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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덮친 '오래된 역병'…그 대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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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덮친 '오래된 역병'…그 대응은?

[근대 의료의 풍경·27] <제중원> 보고서 ③

살바르산 606이 개발되기 전에 매독 치료제로 가장 많이 썼던 것은 수은과 발열 요법이다.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이 매독에 걸려 죽었고, 또 수은으로 치료를 받다 수은 중독 때문에 죽었다. 모차르트도 매독 치료 중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 설이 있으며, 모파상은 1877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자기는 매독 때문에 수은 처방을 받았다고 무용담을 말하듯 썼다.

▲ 슈테판 프랑칼트의 판화 <난처한 비너스>(1500년대). 매독의 여러 단계가 그려져 있는데 아래쪽 가운데 부분은 매독 환자가 수은 훈증 요법을 받는 모습이다. ⓒ프레시안
서양에서는 매독을 비너스와 머큐리(로마 신화의 상업과 교역의 신으로 수은을 뜻하기도 한다)가 쏜 화살에 의해 생기는 병으로 여겼기 때문에 수은을 치료제로 썼는지 모른다. 일종의 이열치열이라 할까? 동서양은 언뜻 생각하기보다 공통점이 많았다. 신토불이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이민 보내는 데에 있어서 가장 어려웠던 점 가운데 한 가지가 민중들이 가진 신토불이 사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제 <보고서>에서 매독에 관련된 부분을 살펴보자.

"우리는 끔찍한 경우를 몇 차례 보았다. 이곳 의사들은 매독을 수은으로 치료하는데, 우리의 의사 동료들은 이 약이 흔히 훈증법으로 투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흥미로워 할 것이다. 우리는 수은의 과다한 사용으로 중독된 환자를 한 차례 보았으며, 수은 치료 때문에 침을 흘리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18쪽)

"병실과 외래에서 많이 본, 점액성 종양이 항문에 생긴 환자들은 감홍(염화수은)을 국소에 발라 치료했으며, 또 내복약으로 매독 치료를 했다." (30쪽)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18쪽. 당시 조선에서 사용하던 매독 치료에 대한 언급이다. ⓒ프레시안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30쪽. 알렌과 헤론이 수은 도포법으로 매독을 치료했다는 기록이다. ⓒ프레시안

매독 치료에 수은을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조선인 (한)의사는 끔찍하게도 "훈증(燻蒸)법"을 사용하고, 자신들은 "도포(塗布)법"으로 좋은 치료 효과를 거두었다는 기록이다. 아쉽게도 이들이 사용한 내복약의 명칭은 나와 있지 않다. 그리고 수은 중독 환자 1명이 6일 동안 입원했는데, 치료 효과는 "없었다(nil)"라고 했다(24쪽).

이번에는 <보고서>에 언급된 두창(일본인들은 근대 서양 의학을 받아들이면서 천연두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인위적으로 접종하는 우두와 구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에 대해 알아보자. <보고서> 8쪽에는 발열 환자 1147명 중 우두 접종에 의한 발열 환자가 31명, 두창에 의한 발진성 발열 환자가 8명 있었다고 했다.

우선 당시에 가장 흔한 질병이 두창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두창 때문에 제중원을 찾은 환자가 의외로 적다. 조선인에게 두창은 치료할 질병이라기보다는 기원(祈願)의 대상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니면 공교롭게도 제중원 첫 1년 동안 두창 발생이 주춤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두 접종의 부작용으로 열이 난 환자 31명 가운데 얼마만큼이 제중원에서 접종 받았던 환자인지 알 수 없지만, 제중원에서 우두 접종을 받은 사람은 모두 19명이라는 기록으로(<보고서> 15쪽) 보아서 상당수는 다른 데서 접종 받고 열이 나서 제중원을 찾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 당시에는 우두(牛痘)보다 인두(人痘) 접종을 받은 사람이 훨씬 많았을 텐데, 인두 접종 부작용으로 제중원을 찾은 환자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전통적인 인두 접종을 받은 사람은 부작용이 생기더라도 서양식 병원은 찾지 않았던 것일까?

<보고서> 16쪽 "외래 환자에 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두창에 관한 더 상세한 언급이 있다.

"두창은 매우 흔했는데, 100명의 아이 가운데 60~70명이 접종을 받을 것이고, 나머지는 자연적으로 두창에 걸릴 것이다. 접종이나 보통의 전염에 의해 이 병에 걸리지 않고 성인까지 자라는 경우는 100명 중에 1명도 되지 않는다."

"널리 쓰이는 (인두) 접종 방법은 두창 환자의 고름을 사용하는 것으로, 흔히 성별에 따라 왼쪽 또는 오른쪽 콧구멍으로 넣는다. 2살 이전에 이 병에 걸린 아이 100명 가운데 20명가량은 죽고, 2~4세 사이에 걸리는 아이는 100명 가운데 40~50명이 죽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곳의 (한)의사들은 조선인 사망의 약 50퍼센트는 두창 때문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 병에 걸린 환자들은 합병증이나 후유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치료를 받지 않는다. 두창에 걸린 꼬마 환자들은 유모 등에 업힌 채 길거리에서 자유롭게 나다니며, 이 병은 별로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 <보고서> 16쪽의 두창과 인두 접종에 대한 언급. ⓒ프레시안

알렌과 헤론이 조선의 사정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이들의 60~70퍼센트가 접종을 받았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접종이 인두 접종만을 가리키는지 우두 접종을 포함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다음 문단을 보면 인두 접종을 뜻하는 것 같다. 보고서의 이 언급이 신뢰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시 인두 접종은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기원전 1160년 무렵)의 미라. 얼굴에 곰보 자국이 있어 두창을 앓았음을 나타낸다. 두창은 적어도 3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또한 두창은 아직까지는 인류의 노력으로 퇴치한 유일한 질병이다. 1980년 세계보건기구(WHO)는 두창이 완전히 근절되었음을 선포했다. ⓒ프레시안
이규경(李圭景·1788~?)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종두변증설(種痘辯證說)'에도 "근세에 종두(인두)하지 않는 자가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보고서의 언급이 상당히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우두가 보급되기 전에도 조선이 두창에 대해 의학적으로 무방비 상태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10세기 무렵 중국 의사는 두창에 걸리면 나중에 다시 그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인위적으로 두창을 가볍게 앓도록 하면 병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마침내 인두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인도 의사도 비슷한 때에 그와 같은 방법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인두, 즉 사람(人)에 생긴 두창(痘)의 딱지를 이용하는 시술이었다. 남자에게는 딱지를 가루 내어 왼쪽 콧구멍으로, 여자에게는 오른쪽 콧구멍으로 불어 넣었다. 이러한 인두법이 조선에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라고 여겨진다.

▲ 몬태규 부인의 초상. 두창을 앓기 전에는 빼어난 용모로 유명했다. 몬태규가 영국에 인두법을 소개할 무렵, 런던 시민의 3분의 1이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프레시안
인두법이 서양에 알려지고 보급된 데에는 터키 주재 영국 대사의 부인인 몬태규(Mary Wortley Montagu·1689~1762)의 역할이 컸다. 터키에서 1717년에 두창에 걸린 몬태규는 그때 태어난 첫딸에게 그곳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인두 시술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인두법의 효과를 확인한 몬태규 부인은 그것을 영국에 소개했다.

영국에서 인두법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다. 잘못된 시술로 효과가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부작용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를 잃는 적이 더 많았다. 두창을 사람에게 접종하는 것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 위험이 따랐다. 숙련되지 못한 사람이 시술하는 경우 약이 아니라 독이 되기도 했다. 또 문화적 편견도 인두법의 보급에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1796년 제너(Edward Jenner·1749~1823)가 사람의 두창이 아닌 소(牛)의 두창(痘)을 이용하는 우두(牛痘)법을 개발한 것이었다. 사실 우두법의 발견은 서양에서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근대 서양 의학의 상징처럼 여기는 우두법이 중국이나 인도, 또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발되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우두법은 해부병리학의 성립, 세균의 발견 등과는 달리 근대 서양 의학의 논리적 귀결이 아닌 것이다. 우두법이든 인두법이든 그 효과를 학문(면역학)적으로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은 1890년쯤 되어서였다.

우두법도 초기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97년 영국왕립학회는 제너가 제시한 우두 접종 효과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제너의 발견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특히 1798년에 결성된 영국우두접종반대협회의 저항이 대단히 거세었다.

▲ 제너가 어린이에게 우두 접종을 하는 청동 조각(1873년 몬테베르데의 작품). 제너가 첫 번째 접종을 자기 아들에게 했다는 얘기는 사실이 아니다. ⓒ프레시안
당시 많은 사람들은 우두 접종이 별로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해로운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의사는 우두를 접종받은 뒤에 얼굴이 소처럼 변한 아이를 보았다고 보고했고, 또 어떤 소녀는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이 걸리는 옴에 걸렸다고 주장하는 의사도 있었다. 그러한 얘기들은 대개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에도 우두에 대한 사람들의 선입견을 강화하는 구실을 했다.

하지만 제너의 시련은 오래 가지 않아서 1802년에는 영국 정부로부터 1만 파운드의 연구비를 지급받아 우두 접종법을 더 발전시킬 수 있었다.

우두가 인두보다 더 효과적이고 부작용이 적은 것은 의학적으로 확실하다.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든 그러한 점만으로 우두가 쉽게 보급되지는 않았다. 영국에서 그랬듯이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서양(문물)에 대한 경계심이 호의적 태도보다 더 강할 때인 1880년대 조선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중국은 조선보다도 그러한 점이 더 뚜렷했는지, 우두법이 이미 1800년대 초에 소개되었지만 널리 보급된 것은 100년이나 지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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