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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족에서 '성기 관망파' 예술에 대한 반격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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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족에서 '성기 관망파' 예술에 대한 반격을 보다

[김영종의 '잡설'·4] 성기 관망파의 예술

진리도 선도 상대적이지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만큼은 절대적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태어났다. 요즘처럼 교육을 받아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은 요컨대 문명의 형벌이다.

마치 예쁜 꽃을 꺾어와 꽃꽂이하듯, 현대의 작가는 바깥의 아름다움을 자아로 가져와서 창작이라는 것을 한다. 이 작가에게 자아는 창작의 요람이다. 작가는 꽃이나 밤하늘의 별, 세상의 사건 그리고 주변 이야기 따위 모든 것을 자아 안으로 가져와 자신의 우주를 구축한다. 그런데 이 일을 작가는 인식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무엇 때문에 영원 속을 헤맬 필요가 있을까! 인식한 것은 손아귀에 잡을 수 있는 법"이라고 말한 파우스트처럼 작가는 오직 인식함으로써만 우주를 장악한다. 작가는 자신의 우주 속에서 신처럼 작품을 창조한다.

물론 얼마든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예컨대 낭만주의 시대의 예술이 이성을 적대하면서 감성에 호소한 것이라든지 초현실주의가 자동기술법에 의존해 무의식을 표현하는 따위다. 그러나 이것들 역시 예술가가 바깥의 것에 주파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꽃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내면에서 마치 물을 긷듯 퍼 올린다는 점에서 (예컨대 심상에서 꽃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다.

얼핏 인식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작업 설계(내면에서 물을 퍼올리는 일종의 우물 공사)는 인식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예술은 오히려 고도의 인식 수준을 요구하며, 이를 반증하듯 다른 예술에 견주어 훨씬 높은 인식을 지닌 사람에게 가장 잘 이해된다.

인식의 소산인 근대의 예술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원시 미술의 경우, 비록 현대인의 눈에는 난해할지 모르지만 원시인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아름답게 느꼈음에 틀림없다. 미술 교육 같은 게 없었던 만큼 원시 미술은 인식의 수준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피카소를 비롯한 현대의 예술가들은 문명 시대의 모든 미술품을 뛰어넘어 왜 원시 미술에 열광하는가? 그것이 완전히 생소한 것이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은 마케팅에 길들여진 천박한 소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원시 미술이 생명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교육도 받지 않은 원시 예술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먼저 한마디 해두고 넘어갈 것은 역설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근대 예술이 인식의 산물이라면 원시 미술은 축제의 산물이다. 이때의 축제는 제의적인 축제다. 신에 대한 제의 자체가 축제이기 때문에 축제의 절정에서 참여자들 모두가 접신(接神)하는 황홀경을 경험한다.

제의, 곧 축제에 참여한 원시 예술가는 이 체험을 예술품으로 생산한다. 따라서 참여자들은 재현된 이 예술을 모두 온전히 느낄 수 있으며, 이것(예술품)을 접신의 황홀경으로 이끄는 매체로서 대한다. 이것이야말로 사회 예술이자 초월 예술이다.

그러나 예술가 내면의 우주에서 생산된 근대 예술은 이와는 정반대 결과를 초래하였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인식의 소산인 까닭에 교육받지 않은 자는 감상할 능력이 결여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계급적인 위치를 스스로 드러내도록 강요받는다. 예술이 구별 짓기를 가장 매끄럽고 유력하게 주도하여 하층민의 대다수는 몬드리안이나 존 케이지의 작품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구별 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새물결 펴냄)

현대인은 작가의 능력을 경이롭게 여기며 작품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창조주적 작가관이 대중의 의식을 사로잡은 결과인데, 이것은 현대 예술이 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 근본적으로 기인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해 대항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한계(인식의 예술) 안에 갇혀 있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창조주적 작가관과 관련하여 서구의 근대가 이성으로써 사회를 끌어가기 위해 창조주적 작가라는 역할 모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는 점이다. 사회를 예술품에 견주었을 때 사회는 작가적 창조 정신과 의지를 토대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이는 청사진에 기초해 사회를 건설하는 이른바 건축가적인 정신(창조주적 정신)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창조주적 작가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운동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사업은 창작자가 작품을 만들듯이 진행된다. 공항 건설, 전쟁, 신제품 개발, 시장 확대, 뉴타운 건설 등 어느 하나 예외인 것이 없다. 자세한 것은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설명한다.)

환상에 사로잡힌 예술가들은 자본의 농락인 줄도 모르고 예술혼을 불태우기 위해 인생을 바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시장의 논리 아래 예술가는 스타가 되지 않으면 연명하기조차 힘겨운 C급 신세를 면치 못한다. 기적처럼 스타가 되었다 해도 돈벼락을 맞는 대신 참혹한 대가를 치른다. 비평(학문)이나 언론, 판매 등이 모두 자본이기 때문에 스타 예술가는 제도권(또는 자본주의)을 찬란하게 빛내는 별 이상이 아닌 것이다. 스타 좌파 예술가도 전혀 예외가 아니다.

ⓒ김용철

원시 예술과 비교할 때 근대 예술은 생명이 없는 불모의 표징이다. 그런 만큼 원시 예술은 어마어마한 힘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우리는 원시 예술을 보면서 우리가 상실한 생명을 예감할 수 있다. 찬란한 생명을 보지 않고는 자신의 생명도 느낄 수 없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정말 무언가를 봐야만 한다. 무수히 많은 생명을 주위에서 보지만, 생명의 신비한 비밀을 보지 않고는 무엇을 보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청각·후각 등 다른 모든 감각을 대신해서 쓰는 말이다.)

원시 예술은 생명의 신비한 비밀을 공유하는 길로 우리를 안내한다. 신비(神秘)란 문자 그대로 귀신의 비밀인데, 생명에는 귀신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신비한 것이다. 원시 예술에는 이 귀신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생명감이 넘쳐흐른다. 이 비밀을 드러내려고 하면 할수록 생명력의 원천인 신비함은 사라진다. 근대예술은 이 비밀을 드러내려고 온갖 짓을 다한 결과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모든 사물은 신비하다. 거기에 귀신의 비밀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사물에 들어 있는 귀신은 일신 또는 월신 또는 금성신 또는 그 밖에 무수한 별들 신의 분신이다. 그리고 이 별들 신은 아마도 그들이 태어난 '어머니 별' 신의 분신일 것이다. 원시 축제에서 만물은 우주 공간의 한군데에서 다 만나는데, 그곳이 무한원점인 '어머니 별'일 것으로 상상한다.

나는 여기서 우산 미학을 제안한다. 우산을 보면 우산대 끝에 전체 살이 모여 있고, 대를 펼치면 그 살들이 동시에 위로 올라간다. 원시 축제는 이와 같다. 대는 우주의 축에 해당하는 당산나무다. 축제 속의 원시인은 우산을 펼치듯 함께 들어 올려진다. 펼쳐진 우산이 찢어질듯이 팽팽한 것처럼, 원시 축제의 자장 위로는 파열되기 직전의 극도로 강렬한 전류가 흐른다. 감염된 참여자는 전율하며 우산(당산나무) 끝에서 하나가 되는데, 거기서 또다시 빛줄기를 타고 하늘 저편의 무한원점에 가 닿는다. 이렇게 하나가 된 순간, 예술가는 그를 사로잡은 최대의 경이를 예술로 표현하여 세상에 내놓는다.

우산 미학은 예술가가 자아를 벗어나 타자들과 하나가 되는 무한원점을 향한 여행의 소산이기 때문에, 예술가가 혼자서는 결코 실현할 수 없는 미학이다. 이것이 작가를 창조주로 보는 근대 미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나아가 우산 미학은 모든 사물에 다시 신비가 들어오게끔 비는 시나위 미학이자 일종의 회개의 미학이다. 또 하나 우산 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반성의 미학이 아니라 특별성의 미학이라는 점이다. 각각의 개별에 신비가 숨어 있는 만큼 모든 개별은 특별하다. 이 개별은 무엇과도 교환할 수 없다. 목숨도 돈으로 환산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예술가가 자기도 모르게 모든 사물에 내재한 일반적 단일자(單一者), 즉 본질을 표현하려 애쓴다. 본질은 모든 특별성을 죽이며 더욱이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에 개물(個物)의 특별함을 찬미할 수 없다. 현대 미술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개물의 특별함은 유일무이한 존재성과 값을 따질 수 없는 절대성으로 설명되지만, 더욱 근본적으로는 개물 안에 들어 있는 신의 비밀에서 나온다. 우산 미학은 이 신의 비밀과 만남으로써 신비한 예술품을 생산한다. 예술품은 비밀을 감싸고 있으며, 현대인에게는 상징으로 보이는 비밀이 사실은 원시인들(또는 우산 미학의 참가자들)에게는 전율을 일으키는, 신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 미학에서 말하는 상징은 이것의 잔흔에 불과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렇게 해서 가능하다. 꽃은 성기다. 쉽게 말하면, 근대 이후의 예술은 모두 성기 관망파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지만 감상 이상이 아니다. 더구나 예술가는 감상자보다도 더 못하게 아름다움의 본질을 찾아 사팔눈을 해가지고서 아예 자연 따위는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의 내면은 모든 사물을 관망하여 아름다움을 탈취하고 그것들에서 다시 엑기스를 추출하는 우주적 실험실이다.

영화 <아바타>에서 내 눈길을 가장 사로잡은 것은 자연과 영적으로 교섭하는 장면이었다. 나비족이 자기 머리카락을 말이나 새의 특별한 구멍에 집어넣는 모습은 성기 관망파 예술에 대한 위대한 반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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