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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광고하는 김연아의 '진짜' 배후는?

[김영종의 '잡설'·8]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축제를 본 소감 ②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축제를 본 소감 ②

예비체이는 예(Yei)라는 신을 맞이하는 나바호족의 가을 축제다. 뉴멕시코 주의 십록(Ship Rock)에서 열렸는데, 이웃한 유타 주와 애리조나 주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축제 기간이 추수감사절과 겹친 덕분에, 팡파르를 울리는 거리 행진과 이 기회에 한몫 보려는 놀이 기구로 거리는 억지로 들뜬 것처럼 보였다. 밤이 되자 많은 원주민들이 예비체이에 참여했다.

예비체이는 긴 겨울의 문턱에서 하늘의 예(Yei)가 새봄에 다시 살아나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맞이하는 제의다. 예(Yei)의 죽음은 사멸이 아니라 지하 세계에서 이어지는 새로운 삶이다. 마치 눈부신 해가 새벽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재생을 위한 과정이다.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열기로 밤의 시간을 덥혔다. 수많은 원주민들이 제의 장소를 빙 둘러싼 가운데 타오르는 화톳불 주위로 노인들과 아녀자들이 앉아 있다. 낮에 본 거리의 겉도는 활기와는 딴판으로, '예'의 죽음을 재생을 위한 잉태로 받아들이는 신성한 열기에 휩싸여 있다. 뱃속의 생명을 나이로 치지 않는 서양인들 눈에는 이해하기 힘든 제의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어머니 배 속에 있는 동안까지 생명으로 쳐서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지만, 서양에서는 어머니 배에서 나온 때부터 1년이 지나야 한 살을 먹는다.)

달빛 아래 하얀 천막에서 제의 노래와 북소리가 밤하늘을 찢으며 끊임없이 울려나온다. 이 천막이 '호간'이라는 가장 신성한 장소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메디슨(샤먼)들이 커다란 북을 둘러싸고 앉아 맹렬히 두드리며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북소리와 노랫소리는 절대로 끊어져서는 안 된다고 한다. 나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 생명의 뱀이 스멀스멀 몸 안팎으로 기어 다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그 느낌에 빠져 있다가 살며시 밖으로 나와 사람들 틈에 섞여서 제의가 진행되는 모습을 구경했다. 한 조는 열두 명의 연행자(演行者)로 이루어졌는데, 리더가 호간 안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받아오면서 제의가 시작된다. 이들은 모두 의례의 가면을 쓰고 부족 전통의 복장을 입고 있다.

리더를 뒤따라 짝을 지은 남녀가 주술 노래를 부르면서 박 같은 악기를 짤짤 흔들며 가고, 맨 뒤에서는 어릿광대가 관중을 웃기며 따라간다. 지신밟기를 연상시키는 춤동작이다. 연행자들이 무대 끝에 이르면 두 줄로 다시 갈라졌다가 시작점으로 돌아와 합해지기를 열두 번쯤 반복한 것 같다(계절의 순환을 나타내는 게 아닌가 싶다).

저 멀리에는 연행조들이 걸어 나오고 들어가는 곳이 있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가는 도중 하마터면 제의하는 공간을 가로지를 뻔했다. 갑자기 누가 신호를 보내와 얼른 눈치 채고 멀찌감치 물러났다. 금기야말로 의식을 성화(聖化)시킨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그곳에 가서 보니 시작하는 조든 끝난 조든 모두 불로 정화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다. 어느새 먼동이 터온다.

나는 예비체이를 내리 사흘 동안 계속 보았다. 물론 자기 땅을 빼앗기기 전과 같은 제의는 아니지만, 그래도 관람용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히 느껴졌다. 비록 원주민 전사와 함께 신들도 사라졌으나, 제의의 명맥을 유지하려는 후손들의 열망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틈을 내어 원주민의 유적지를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그랜드캐니언 같은 어마어마한 계곡에서 제의적 축제를 치른 이들의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활기찼던가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며칠 후에는 파우와우를 참관하기 위해 길을 떠나 연이틀 동안 관람하였다. 원래 파우와우는 평원 부족들이 초원에서 만나 어울려 놀고 음식을 나누고 장을 세워 물건을 교환하는 전통적인 회합의 축제다.

내가 갔던 그날은 사우스다코타 주에 있는 래피드시티의 시민회관에서 파우와우가 열렸다. 체육관에서는 부족별 춤 경연 대회를 개최하고, 옆 홀에서는 토속적인 물건들을 판매하고, 복도에서는 먹을거리를 팔았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민속 행사와 매우 비슷한 풍경이다. 나는 미리 준비해간 접이식 의자를 스탠드 바로 아래 놓고 가장 근접한 자리에서 지인과 함께 관람했다.

개회식 때는 군복을 입은 각 부족의 기수들이 성조기를 호위하며 저마다 독특한 부족 깃발을 들고 선두로 입장했다. 줄의 맨 끝에는 소년소녀들이 군복을 입고 뒤따랐다. 이어서 화려한 깃털로 장식한 참가 부족의 무용수들이 끝없이 들어왔다. 원형으로 된 체육관의 스탠드 맨 앞자리에는 부족별로 큰 북을 둘러싸고 북재비 10여 명이 앉아 있었다.

춤 경연 대회에서는 한 번에 몇 팀이 나와서 춤을 추고, 심사위원들이 심사를 했다. 열심히 북 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지만, 왠지 예비체이와는 딴판으로 신성한 열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관람석에도 자기편을 응원하는 냉랭한 구경꾼들만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도 금기를 어길 뻔했다. 한 무용수가 춤을 추다가 내 발 앞에 깃털을 떨어뜨렸는데, 내가 그것을 막 주우려는 순간 심사위원 한 사람이 잽싸게 모자를 던져 깃털을 덮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고, 한순간 모든 동작이 정지됐다. 지인이 옆에서 귓속말로 일러주기를, 만약 깃털에 손을 대면 그 부족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본의 아니게 원주민이 될 뻔했다. 진행 요원 몇 사람이 와서 살펴보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알리자, 대회가 다시 이어졌다.

내가 진정으로 보고 싶은 춤은 저 유명한 '망령의 춤(Ghost Dance)'이었다. 물론 이런 박제된 춤판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춤에 깃든 영혼의 잔향이라도 맡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망령의 춤을 소개해보겠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웅들이 모두 죽고 백인의 학살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이제 더는 백인과 싸울 남자도, 몸에 걸칠 천 조각도, 입에 풀칠할 초근목피나 사냥감도, 추위를 피할 천막도, 병자를 돌보고 아사자를 파묻을 몸 성한 사람도 하나 없는 그야말로 막다른 때에 구세주로 나타난 것이 망령의 춤이다.

'망령의 춤교(敎)'를 창시한 워보카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

"인디언은 모두 춤춰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계속 춤을 춰야 한다. 내년에 봄이 오면 위대한 정령이 오시리라. 온갖 짐승들을 데리고 오시리라. 들짐승은 어디서나 가득 뛰놀고 죽은 인디언은 모두 다시 살아나 젊은 사람같이 튼튼해지리라. 늙은 사람은 젊어지고 눈먼 사람은 눈을 뜨며 좋은 시절을 맞이하리라.

위대한 정령이 이 길로 오실 때 인디언은 백인들한테서 벗어나 높이 산으로 오르리. 백인은 인디언을 해칠 수 없구나. 인디언이 높은 곳에 오르고 나면 큰 홍수가 지리라. 모든 백인들은 물에 빠져 죽는구나. 물은 흘러가고 지상엔 인디언과 짐승들만이 남으리니.

마술사는 계속해 춤추라고 신탁을 내리며 화창한 날이 열리리라. 춤추지 않고 내 말을 믿지 않는 인디언들에게 화 있을진저. 점점 왜소해져서 한 자 크기로 줄어들리라. 왜소한 자들이여. 나무로 변해 불에 탈지니라."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나무심는사람 펴냄, 650~651쪽)


영험한 '망령의 셔츠'를 입으면 총알이 피해간다고 믿는 원주민들은 저항과 복수 대신 백인의 총구 앞에서 춤을 추었다. 같은 19세기 말 부적을 가지고 있으면 총알이 피해간다는 믿음을 품었던 동학군과 오버랩 되면서, 체육관에서 경연 대회를 벌이고 있는 망령의 춤이 너무나 비참하게 느껴졌다.

망령의 춤은 어떤 특별한 스텝과 동작이 있는 건 아니다. 늘 추어오던 전통적인 부족의 춤, 거기에 메시아 워보카가 말하는 예언이 춤의 영혼으로 자리 잡으면 곧 망령의 춤이 되는 것이다.

ⓒ김용철

원주민의 축제를 보고서 느낀 것도 많고 할 말도 많지만, 나는 이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제의의 축제가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 만약 저 신성한 예비체이가 경연 대회가 됐더라면 신과의 관련은 끊어지고 인간의 평가를 기다리는 예능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원주민의 두 축제를 보고 나니, 올림픽이든 국제 콩쿠르든 신춘문예든 모두 신이 준 재능을 인간의 평가 아래 두기 위한 장치라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다. 사실 입시 제도나 자격 제도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모든 게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예술은,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을 가장 감동시키는 봉헌물이었다. 이때의 재능은 오로지 신의 기쁨을 통해서만 평가가 돌아오는 종속변수다. 이 함수 속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겸손할 수 있었으며,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원으로서 활기와 기쁨에 넘치는 삶을 구현할 수 있었다.

현대에 들어와 신들은 황혼을 지나 이미 죽음을 맞이했다. 현대인은 죽은 신이 종속변수가 된 함수 속에서 살고 있다. 죽은 신을 살아 있는 것처럼 위장해 신이 내린 재능이라는 둥 호들갑을 떨 뿐이다.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훌륭한 재능들이 신의 기쁨이 아니라 '재능 소유자의 만족'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능은 뽐내기 위한 무기 이상의 것이 아니다. 나는 체육관에서 추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춤이 얼마나 꼴사나운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인간이 평가하는 재능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날것으로 꾸밈없이 보여준 현장이었다.

현대는 이 날것에 지적인 포장을 가미해 상품 아닌 상품으로 만든다. 버젓이 상품화해놓고서는 '비상품의 신성한 것'이라고 세뇌한다는 말이다. 재능이란 원래 신성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에서 원래 개념을 좇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 최고급 장사꾼들의 날조에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날조가 백주에 버젓이 주인 행세하는 오늘날, 재능의 평가에 근거해 있는 현대 예술은 수와 양과 척도의 예술인 서양의 '고전 예술'(클래식)로 언제나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상품화를 위해 재능은 평가돼야 하며, 재능의 평가는 비교 측정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조(낭만주의나 초현실주의 등)가 등장해 반발해도, 앞의 '성기 관망파의 예술'에서 보았듯이, 그것 또한 본질을 추구하는 인식의 산물인 한은 '고전 예술' 계통과 쌍생아일 뿐이다.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재능은 신의 기쁨이 아니라 본질의 체현을 목표로 한다. 본질은 개별 사물의 신성을 훔치고 다양성을 죽이며 획일화한다. 본질은 비교 측정을 본성으로 하는 이성을 요청하지만, 실은 이성을 위해 존재하는 허구적인 개념일 뿐이다. 본질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이며, 실재하지 않는다. (본질의 문제는 2부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이 허상이 '빛과 진리'라는 미명 아래 전체 아메리카 원주민을 도륙한 것이다. (어느 방송에서 방영한 역사 다큐멘터리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대적으로 살육한 현장 위에 백인들이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성당을 세웠는데, 성당 머리에 '빛과 진리'라고 써놓았다고.)

예비체이와 파우와우의 극명한 대조를 보면서 현대 사회는 왜 그토록 재능이 경쟁적이어야 하는지를 확실히 실감했다. 김연아 선수가 삼성의 제품을 광고하고 있는 브라운관 저편에 본질을 장악하고 있는 자의 정체가 또렷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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