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실 수술(Dispensary Operations). ⓒ프레시안 |
1885년 4월부터 1년 동안 제중원을 찾은 환자 1만460명 가운데 4퍼센트가 조금 안 되는 394명이 외래 진료실에서 "수술(operation)"을 받았다. 이 수술 중 대부분을 차지한 것은 종기를 절개하여 고름을 배출(排膿)한 것과 비강 폴립, 낭종, 지방종을 제거한 것들로 이것들이 전체 수술의 70퍼센트가 넘었다.
요즈음 기준으로는 수술이라기보다는 가벼운 "외과적 처치"에 해당하는 것들이지만 당시에는 사정이 달랐다.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된 "종기"가 조선 시대에는 가장 흔하면서도 사람들을 크게 괴롭혔던 "질병"이었다. 논란이 아직 남아 있지만, 조선의 제22대 국왕인 정조(正祖)의 사인이 종기였으며 그밖에 문종, 성종, 중종,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순조도 종기로 크게 고생했거나 그것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국왕이 그럴 정도였으니 일반인은 오죽했을까? 사람들의 영양 상태와 위생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종기를 일으키는 포도상구균과 같은 병원균들에 잘 감염되었고, 한번 감염되면 잘 낫지 않았다. 커다란 종기를 몇 개씩 얼굴과 몸에 달고 평생을 지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종기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모튼과 롱이 처음으로 에테르로 마취한(제29회) 환자들은 모두 종기 환자였다. 또 종기를 짜내기 위해 마취까지 한 것을 보면 종기의 크기와 고름의 양이 상당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이렇게 흔하면서도 위중한 질병이다 보니, 조선에도 종기를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종기 의사'가 따로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임언국(任彦國·16세기), 백광현(白光玹· 1625~1697), 이의춘(李宜春·19세기) 등이 특히 이름을 날렸다.
종기 의사들은 종기를 내과적으로 치료하기도 했지만 침이나 칼을 이용하여 고름을 짜내는 외과적 처치(수술)도 했다. 말하자면 종기 의사는 조선 시대의 외과 의사였다.
▲ 종기와 부스럼의 특효약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이명래 고약"을 만든 이명래(李明來· 1890~1952). 이명래 고약은 1906년에 처음 선을 보여 일제 시대는 물론이고 항생제가 보급된 해방 뒤에까지 애용되었다. 그만큼 종기가 많았음을 나타낸다. 해방 전후에 종기 치료 목적으로 많이 쓰였던 고약(오른쪽,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 소장). 이명래 고약 외에도 발근고(拔根膏), 백고약, 이고약, 조고약 등이 보인다. 대개 기름종이에 싸인 고약을 성냥불로 녹여 종기 부위에 붙이면 고름이 빠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프레시안 |
<보고서>의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18쪽)에는 외래에서 종기 환자를 치료한 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다.
"통계에서 볼 수 있듯이 203명의 환자가 몸의 거의 모든 부위에 생긴 종기(Abscess)로 치료를 받았다. 몇몇 종기는 매우 컸다. 무릎 뒤쪽인 오금에 있었던 종기는 절개했을 때 고름이 280그램(10온스) 이상 나왔고, 똑같은 부위에 생긴 종기에서 220그램(8온스) 이상 나온 경우도 있었다. 또 넓적다리, 두피의 절반을 포함한 머리, 가슴 근육, 겨드랑이에 생긴 종기에서도 각각 220그램(8온스) 가량의 고름이 나왔다."
"이러한 종기 가운데 일부는 급성이었지만, 대다수는 만성이었다. 우리는 만성 종기가 연주창(scrofula)과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는데, 보통 목 근처에 생겼다. 이러한 경우 종기가 생긴 부위의 모든 결합 조직에 골이 패였고 공동(空洞) 구멍이 생겼다. 이러한 환자들은 병원을 한번 찾고는 다시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대체로 통상적인 치료를 했는데, 두 군데를 절개하여 고름을 짜냈고, 때때로 흡인기(aspirator)를 사용하기도 했다. 40분의 1로 희석한 석탄산수로 고름 부위를 팽창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가 경과를 추적할 수 있었던 환자들은 대개 치료 결과가 좋았다."
외래에서 외과적으로 치료한 것으로도 종기가 압도적으로 많았거니와, 입원실에서도 종기 환자가 제일 많았다. 종기 환자 중에서 증세가 심한 경우에는 입원을 시켜 수술을 하고 경과를 지켜보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고서>에서 종기에서 나온 고름의 양이 많은 경우를 특별히 언급한 것은 미국에서는 그 무렵에 그러한 환자를 별로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몇십 년 사이에 구미에서는 주로 영양 상태와 위생 상태의 개선으로 심한 종기 환자는 사라지고 있었다.
보고서는 또한 결핵의 일종인 연주창일 가능성이 있는 종기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세균학적 검사로 확진(確診)을 내리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주로 목 근처의 림프절에 생기는 림프성 결핵이 조선에도 있었음을 시사하는 임상 보고이다. 하지만 그러한 환자들은 병원을 다시 찾지 않은 것으로 보아 별다른 치료법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탄산수는 고름 부위를 팽창시키기 위해 사용했다고 했는데, 그와 더불어 소독, 멸균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종기의 외과적 치료에 있어서 서양식과 조선식의 중요한 차이는 소독, 멸균 여부에도 있었는데 다음과 같은 언급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곳의 (한)의사가 치료했던 종기 환자를 많이 보았다. 그들의 치료는 그저 종기 부위를 열고, 길게 꼰 종이를 심지 구실을 하도록 집어넣는 단순한 것이었다. 이러한 치료가 종종 염증의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였다. 제중원(the Hospital)으로 후송될 정도로 심한 환자들은 이 종이 심지를 제거하고 매일 석탄산수를 주입해 주는 것으로 대개 괄목할 효과를 보았다."
▲ 조선의 전통적인 종기 치료 방법에 관한 <보고서>(18쪽)의 기록. ⓒ프레시안 |
▲ 19세기 말의 휴대용 수술 세트(왼쪽, <Illustrated Catalogue of Surgical Instruments>. 영국 Evans & Wormull·1876년). 제중원의 외래 진료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술 도구를 사용하여 수술을 했을 것이다. 1880년대의 멸균용 분무기(오른쪽, <A Text-book on Surgery>. 미국 D. Appleton and Co, 1889년). 석탄산수와 같은 멸균, 소독제를 환부에 주입하기도 했지만 분무기를 이용하여 수술장에 뿌리기도 했다. ⓒ프레시안 |
외래든 입원실이든 제중원의 치료에서 특기할 것은 안과 분야이다. 눈에 이상이 있어 제중원을 찾은 외래 환자는 모두 629명(전체 환자의 6퍼센트)으로 안검내반(110명), 각막혼탁(104명), 변연안검염(72명), 결막염(67명), 각막궤양(59명), 백내장(53명), 각막염(46명), 흑내장(25명), 홍채염(12명), 포도종(12명), 익상편(10명), 사시(5명) 순이었다.
각막 질환과 백내장은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 모두 입원을 시켰고, 외래에서 외과 처치를 한 것은 안검내반뿐이었다. 입원을 해서 수술을 받은 안검내반 환자 13명이 모두 "완치(cure)"된 것으로 보아 그보다 심하지 않았을 외래 수술 환자 20명의 치료 효과도 물론 좋았을 것이다.
안검내반(眼瞼內反)은 아래 눈꺼풀의 가장자리가 안쪽으로 구부러지는 것으로 속눈썹이 각막상피를 찔러 손상을 주는 것과 같은 합병증이 없는 경우 대개 수술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수술이 필요한 경우라도 이미 19세기 후반에는 쉽게 시술, 완치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치료 경험이 없었던 조선에서는 상당한 수술로 평가받았을 법하다.
▲ 안검내반 수술의 원리를 설명하는 모식도(왼쪽, <Manual of Eye Surgery>. 미국 Wilstach, Baldwin, Co, 1874년). 19세기 후반에 가장 간단하면서도 치료 효과가 좋은 안과 수술이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효과 만점이었다. 19세기 말의 검안경(오른쪽, <Illustrated Catalogue of Surgical Instruments>. 영국 Evans & Wormull, 1876년). 독일의 물리학자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1821~1894)가 1851년 처음으로 검안경을 만든 이래 다양한 종류가 출시되었다. 안과 환자가 적지 않았던 제중원에서도 검안경을 이용했을 것이며, 알렌의 유품으로 알려진 것 가운데 이와 비슷한 검안경이 있다. ⓒ프레시안 |
<보고서>에서는 우두 접종과 임질 감염의 치료도 외과수술로 취급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임질과 매독 등 성병의 치료는 외과 의사의 일이었으며, 대체로 20세기에 들어서 피부비뇨기과 소관이 되었다. 제중원에서는 대체로 성병 중에서 증상이 비교적 가벼운 임질은 외래에서 치료했고 매독, 연성하감, 경성하감은 환자를 입원시켜 치료했다.
도관 삽입으로 치료한 경우는 21건이었는데, 어떤 질병의 환자에게 어느 부위에 도관을 삽입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환부에 도관을 집어넣어 수종(水腫)이나 고름을 뽑아낸 것으로 여겨진다. 복수(腹水)가 생긴 환자에서 복수 천자(穿刺)를 한 경우도 2건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한 명은 천자를 다섯 차례 받았다. 수종에 대한 치료는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했고, 증세가 호전되면 환자들은 다시 병원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 회에서는 입원 환자 치료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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