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엇모리장단을 '태양의 춤곡'이라 부른다. 엇모리장단을 들으면 거나하게 술에 취해 비틀비틀 춤추는 듯한 느낌인데, 영락없이 이글이글 타는 태양이 은하계를 중심으로 비틀거리며 자전과 공전을 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이때의 태양은 디오니소스라 할 수 있다. 니체는 밤을 디오니소스에 비유했지만, 실은 빛 자체가 디오니소스다. 다시 말해서, 빛이라 일컬어지는 이성 자체가 디오니소스적인 도취와 엑스터시를 본성으로 한다는 것이다. (엑스타시의 전문가 샤먼이 고대에는 가장 이성적인 존재였다. 오늘날도 야생의 지대에서는 샤먼이 과학자이자 의사다.)
이성은 현대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인류가 진화해온 만큼이나 서서히 형성돼왔다. 무(無)에서 생겨났는지 원래 있던 맹아에서 자라났는지 모르지만, 이성을 배양한 기름진 토양은 축적의 욕망이다. 이성이 자리 잡을 공간인 내면이나 양심이 아직 호메로스의 인물들에게서는 보이지 않는다. 정신과 육체가 아직 제대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분리가 확실해진 것은 근대적 인물이라 할 수 있는 햄릿에 이르러서다. (<일리아스>,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숲 펴냄, 768~771쪽)
이성의 자랑인 명철성과 합리성은 자나 컴퍼스, 저울로 상징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물질적인 욕망에서 온다. 인류가 떠돌이 생활을 멈추고 정주하게 되면서 성을 쌓아 도시를 만들고 부를 축적하는데, 이것을 '문명'이라 한다면, 문명의 욕망이 인간의 육체 내에서 이성을 자라나게 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에 견주어 디오니소스적 이성이란 육체와 정신이 분화되기 전의 이성, 즉 원시적 이성 또는 민담적 이성이다. 뒤에 이야기하겠지만, 광대 그리스도는 대표적인 디오니소스적 이성이다.
애니미즘 미학을 말하는 데서는 문명의 이성과 원시적 이성을 구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구별은 빛과 어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와 직결돼 있다. 이 점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촛불은 어둠에 감싸여 있다. 이것이 빛의 진정한 모습이다. 원래, 빛과 어둠은 투쟁의 대상이 아니라 상대가 없이는 존립이 불가능한 공존의 대상이다. 낮과 밤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자연을 보면 확연한데도, 문명은 줄곧 이 공존을 부정하는 쪽으로 달려왔다.
'문명'의 빛인 전깃불은 켜자마자 한순간에 어둠을 내쫓는다. 그래서 전기의 빛은 정복자의 빛이다. 현대인의 이성은 전기의 빛과 같아서, 자기 안에서 어둠을 일소하기 위해 엄청난 교육을 받는다. 결과는 참혹하다. 그 때문에 노예를 자초하고 스스로가 무너지고 있다.
원시인에게 그리고 유목민에게 빛은 어둠과 공존했다. 빛은 어둠에서 나왔다. 빛에서 어둠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태양을 맞이하는 때는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 직전이다. 어둠이 태양을 출산하는 장엄한 순간이다. 이렇듯 어둠은 어머니이고 우주의 모성이다.
몽골어나 투르크어 등에 '검다(黑)'에 해당하는 '카라'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신성한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롬이라든가 위구르제국의 수도 카라발가순, 그리고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의 수도 카라호토 따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 쓰인다.
한국에서는 '검다'의 고어인 '고마'에 나타나 있는데, 고마→곰으로 전화해서 곰뿐 아니라 신을 뜻하기도 한다. 금강의 경우 웅진(이때 웅은 '곰' 웅)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 의미는 곰강≒검은 강≒신의 강이다.
ⓒ김용철 |
인류가 정주 생활을 시작하면서 성과 도시를 지킬 왕의 지배 집단이 등장하는데, 이들의 이데올로기로 태양이 이용된다. 고대 천문학의 관점에서 태양은 최고신이다. (이집트의 호루스를 비롯해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페르시아의 미트라, 인도의 크리슈나 등이 모두 태양을 상징한다.) 왕이 태양과 같은 존재가 되는 동시에 태양은 악한 어둠을 물리치는 지고의 선신(善神)이 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종교가 되는데, 이집트의 태양 신학이 그와 같은 종교들의 모델 구실을 한다.
빛이 어둠과 투쟁하는 구도는 원시 시대의 애니미즘과 완벽하게 대립한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태양 신학은 원시인의 신앙인 애니미즘의 우주관을 파괴해 원시 사회의 구성원을 노예로서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다. 여기서 빛은 야욕의 도구로 전락해, 빛의 이름으로 진정한 빛을 완전히 왜곡하고 만다.
이집트의 태양 신학 이후, 자연신관을 벗어난 윤리 종교로서 빛과 어둠을 선과 악으로 가장 확실하게 나누어 교리화한 종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다. 예언자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는 유목을 악으로, 농업을 선으로 선포하여 유목민을 악마의 화신이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인류 역사상 가장 명확한 형태의 정주적(定住的) 윤리가 완성된다.
내 가설이지만, 기독교는 조로아스터교의 토양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1~2세기에 로마제국을 휩쓴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신인 미트라교로, 예수의 출생과 행적뿐 아니라 기독교 의례의 대부분이 미트라교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2세기에 기독교철학자 유스티누스는 "사악한 악령들이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예언자의 말을 듣고 신의 아들이라는 자들을 미리 만들어냈다(미트라 신앙이나 디오니소스 신앙의 신들이 뒤에 성립된 예수의 이야기와 같았기 때문에 : 필자)"고 비난했지만, 이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된 순간, 빛을 야욕의 도구로 사용하는 태양 신학의 계보에서 기독교는 흑백 이데올로기의 정점에 선다. 다신교를 믿은 로마가 제국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흑백 이데올로기의 유일신이 필요했던 것인데, 박해의 대상이었던 원시 기독교의 그리스도는 원래 사랑의 메시아였던 것이다. 그 뒤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날조와 전도가 스콜라철학으로 완성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적인 신학자 하비 콕스는 광대 그리스도를 예수의 진정한 모습으로 그리는데, 디오니소스 축제와 같은 축제 정신의 부활을 통해 기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고 역설한다. 예수를 디오니소스적 신격으로 보는 것은 내가 본 중에 가장 혁명적인 사상이다. 디오니소스적 예수는 간단히 말해서 애니미즘의 예수다. (하비 콕스는 중세 유럽의 '바보 축제'에서 찾는다. <바보제>, 하비 콕스 지음, 김천배 옮김, 현대사상사 펴냄)
빛이 인간의 야욕에서 벗어나 제자리를 찾을 때 빛에 비유되는 이성 역시 어둠과 공존하는 길을 찾을 것이다. '물병자리 시대'(AD 1년~AD 2150년 : 물고기자리 시대, AD2150년 이후 : 물병자리 시대)라는 천체의 변화를 맞아 어둠의 복권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비틀거리며 도는 태양의 진짜 모습이 우리의 산조장단인 엇모리장단에서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산조가 새 시대 애니미즘 미학의 정수로 떠오르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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