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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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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판다곰의 음식 여행·끝] 연재를 마치며 : 밥상이 인생이다

사람은 먹어야 산다. 우리가 일생 먹는 양을 따지면 얼마나 될까? 밥 한 끼를 대체로 300그램 정도라고 잡으면 여든을 산다고 할 때 대략 26톤 정도의 음식을 먹는다. 물론 아기 때에는 먹는 양이 적고 노인이 되어서도 식사량이 줄지만, 젊은 시절의 폭식과 밥 이외의 먹는 것을 계산하면 그 정도 분량은 족히 먹어치운다. 사람 몸무게를 70킬로그램이라 하면 대체로 자기 몸무게의 400배에 가까운 양을 먹는 것이다.

맛있는 것을 밝히는 이야기를 천하게 여기고 먹는 것에 대한 금기도 많으며 탐식을 경계해서 그렇지, 탐식은 인간의 본능이며 사람만큼 입이 까다로운 동물도 없다. 조금만 입맛이 맞지 않으면 투정을 부리게 되고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익숙지 않은 음식에 쉽사리 고개를 돌린다. 고추장을 싸들고 다니는 여행객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면 사람 입맛의 까다로움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이렇게 까다로운 식성으로 엄청난 양의 식사를 하다가 세상을 뜨는 존재다. 의식주라 하여 삶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 세 가지를 꼽지만 아마도 그 가운데서도 으뜸은 바로 먹을거리일 것이다. 집과 옷은 없어도 산다. 하지만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은 인간만의 특징

다른 동물과 비교해보면 인간이 먹는 음식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한 것 같다. 그리고 불을 피워 익히고 재료를 섞고 요리해서 먹는 것은 인간밖에는 없다. 음식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해주는 가장 큰 문화인 것이다.

미식을 하는 동물은 찾기 어렵고 거의 본능에 의지한 먹이 섭취일 뿐이며, 설사 잡식성이라 할지라도 대상은 무척 제한되어 있다. 평생 몇몇 가지만 먹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본다면 인간이 먹는 음식 재료의 다양함은 더욱 두드러지고, 더군다나 불의 이용과 정제 작업을 포함한 요리 방법으로 보더라도 인간처럼 음식을 다양하게 즐기는 동물은 없을 듯하다.

게다가 프랑스 요리의 병든 거위 간, 중국 요리의 원숭이 뇌 같은 재료처럼 나라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음식 재료가 있는 것을 보면 음식은 인간끼리도 서로 구분해준다고 하겠다.

음식 문화의 다양성만큼이나 음식에 대한 민족적인 금기도 무척 많은데, 회교도인 아랍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인도 사람은 소를 먹지 않는다. 우리나라도 말고기는 금기시해왔으며 여름에는 돼지고기를 찾지 않았다. 유대인은 더욱 가리는 것이 많아서 고기도 피를 죄다 빼고 먹으며 비늘이 없는 생선은 먹지 않는다. 이러니 세계 곳곳에는 유대인을 위한 식당이 있을 정도다.

이러한 음식에 대한 금기는 고기 종류에 가장 많은데, 이것은 아마도 부패에 대한 경각심 때문에 고정관념이나 종교적 계율이 되지 않았나 싶다. 글쓴이도 어렸을 때에 게를 먹고 사탕을 먹으면 안 되다는 낭설을 곧이 믿고, 게를 먹은 다음에는 먹고 싶은 사탕을 참은 적이 있다.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 같지만 아무래도 몸에 해로운 사탕을 못 먹게 하려는 어른들의 노파심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다양성은 재료가 아니라 창의성에서 나온다

그런데 인간 전체가 아니라 한 사람이 먹는 음식이라면 그 가짓수는 실제로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먹는 것을 생각하더라도 그러하다. 밥과 국, 김치, 고기와 생선, 그리고 나물들. 또 입맛을 바꾼다고 쳐도 중식, 일식, 양식의 한정된 메뉴만 있을 뿐이다.

시장에 가보면 이런 현실을 실감할 수 있다. 원재료로 보자면 곡물은 스무 가지를 넘지 않고, 생선도 계절 따라 달라진다 해도 50가지를 넘지 않고, 채소도 100종류를 넘지 않는다. 거기에 고기와 우유, 달걀, 각종 향신료와 기름이 우리가 먹는 것의 거의 전부다.

아마도 개개인이나 가구별로 따지면, 이런 품목들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장에 다녀올 때 장바구니에 담는 것은 대동소이하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풍부하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과 식물의 종수를 따지면 우리가 먹는 것은 지극히 일부분이다. 그것도 대부분은 인간에 의해 사육되고 기른 것들이다.

하지만 먹는 재료의 가짓수가 모든 것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인간의 창의성이 들어가면 무수히 많은 요리가 나오는 것이다. 감자를 예로 들어보자. 삶아 먹고, 튀겨 먹고, 구워 먹는 세 가지 방법 외에 갈아서 전분만을 분리하여 국수로 만들고 전도 부치고 된장찌개에도 넣어 먹는다. 서양에서는 전래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은 감자의 요리 종류만 수백이 될 정도로 다양하다. 결국 음식이란 재료의 다양성이 아니라 조리와 혼합에 의한 창의성이 발전시켜온 것이다.

흘러야 문화다

원시 시대의 수렵 채취 시절만 하더라도 인류는 먹을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구분해야 했으며, 더 나아가 그렇게 모아온 재료를 분류하고 가공하고 혼합하며 불을 이용해 그것들을 요리하는 방법도 개발해야 했다. 그 다음으로, 유용한 작물을 취사선택해 농작물로 만들고 온순한 동물을 가축화하는 농업 목축 시대로 들어간다.

농업 목축 시대에는 사회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어 언어와 문자, 사회, 국가 체계가 차츰 완성되어간다. 이 시기는 경작된 작물과 기른 가축을 위주로 하기에 음식의 주재료가 상당히 단순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안정된 재료의 공급은 저장과 가공 방법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와 음식의 다양성을 더욱 촉진하게 된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식생활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곡식과 채소의 새로운 종자가 전파되면 식생활이 더 다양하게 변모하여 식탁이 풍성해졌다. 중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종자들은 우리 먹을거리를 그만큼 풍부하게 했으며, 문익점의 목화 씨앗처럼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우리 민족으로 보면 험한 시련과 굴욕의 시간이었던 몽골의 침략조차도 식탁에는 많은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교의 영향으로 소략해진 밥상에 다시 고기가 오르기 시작했으며, 두부는 새로운 별미로 등장했다. 증류주는 술꾼들의 취기를 북돋을 만했으며, 새로운 종자들이 들어와 밥상을 풍성하게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가 국가의 주권을 잃고 일본의 전쟁 수행을 위해 군수 물자를 보급해야 하는 아주 치욕스러운 꼴을 당했다. 쌀을 비롯한 곡식들을 강탈당하고 감자와 고구마의 증산에 주력하기도 했다. 우리 고유의 술도 죄다 빼앗기고 가정에서 담그는 술은 밀주로 처벌까지 받았다. 그리고 일본식 음식과 일본식 서양음식이 슬금슬금 밥상을 차지해 지금까지도 많은 잔재를 남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잔재들은 모조리 청산해야 할 것은 아니며 그렇게 청산할 수도 없다. 법률로 '돈가스'를 먹지 않도록 강제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새로운 음식 문화는 우리 식으로 받아들여 다시 만들면 된다. 역사는 곤욕의 시간이었지만 밥상은 전과 다른 모습으로 흘러간다. 문화의 흐름이란 고여서 좋을 게 없다. 새로운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전보다 훨씬 다채로운 문화를 탄생시킬 수도, 그나마 있던 것마저 빼앗길 수도 있다.

삶을 다채롭게 하는 음식의 다양성

해방 이후에는 미국의 문화가 수입되면서 우리 식생활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버터와 우유, 치즈 같은 낙농 제품이 보편화되고, 일본의 영향을 벗어나 진짜 서양식 음식도 상륙했다. 햄버거와 미국식 피자, 프라이드치킨에 이르기까지 미국식 패스트푸드는 이제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콜라와 커피도 가장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미국에 편중되었던 것도 이제는 많이 벗어나, 프랑스 음식점이나 이탈리아 음식점을 찾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으며 벨기에의 와플이나 멕시코의 타코스도 보편적인 음식이 되었다. 보트피플이 전 세계에 퍼뜨린 월남 음식이나 태국 음식도 손쉽게 찾을 수 있다. 인도의 요리사를 불러다 놓은 인도 음식점도 있고, 터키식의 양고기도 먹을 수 있다. 중국 음식도 이제는 산동식 북경요리만 있는 게 아니라 광동요리, 천진의 찐만두 등 여러 가지로 다양해졌다.

한편으로는, 익숙하지 않은 괴로움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사람들은 꾸준히 다른 방도를 찾는다. 이른바 퓨전 음식이 그중 하나다. 중국 음식도 퓨전이 있고, 일본 음식이나 서양 음식도 그렇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요즘 한정식집 대부분이 내오는 한식들도 퓨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퓨전 음식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새로운 맛을 추구하면서 우리 입맛에 맞게 변용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파는 일본 음식도 한국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것이고 중국 음식은 더더욱 그렇다. 엄격하게 이야기하자면 한국에서 파는 다른 나라의 모든 음식은 일정 정도는 다 한국 입맛에 맞춰 퓨전화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우리 음식을 주로 먹는다. 하지만 어쩌다 맛보는 특별한 음식이 싫지만은 않으며 새로운 활력소를 주기도 한다.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일종의 문화적 욕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는 방편이며 우리의 삶을 다채롭게 하기도 하는 것이다.

ⓒ프레시안(손문상)

밥상을 보면 삶이 보인다

음식에 대한 보수성은 놀랄 만큼 견고해서 한번 정착된 방법들은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향신료처럼 특별한 재료를 수용하고 전파한 과정을 보면 이 보수적인 틀 위에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일단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것인 양 당연시하게 된다.

음식의 맛은 급속도로 변하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꾸준히 바뀐다. 음식 맛만 변하는 게 아니다. 한 사람의 입맛도 세월이 감에 따라 꾸준히 변화한다. 어려서는 피자와 햄버거를 좋아하던 젊은이도 나이가 들면 된장찌개나 설렁탕을 좋아할 수 있다. 어려서는 먹지 않던 팥밥이나 콩국수를 나이가 들어서 찾고 즐기게 된다.

또 아직도 외국을 돌아다니는 사람 중 많은 이가 고추장과 김치와 김을 싸들고 다니며 더 나아가 정부나 대중매체에서는 한식 세계화의 기치를 올리기도 하는 반면, 세계 각지의 입맛들이 우리 곁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야말로 입맛에서 보수성과 창의성, 익숙한 것과 낯선 것이 부딪치는 거대한 홍수라 하겠다.

음식 문화에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외래의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우리 음식만 보더라도 수많은 수용과 변용의 역사 속에서 남은 것이 현재의 우리 음식이라는 점을 보면 더더욱 그렇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우리 식생활이 어때야 하는가를 놓고도 많은 논란을 벌어진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연친화적이고 친환경적인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고, 고기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니 적게 먹어야 한다고 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구상에는 아직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고 인구도 늘어가기 때문에 식량 증산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엇이 해롭다 하면 즉각 반응이 나오고 무엇이 좋다 하면 무조건 찾는다. 음식 문화에서 벌어지는, 너무도 급격한 변화 때문에 우리의 의식 자체도 어느 정도는 혼돈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만큼 인간에게 음식처럼 미묘하고 중요한 것은 없다. 음식은 사람에게는 필수불가결한 생존의 조건이다. 생존에 가장 시급한 것이 먹는 것이다. 체내에서 보관할 수 있는 용량은 한계가 금세 드러나니 우리는 먹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 욕구 가운데 가장 강한 것도 이 식욕이다. 유전자의 지고한 명령인 성욕도 식욕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자기 몸을 보존하고 지탱하는 것이 우선인 셈이다. 또 그래야만 그다음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우리 인간에게 이 음식처럼 미묘하고 요긴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식을 앞에 두고 생존 이상의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 관계에도 '밥'이 빠질 수 없고 조상이나 신과의 만남, 고향이나 모국의 추억, 그리움도 '밥'이 매개한다. 그러니 인간 본성의 일면을 이해하고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서도 이 음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밥상을 새로이 톺아보는 일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

밥은 맛있게 드셨습니까?

세상의 모든 밥상은 그것을 먹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세상의 모든 글은 그것을 읽는 사람을 위해 존재합니다. 비록 그것이 자신 혼자만을 위한 글이라 할지라도.

판다곰이 차린 밥상이 맛이 없으셨더라도 여태껏 드셔주셔서 고맙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것이 취미인 이 사람은 만드는 과정도 좋지만 만든 것을 먹어주는 사람이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비난이든 질책이든 격려든 성원이든 보내주신 여러 독자께 이제 작별을 고합니다, 재주 없는 사람이지만 다음에 여러분과 다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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