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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동거는 일상생활…그 해결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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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과 동거는 일상생활…그 해결책은?

[근대 의료의 풍경·28] <제중원> 보고서 ④

이번 회에서는 소화기계 질병, 순환기계 질병, 호흡기계 질병, 신경계 질병으로 제중원을 찾은 환자들에 대해 살펴보자.


소화기계 질병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나와 있는 소화기계 질병은 소화 불량(dyspepsia and indigestion), 설사, 이질, 치질, 항문누공, 회충, 유구조충(보고서에는 "Tinea Salium"이라고 되어 있는데 "Taenia solium"을 잘못 적었을 것이다) 순이다. 당시에는 별다른 진단 검사 방법이 없었으므로 대체로 임상적 증상에 따른 진단이라고 생각된다.

설사와 이질(痢疾)의 구분도 증상의 차이에 의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설사에 피와 점액이 섞인 경우를 대개 이질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그리고 설사와 이질의 치료법은 <보고서>에 나와 있지 않은데, 의사들이 두 질병에 대해 아직 원인 치료를 할 수 없었던 때이므로, 어느 쪽으로 진단을 내리더라도 증상만을 완화시키는 대증요법에 머물렀을 것이다. 또 링거액의 정맥주사와 같은 수액(輸液) 요법이 나오기 전이므로 증상의 뚜렷한 호전을 기대하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 시겔라균을 발견한 일본인 세균학자 시가. 자서전 격인 <어느 세균학자의 회상>(1966년) 표지에 나와 있는 만년의 사진이다. 시가는 1920년 조선총독부 부속의원장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임명받아 조선에 와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장(1926~29년)과 총장(1929~31년)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페스트균을 발견한 스승 기타사토(北理柴三郞·1852~1931), 살바르산 606을 개발한 하타(제26회)와 더불어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가장 대표적인 의학자이다. ⓒ프레시안
1897년 일본인 세균학자 시가(志賀潔·1871~1957)가 적리균(赤痢菌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시겔라 균이라고도 한다)을 발견한 뒤로는 시설과 인력이 갖추어지는 경우에 세균학적 방법으로 세균성 이질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더라도 항생제가 개발될 때까지는 이질에 대해 효과적인 치료를 할 수 없었다. 불과 100여 년 전이지만 근대 서양 의학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무력했다.

한편, 치질과 항문누공에 탈장(hernia), 변비, 장탈출(prolapse bowel), 항문열창 등을 합하면 대장-항문 부위에 이상이 있는 환자는 모두 309명이다. 이러한 질병이나 증상은 대개 당시에 어느 정도 외과적 처치가 가능한 것들로, 제중원의 성가를 높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간-담도 질병으로 여겨지는 것들로는 황달, 간경변, 간염이 있는데, 이들 사이의 구분(감별진단)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하다.

단순성인후궤양, 인두염, 편도선염, 중이염 등 요즈음은 이비인후과에서 다루는 질병과 충치, 구내염을 소화기계 질병으로 분류한 점도 흥미를 끈다.

<보고서> 16쪽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틀림없이 더 많은 기생충 환자가 있을 것이다. 회충과 조충은 매우 흔해 외국인도 감염되지 않은 경우가 거의 없는데(few foreigners escape), 대개 크게 고통을 받거나 의사들이 묻지 않으면 별 치료를 하지 않는다."

위의 지적대로 당시 조선에 살면서 기생충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인분 등 오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에서 장내 기생충의 감염 사이클이 차단될 수 없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그런 환경에서는 산토닌과 해인초(海人草) 같은 당시의 구충약도 효과가 제한적이었을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람들은 치료할 생각도 별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충 환자와 유구조충 환자가 93명, 86명에 지나지 않은 것은 그러한 사정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순환기계 질병

순환기계 환자는 114명으로 전체의 1.1퍼센트에 불과해 당시 평균 수명이 30세 안팎일 정도로 짧았던 점을 생각하더라도 매우 적다. 게다가 요즈음 기준으로는 각혈과 코피를 순환기계 질병으로 보기 어려우므로, 제중원을 찾은 순환기계 환자는 거의 없었다는 얘기다.

이탈리아의 리바 로치(Scipione Riva-Rocci·1863~1937)가 임상적으로 유용한 혈압계를 만들어낸 것이 1896년이므로, 그보다 10년 전인 1885~86년에 혈압 이상 환자를 찾아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순환기계 질병으로 오직 승모판부전증 7명, 동맥류 2명, 동맥염 1명만 보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중풍(뇌졸중)은 그 이전부터 적지 않게 있었으므로, 신경계 질병으로 분류된 마비 중에 사실은 순환기계 질병인 중풍이 상당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 세종 원년(1418년) 11월 5일(음력)자. 중풍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프레시안
<조선(왕조)실록>에만도 중풍(中風)에 관한 기록이 100여 차례 나와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에는 "총제(摠制) 이춘생이 중풍으로 목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살아나니, 상왕이 말하기를, 요사이 중풍병으로 갑자기 죽은 사람이 20여 인이나 되니, 마땅히 응급 치료의 방문(方文)을 써서 대궐 안과 병조에 방(榜)을 붙이게 할 것이다, 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상왕(태종)이 병조(兵曹)에 방을 붙이도록 한 것을 보면 중풍이 특히 군인들에게 잘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보고서>에는 각혈(咯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매우 흥미로운 언급이 있다.

"각혈 환자 92명 중에는 의심할 여지없이 많은 (폐)디스토마 환자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미경이 없고 사후 부검을 할 수 없어 이를 확인할 수는 없다." (16쪽)

폐디스토마 충체(蟲體)는 1878년 커버트(Kerbert)가 암스테르담 동물원에서 죽은 벵갈산 호랑이의 폐에서 처음 발견했다. 이어서 1879년에는 링거(Sydney Ringer·링거액을 만든 생리학자와는 동명이인이다)가 타이완에 살았던 포르투갈 사람을 부검하던 중 그 사람 폐에서 폐디스토마 충체를 발견했다. 그리고 패트릭 맨슨(Patrick Manson·1844~1922)이 1880년 각혈을 하는 일본인 환자의 객담에서 미지(未知)의 충란(蟲卵)을 관찰했고, 1883년에는 그것이 링거가 발견했던 충체의 충란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로써 동아시아에서 폐디스토마가 각혈의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1889년 류카르트(Leuckart)는 커버트가 발견했던 폐디스토마도 맨슨이 확인한 것과 같은 종류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링거와 맨슨의 새로운 발견을 알렌과 헤론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러한 지식을 자신들이 보았던 환자들에게 대입시켜 보았던 것이다.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폐디스토마가 보고되지 않았고, 또 충체와 충란만 알려졌을 뿐 감염 경로 등이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그들이 각혈의 원인으로 폐디스토마를 생각했던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 열대의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패트릭 맨슨. 폐디스토마, 사상충, 말라리아, 주혈흡충 등의 연구에 크게 기여했다. 맨슨이 관여하여 1887년에 설립된 홍콩 의학교(香港華人西醫書院)의 제1회 입학생 가운데는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의 주역이 된 쑨원(孫文)도 있었다. ⓒ프레시안
각혈은 당시로는 뒤에서 살펴볼 폐결핵과 연관 짓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이것을 굳이 순환기계 질병으로 분류하고 폐디스토마라는 생소한 질병을 연상했던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만큼 질병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많이 달랐던 시대였기 때문일 것이다.

알렌과 헤론의 희망대로 현미경이 있었거나 부검을 할 수 있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1880년대에 폐디스토마가 발견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면 제중원에서는 각혈을 어떻게 치료했을까, 각혈의 원인이 폐디스토마로 밝혀졌다면 치료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호흡기계 질병

제중원을 찾은 호흡기계 질병 환자도 그리 많지 않아 전체 환자의 4.6퍼센트인 476명이었다. 호흡기계 질병들의 진단과 감별도 증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천식과 기관지염이 각각 30퍼센트 가량으로 가장 많았다. 또 호흡기계 질병에 대한 치료도 다른 대부분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대증요법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소모성질병(phthisis)이라고 한 것은 폐결핵(pulmonary tuberculosis)을 뜻하는 것이다. 폐결핵의 정체와 원인을 몰랐을 때에는 환자의 신체가 쇠약해지고 축나는 모습을 보고 소모성질병이라고 불렀으며, 막연히 유전 때문에 생기거나 과로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분류하자면 호흡기계 질병보다는 전신성 질병에 속하는 병이었다.

"tuberculosis(일본인들이 결핵이라고 번역했다)"라는 새로운 병명은 결핵 환자의 병소(病巢)에 나타나는 "tubercle(결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리고 1882년 독일의 세균학자 코흐(Heinrich Hermann Robert Koch·1843~1910)가 결핵의 원인균을 발견하고는 "Mycobacterium tuberculosis"라고 이름 붙였다.

<보고서>에는 비록 소모성질병이라는 구식 병명을 사용했지만, 호흡기계 질병으로 분류한 것으로 보아 대체로 폐결핵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핵이 유럽과 미국에서는 19세기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조선에서는 아직 맹위를 떨치기 전이라 환자가 아주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환자가 많든 적든 뾰족한 치료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19세기 후반 미국의 대표적인 내과 책 <Modern medical therapeutics>(필라델피아의 Brinton 출판사, 1882년)에 나와 있는 폐결핵 치료법. 급성인 경우 적극적인 약물 치료를 하고, 만성 환자에게는 위생과 식이요법을 쓰라고 되어 있다. 급성 환자에게 사용한 약은 주로 염화 암모닐, 황화 퀴닌(키니네) 같은 것이었다. 키니네는 일종의 만병통치약이었다. ⓒ프레시안

▲ 코흐는 결핵에 관한 연구 업적으로 1905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이 사진은 그가 1900년 무렵 제자이자 동료인 기타사토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했을 때 서른두 살 어린 두 번째 부인 헤드비히와 함께 찍은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연구자로서 한계를 느끼며 실의에 빠졌던 코흐에게 삶의 용기를 새로 불어넣어 주고 다시 연구를 하도록 한 사람이 스무 살도 채 안 된 애송이 여배우 헤드비히였다. 이혼한 첫 번째 부인 에미는 코흐의 서른 살 생일 때 현미경을 선물하여 코흐가 세균학자로 입문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프레시안
결핵균은 폐결핵만이 아니라 림프선결핵, 척추결핵, 장결핵 등도 일으킨다. 요컨대, 똑같은 병원체가 감염, 증식하는 부위에 따라 형태와 특성이 조금씩 다른 결핵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각각 연주창(scrofula), 포트 병(Pott's disease), 장간막 위축(tabes mesenterica) 등으로 이름도 달랐고 서로 관련이 없는 질병으로 생각했다. <보고서>(11쪽)에서 전신성 질병으로 분류된 연주창(scrofula)은 대개 림프선결핵이었을 것이다. 결핵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는 말할 것 없고, 개념도 아직 제대로 서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신경계 질병

신경계 질병으로는 간질, 마비 그리고 야간동통, 요통, 신경통, 좌골신경통, 편두통, 치통 등 "동통"과 히스테리, 진전섬망(振顫譫妄), 조증, 우울증, 치매 등 오늘날 "신경정신성 질병"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대별된다. 이들 질병도 역시 증상에 따라 진단을 내렸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비 환자 중에는 중풍 환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쉽게도 보고서에는 다른 대부분의 질병과 마찬가지로 마비 환자의 치료에 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간질 환자는 모두 307명으로 1년 동안 제중원을 찾았던 전체 환자의 3퍼센트 가량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간질이 대발작인지 소발작인지 알 수 없지만, 소발작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때이므로 대부분은 대발작 증상을 나타낸 환자로 추정된다.

그렇다고 이 통계를 근거로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중에 대발작 간질 환자가 그렇게 많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간질은 대체로 시공간에 별로 관계없이 전체 인구의 1퍼센트 내외로 추산되며 그 가운데에서도 대발작 환자는 소수이기 때문이다. 제중원에서는 간질 환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치료했을까? 300명이 넘는 간질 환자가 제중원을 찾은 것을 보면 무엇인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었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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