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시대의 광대들…조용필과 장기하의 공통점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시대의 광대들…조용필과 장기하의 공통점은?

[김영종의 '잡설'·6] 산조 정신과 애니미즘 미학 ②

그러면 산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산조(散調)는 형성의 미학이다. 문자 그대로 흩어져 있는(散) 소리를 한데 모아 어울리게(調) 만든 음악이다. 19세기 말 전남 영암 사람 김창조가 산조의 틀을 만들었다. 당시 민중의 현장에 흩어져 있던 소리 가락(散調)을 대표하는 것은 시나위와 판소리의 가락이었다. 시나위는 본래 굿할 때 연주하는 기악이지만, 굿판을 떠나서도 잔칫집이나 놀이판 따위의 이른바 제도권 밖에서 민중의 흥취를 담아냈다.

산조를 '허튼 가락'이라고 하는 것은 즉흥적인 측면 때문이기도 하지만, 클래식이 아닌 속되고 잡된 민중의 가락인 까닭이다. 선비나 양반이 하는 음악을 '정악(正樂)-바른 음악'이라 했으니, 민중의 음악을 허튼 음악이라 한 것은 당연하다.

19세기는 민중의 활력이 봇물 터지듯 분출한 시기로, 대표적인 사례로는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을 들 수 있다. 형성의 미학은 민중이 활력에 넘쳐 있는 곳에서 가장 흐드러지게 꽃핀다. 형성의 미학은 수많은 물방울과 물줄기가 모이고 섞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는 미학이다. 그 예로는 신화나 전설, 옛이야기, 민화(民畵) 등이 있다.

형성의 미학에 대립되는 개념이 창조의 미학인데, 앞 장에서도 말했듯이 그것은 자아의 미학이자 인식의 미학이며 자본주의의 미학이다. 세계적으로 이미 근대 미학이 종언을 고한 현시점에서, 유일한 출구는 형성의 미학으로 돌아가는 길뿐이다. 그 길에 이정표가 하나 세워져 있다. 바로 산조 정신이다. 그런데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산조 정신은 (19세기적인) 민중의 활력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19세기에 보인 민중의 활력은 그들의 삶 한가운데 자리 잡은 시나위를 통해서 넘쳐났다. 시나위 가락은 신과 접선하는 아름다운 진동이다. 내가 우산 미학이라 이름 붙인, 원시적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을 무한원점에 이르게 하는 진동 말이다. 동학과 갑오농민전쟁은 이 진동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현대의 학자들은 (종교 사상으로서의 동학을 비롯한 신흥 종교 비판 등을 통해) 이 진동을 미신이라 하여 19세기 민중적 역량의 한계로 지적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학자들이 서구적 합리성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을 근대적으로만 해석하려는 데서 나온, 아이러니컬한 그들의 한계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더 길게 할 수 없기에, 이 운동은 외려 그 진동(미신/애니미즘)으로 인해 서구적 근대가 아닌, 현대가 봉착한 탈근대 너머의 전망에 맞닿아 있다는 점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나는 19세기 산조 정신의 눈부신 승리로서 백낙준이 만든 거문고산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거문고는 모든 악기의 왕이라고 하여 백악지장이라 일컬어진, 선비와 양반들만이 타는 악기였다. 이 악기가 드디어 정악이 아닌 천한 백성들의 허튼 가락을 탄 것이다. 이건 어마어마한 사건이다. 상놈이 양반을 가지고 논 것을 넘어 양반의 음악을 평정해버린 것이다.

이 놀라운 일은 오직 형성의 미학만이 할 수 있다. 한 예로, 북한에서 근대 미학의 하나인 사회주의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음악 분야를 개혁할 때 유일하게 실패한 악기가 바로 거문고다. 그 결과, 양반 문화의 척결은 고사하고 거문고 연주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창조 미학인 근대 미학의 한계가 잘 드러난 단면이다.

ⓒ김용철

최근 산조의 현대화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에 나는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현대화는 근대 미학에 입각해 산조를 발전시키자는 것인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산조 정신을 위배한, 아니 죽이는 발상이다. 현대화는 대체로 크로스오버나 퓨전으로 나타나며, 서양 음악과의 교배가 핵심인 것으로 보인다.

서양에서는 벌써 오래전부터 서양적인 소재에 식상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오지의 야생 부족 등 비유럽 세계의 소재에 열광하고 있다. 심지어 근대 미학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던 미학에서조차 서구의 멘탈리티 아래 비유럽 세계의 소재들을 이용하고 있다. 얼핏 비유럽 세계의 소재들이 세계 예술의 주류로 부상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러한 현상은 어디까지나 오리엔탈리즘 부류에 불과하다.

산조가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주목받았다고 해서 산조 정신이 세계 무대에서 꽃을 피운 것이 결코 아니다. 산조 정신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들의 평가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정악에 비견되는 '세계 중심의 음악'을 조롱하며, 그것을 속화시키는 세계 민중의 잡스럽고(그래서 '잡악'이라 불리고) 세속적인(그래서 '속악'이라 불리는) 활기 속에 살아 숨 쉰다. 이른바 산조의 세계화는 세계적인 허튼 가락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산조 정신의 계승은 세계적인 상아탑에서 창조주적 작가 정신으로 무장된 음악가들한테서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다.

비유럽 세계에 흩어져 있는 소재들의 영혼은 서구의 멘탈리티로 결코 재생될 수 없으며, 그 소재들의 출생지 토양에서만 생명력을 내뿜는다. 마치 유럽의 유명 박물관에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유물들이 진열돼 있지만, 유물들은 원래 있던 그 자리에서만 생명력이 있는 것과 같다. 박물관의 박제화한 유물들을 어떤 천재가 아무리 획기적인 방식으로 살려내고자 해도, 예컨대 생태학적이거나 또는 자연사와 연결한 로컬주의로 진열한다고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생명력은 결코 살아나지 않는다.

재삼 강조하지만, 산조의 발전은 산조 정신 속에서만 가능하다. 산조 정신은 형성의 미학이다. 오늘날 이 땅의 대중이 아무리 서구화했다 해도 산조의 가락은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신중현'이라든가 '조용필', '김수철', '장기하와 얼굴들'의 음악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산조 정신은 대중의 가락 세계 속에 흩어져 있는 (산조 장단의) 알레고리-바로 위에서 예로 든, 신중현 등의 음악 속에 녹아들어 있는 산조 장단-를 찾아서 이것들로 새로운 틀을 짜는 작업 속에 있다. 동시에, 이 작업은 산조 정신이 태어난 19세기의 진동과 같은 민중의 진동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애니미즘 미학을 전망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조 정신은 굿(또는 애니미즘)에서 태어났으며, 바로 그런 까닭에 만물에 깃든 영혼과 이야기하는 민중의 심성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것이다.

이 작업을 하는 예술가는 제도권을 기웃거려서는 안 된다. 제도권은 민중의 활력을 죽이는 곳이다. 예술가는 광대여야 한다. 광대는 본디 천한 출생이다. 그는 민중의 사랑과 비웃음을 동시에 받는다. 그래서 광대는 익살을 부리고 분노한다. 민중의 활력은 광대와 함께 요동친다. 하비 콕스가 예수를 스타가 아니라 광대로 본 것처럼, 예술가가 천한 광대이지 않으면 (예수가 민중 속에서 천국의 씨앗을 모았듯이) 민중 속에 흩어진 가락들을 모을 수 있는 열정과 힘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그를 자본의 노리개인 스타가 아니라 영원한 광대로 남게 하는 것은 바로 애니미즘 미학이다. 위에서 말한 (디오니소스적 태양과 같은) 원시적 이성이 태양처럼 어마어마한 빛을 내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물병자리 시대의 그리스도를 통해 빛과 어둠이 암수 뱀처럼 뒤엉킨 원시적 축제의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