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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 아빠 같은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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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애기 아빠 같은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토론회] "삼성 문제 해결은 이런 식으로…"

삼성 왕국에 맞선 게릴라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인터넷 방송 '칼라TV' 고정 프로그램인 <정태인의 호시탐탐>이 지난 10일 오후 마련한 자리다.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에 있는 참여연대 건물 지하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는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활동가 정애정 씨, 김성환 삼성 일반노조 위원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이 참가했다. 정 씨의 남편이었던 고(故) 황민웅 씨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설비 엔지니어로 일하다 지난 2005년 백혈병에 걸려 숨졌다. 김 위원장은 1996년 삼성에 인수된 전압기 제조업체인 이천전기에서 노사협의위원으로 활동하다 해고됐으며, 그가 펴낸 <삼성재벌 무노조 탄압백서>가 삼성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긴 수감 생활을 했다.

정애정 씨와 김성환 위원장이 '실제 피해자'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왔다면, 김상조 교수와 김상봉 교수는 조금 넓은 시야에서 삼성 문제를 다뤄왔다. 김상조 교수는 이건희 회장 일가가 삼성 그룹을 기형적으로 지배하는 구조를 바꾸는 일에, 김상봉 교수는 삼성 불매운동을 통해 삼성 왕국이 돼 버린 한국의 현실을 알리는 일에 전념해 왔다. (☞토론회 녹화 방송 보기)

삼성에 포위된 국가기구, "기대할 것 없다" vs "무조건 불신은 위험"

토론자의 이런 면면은 이날 토론회를 다양한 입장이 부딪히고 섞이는 자리로 만든 장치였다. 예컨대 김상봉 교수는 삼성 문제에 관한 한 사법부, 행정부 등 공적기구의 역할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고 본다. 시민이 주인공으로 나서는 삼성 불매운동은 이런 인식에서 나온 제안이다.

반면, 김상조 교수는 공적기구에 대한 무조건적인 불신은 위험하다고 보는 편이다. 삼성 비리를 규제하거나 심판해야 할 법원, 검찰, 금융 감독 기구 등에 이른바 '삼성 장학생'이 많이 포진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게 제도를 통한 문제 해결 가능성을 포기할 근거는 아니라는 입장이다. 시대의 퇴행에도 끄떡없는 좋은 변화는 결국 법과 제도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다는 것. 김 교수가 이끄는 경제개혁연대가 내세우는 "과거로 회귀할 수 없는 변화"라는 목표를 떠올리게 하는 입장이다.

"한국은 이미 '기업국가'" vs "삼성과의 법정 싸움, 의외로 승률 높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은 이런 입장이 무색하게 만든다. 대법원은 지난해 5월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삼성 에버랜드 CB 헐값 발행 사건에 무죄를 선고했다. 삼성 경영권 승계 문제의 핵심에 해당하는 비리 의혹이 법과 제도를 통해 씻겨나갔다. 김상봉 교수가 "한국은 이미 재벌이 지배하는 '기업국가'"라고 선언한 배경이다. 그가 보기에 법원이 재벌의 이익을 옹호하고 나서는 것은, 이런 조건에서 당연한 일이다. 이런 생각대로라면, "답은 결국 불매운동뿐"이라는 결론을 피할 길이 없다.
▲ 민병훈 재판부가 진행한 삼성특검 사건 1심 재판 선고 당시 풍경. 노골적인 면죄부를 준 판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프레시안(손문상)

'현실'에 관해서라면, 김상조 교수도 잘 알고 있다. 김상봉 교수보다 먼저 삼성 문제를 파고들었던 그다. 김상조 교수는 조금 덜 알려진 '현실'을 근거로 들었다. "1999년, 삼성전자를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이걸 시작으로 삼성과 다양한 소송을 벌였다. 승률이 얼마쯤 됐을 것 같나. 승소한 경우가 훨씬 많다. 법정에서 삼성과 싸우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은 분명하다.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그러나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삼성의 편법, 불법 행위에 법원 판결로 못을 박아두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의 법정 싸움이 삼성을 옛날보다는 더 나은 모습으로 바꿔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건희 사라진 삼성'을 생각한다면…"

이 순간, 토론 참가자들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나왔다. 김성환 위원장은 "더 나아진 게 지금의 삼성이란 말인가"라고 했다. "비리는 여전한데, 힘은 더 세졌다"는 말도 곁들였다. 그러나 이런 한숨이 곧 '절망'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 위원장 역시 '법정 싸움'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다만, 맥락은 조금 다르다. 김 위원장은 '승리'보다 '기록'에 강조점을 뒀다. 삼성SDI가 노동자들을 상대로 불법적인 휴대전화 위치추적을 했다는 사실, 삼성 인사팀이 노동조합 결성을 막기 위해 온갖 불법적인 공작을 벌였다는 사실 등이 삼성을 고소·고발한 기록에 남아 있다. 이 점만으로도 삼성을 상대로 한 '법정 싸움'은 의미가 있다는 게다.

'먼 훗날'을 기약하는 입장인 셈인데, 다른 토론자들의 말에서도 비슷한 생각이 드러났다. 김상봉 교수는 과거 군사정권을 상대로 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긴 싸움을 이야기 했다. 불공정·불평등 구조를 허물고 진짜 민주주의를 일궈내기 위한 긴 싸움의 출발점이 삼성 불매운동이라는 게다.

반면, 김상조 교수의 눈길은 조금 다른 곳에 머물렀다. 그는 최근 아이폰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미국 애플 경영자 스티브 잡스를 예로 들었다. "아이폰의 성공은 철저히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것이다.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성공은 오래갈 수 없다. 스티브 잡스가 사라지는 순간, 애플과 아이폰의 성공 신화도 끝이다." 여기까지 들으면, 누구나 다음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삼성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 이건희 회장이 황제처럼 군림하는 경영방식은, 이 회장의 퇴장과 함께 위기를 맞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런 설명은 다시 '법과 제도'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삼성 그룹이 정상적인 지배구조를 갖추도록 하는 일은, '이 회장이 사라진 뒤의 삼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런 작업은 결국 법과 제도를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삼성을 규율하는 게 이익되는 구조 짜여져야"

물론, "국가권력이 삼성 등 재벌에게 장악돼 있다"고 믿는 김상봉 교수 역시 법과 제도를 둘러싼 싸움이 아예 무의미하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는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던 군부 독재 시절에도, 법정 투쟁은 의미 있는 실천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군부 독재가 법정 투쟁으로 무너진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김상봉 교수는 군부 독재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삼성왕국 역시 대중의 뜨거운 실천으로만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대목에서 김상조 교수의 의견이 가지를 쳤다. 김 교수는 6·2지방 선거를 예로 들며 '한국 사회의 역동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번 선거 결과를 누구도 예상 못 했듯 삼성 비리에 분노하는 대중의 역동적인 실천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게다. 요컨대 삼성이 계속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태안 원유 유출 사건, <삼성을 생각한다> 등 삼성 비리 고발 서적의 잇따른 출간,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발생한 백혈병에 대한 국제적 관심 등이 쌓인 상황에서 삼성 불매운동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키면, 파격적인 변화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는 게다.

그러나 여기서 김상조 교수가 강조점을 찍은 대목은 '가능성'이다. 말 그대로 '가능성'일 뿐이라는 것. 긍정적인 가능성은 늘 부정적 가능성과 짝을 이룬다. 김상조 교수는 선한 의도로 벌인 일이 꼭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조건으로 그는 '전문성'과 '지속 가능성'을 꼽았다.

법과 제도를 중시하는 그가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지속 가능성'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삼성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인센티브 구조'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삼성 비리가 공론화 되고, 이를 제대로 규율할 때 이익을 얻는 이들이 늘어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게다. 이런 구조가 없으면, 삼성 문제 해결을 위해 오랜 시간과 노력을 쏟을 이들이 많이 생겨나기 어렵다. 결국 삼성 문제 해결을 위한 실천의 '지속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대로라면, 삼성 주주들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지배구조가 정상화되고 경영 투명성이 높아져서 이건희 회장 일가가 회사 돈을 비자금으로 빼돌릴 수 없게 됐을 때, 가장 반가워할 이들이 주주들이기 때문이다. 주주 자본주의의 폐해를 깊이 이해하고 있는 김상조 교수가 소액 주주운동에 전념했던 배경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몰라서 묻어두는 일은 없어야죠"

이쯤에서 삼성 불매운동을 주도한 김상봉 교수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그의 생각은 단호했다. 그는 "30년 전, 광주에서 도청을 지키다 숨졌던 이들이 이익 때문에 그랬던 것이냐"고 반문했다. "사람이 늘 이익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때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싸우기도 한다"는 말이 뒤따랐다. 대중의 이익 동기를 자극해 삼성 비리와 맞선다는 생각은, 그가 보기에 현실적이지 않다. 이익 동기만으로 인간의 실천을 설명하는 논리야말로, 오히려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가정에 따른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해진다. 이른바 '삼성 왕국'이라는 표현이 생겨난 현실, 그 속에서 시민의 인권이 놓인 자리를 살피면 된다. 그 자리가 몹시 위태롭다면, 김상봉 교수의 말이 옳다. 반대로 그 자리가 안전하다면, 1980년 광주에서처럼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삼성 비리와 싸우는 시민이 나타나길 기대하긴 무리다. 이날 토론회에 참가한 반올림 활동가 정애정 씨의 말은, 이런 판단을 놓고 헷갈려하는 이들에게 작은 힌트가 된다.

"저는 여기 계신 분들에 비해 시야도 좁고, 아는 것도 적어요. 애기 아빠 죽고 나서 2년이 지나서야 '이게 직업병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죠. 제가 알고 나니까, '다른 분들은 적어도 몰라서 묻어두는 일은 없어야겠다' 싶더군요. 그게 제가 반올림 활동을 하는 이유예요.

다른 피해자 가족을 만날 때도 같은 이야기를 해요. '애기 아빠가 살아 돌아오게 할 방법이 있다면, 무슨 짓이건 해야겠지요. 하지만 결코 살아 돌아오지 않는 걸 잘 알아요. 그렇다면, 제가 뒤늦게 알게 된 것, 그러니까 애기 아빠가 반도체 공장에서 직업병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 감춰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삼성은 감춰두길 원하죠. 돈도 주고, 회유도 하죠. 하지만 그것 때문에 입을 다문다면…. 글쎄요. 사람이, 그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아요. 당장 굶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빚쟁이에게 쫓겨서 막다른 골목에 몰린 것만 아니라면, 같이 싸웁시다. 애기 아빠 같은 사람이 또 나오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말해요.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있고, 끝내 가로젓는 분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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