판의 표적이 된다. 자유주의자는 의견들이 대립되었을 때 토론을 통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정치적인 것이 적과 동지의 구별에 기초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적과 동지를 식별하는 기준이 바뀌지 않는 한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합의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슈미트의 논리에 따른다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는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사상이기 때문에 집단적인 차원과 관련된 정치의 영역과 조화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의 특징인 대립과 갈등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어색한 만남

물론,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 제시된 슈미트의 논리를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정치적인 것을 지나치게 대립과 갈등의 관계로 보고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자유주의의 몇 가지 특징으로부터 자유주의적인 국가 내지 정치가 성립하기 힘들다고 결론내리는 슈미트의 논리에는 비약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미트의 주장은 두 가지 측면에서 현재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미국발 금융 위기로 인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슈미트의 주장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경제적 자유주의란 경제 활동의 자유, 특히 기업 활동의 자유와 시장에 대한 국가의 불간섭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경제 사상을 말한다. 슈미트에 따르면, 경제적 자유주의와 자유주의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자유주의의 탈정치적인 면을 극대화한 것이 경제적 자유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슈미트의 분석이 맞다면 우리는 자유주의가 얼마나 민주화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슈미트 사상의 또 다른 의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생각보다 느슨할 수 있다는 통찰에서 찾을 수 있다. 슈미트는 <의회민주주의 위기>에서 '국민'이나 '시민'의 범주에 드는 사람들에게만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와 모든 인간의 전면적 평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가 서로 조화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을 지적하고 있다면,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서는 자유주의와 정치 간의 부조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슈미트의 통찰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회자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더욱더 현재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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