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어릴 적을 생각하면, 깡통을 들고 음식을 구걸하러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리 못산다 할지라도 굶으며 살지는 않는다고 한다. 라면을 먹거나 부실한 재료의 음식을 먹을지언정 그래도 먹고는 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먹는 것에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 좋은 음식으로 호의호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엇으로 배를 채울까부터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생활 수준 향상에 따른 유기농 열풍
금세기에 들어서 그나마 이렇게 먹고살 수 있게 된 것은 농업 발전의 덕을 톡톡히 보는 셈이며 그동안 우리 경제가 발전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식량이 남아돈다고는 하지만 아프리카를 비롯해 최소의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는 극빈국도 많고 굶주림으로 영양 실조에 걸린 어린이들도 많다. 식량 배분의 불균형 문제가 여전히 심각해서, 무엇이 맛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과 무엇으로 배를 채울까를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 여전히 커다란 괴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경제 발전으로 이만큼 먹고살게 된 것도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지만, 배를 채우는 걱정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다른 고민이 생겼다. 보통 '웰빙'이라고 일컫는 '잘 먹고 잘 사는 법'이 우리 관심사가 된 것이다.
가령, 같은 김치를 먹더라도 배추와 고추, 파나 마늘과 같은 재료들은 유기농으로 재배한 것을 쓰고 젓갈도 좋은 품질의 것을 써서 더 좋은 재료로 더 맛있는 것을 먹자는 것이다. 쌀도 화학 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은 것을 먹고, 고기나 우유를 먹더라도 항생제나 다른 약물의 오염이 없이 유기농 사료로 키운 건강한 젖과 고기를 먹어야 좋다는 것이다.
생활수준의 향상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기에 이런 '웰빙'의 열풍은 식을 줄 모른다. 유기농 인증을 받은 채소는 비싼 값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별도로 전시·판매되고 있으며, 쌀을 비롯한 주곡에서 과자와 빵과 유유에 이르기까지 유기농의 비중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거리에는 유기농 식재료를 따로 파는 유기농 전문점이나 생활협동조합 같은 매장도 늘고만 있다. 그 누구도 화학 비료와 농약을 뒤집어쓴 식품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는 화학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것이 이 땅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생명운동과도 연결되어 활발한 사회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인구 증가를 뒷받침한 새로운 농업
여기서 대규모의 개간이나 화학 비료, 농약이 우리 생활을 바꾸었던 과거를 잠깐 톺아볼 필요가 있다.
아직 일부 국가만이 산업혁명에 성공하고 그 여세로 제국주의적인 확장을 꾀하던 1900년에는 세계 인구가 대략 15억 명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1925년 20억 명, 1960년 30억 명으로 60년 동안 두 배의 인구 증가를 기록했으며, 그 뒤로도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과 인구 증가는 지속되어 2009년에는 세계 인구를 약 68억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100년 동안 네 배의 인구 증가를 기록한 것이다.
이렇게 인구가 많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식량을 생산해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식량 증산은 신대륙 같은 새로운 농지의 개간은 물론, 관개 시설·화학 비료·농업 기계화·농약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농업의 등장 때문에 가능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없었더라면 지구가 이렇게 많은 인구를 지탱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인구 증가와 새로운 농업은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쳐,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거치면서도 남북한의 인구는 해방 당시의 2000만 명에서 지금의 7000만 명으로 세 배 이상 늘었다.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기아선상에서, 비록 남한만이기는 하지만 '웰빙'을 이야기할 정도로 음식 재료가 풍부해지기까지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그 이면에는 1960년대부터 꾸준히 진행해온 화학 비료의 증산, 농약의 사용, 관개 시설의 정비, 기계화, 간척 사업처럼, '웰빙'이나 '친환경'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노력이 뒷받침되어 있다.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이 문제였던 것이 이제는 쌀의 소비 부진을 걱정하는 세태에 이르렀고 끊임없는 농업 지원에도 농촌에서는 젊은 사람을 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음식 재료의 부족을 걱정하지는 않는다.
식량을 무기화한 시대
물론 식량의 자급률 자체가 높은 것은 아니지만 경제 발전의 결과로 많은 식량과 다양한 음식 재료를 수입할 수 있다. 수입 사료로 고기와 우유를 얻거나 과일과 가공식품의 완제품까지 수입하기에 식생활은 더없이 풍족해 보이기만 하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적당히 질 좋은 재료들을 수입하면서 남아도는 땅 위에는 유기농으로 기른 좋은 식재료를 생산해내니, 끊임없이 '웰빙'을 실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나라 인구가 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세계 인구는 당분간 지속적으로 늘 것이다. 지구상에는 이제 개간할 수 있는 땅이 그다지 많지 않다. 더군다나 환경 변화로 기후가 변화하고 온난화로 사막이 확대되면서 농업에 부적합한 농지가 늘어가는 추세다. 그런 측면에서 세계의 곡물 값이 요동칠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한다. 석유 자원의 고갈에 따라 옥수수와 사탕수수에서 알코올을 뽑아 연료로 쓰려는 시도가 더해지면서 식량은 커다란 자원 무기로 변모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산업화를 지향하고 공산품을 만들어 팔아 그 돈으로 식량을 수입하는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은 세계 곡물 시장을 좌우하는 몬샌토, 카길, 퓨리나 같은 거대 상업 자본의 내부 전략에 따라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더군다나 식량의 문제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이기에 그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유기농도 알고 먹자
관점을 안으로 돌려 유기농에 관해 생각해 보자. 화학 비료와 농약의 사용이 땅을 오염시켜 환경을 파괴하고 생태계를 교란하며 지속 가능한 생산을 저해한다는 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유기농은 문제가 전혀 없을까?
일단 주말 농장이라도 해보며 채소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문제를 어렴풋하게라도 인식할 수 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채소를 기르면 처음에는 싹이 나고 제대로 자라다가도 결국에는 작물이 벌레의 먹이가 되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남아나지 않는다. 오이 같은 것도 처음 몇 개를 따고 나면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시들해지고 만다. 가을에 배추를 심어보면 더욱 심각하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면 배추벌레가 거의 전부를 먹어치울 것이다.
이런 병충해와 맞서기에는 인력 소모가 너무나 심하다. 텃밭에 심은 배추 몇 포기도 배추벌레를 손으로 잡는다면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이런 식으로 벌레를 잡으며 농사를 짓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일 것이다. 물론 해충의 천적을 이용하기도 하고 여러 종류의 작물을 섞어 심어 병충해를 어느 정도 예방하거나 천연물질로 부분적인 방제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하더라도 유기농 생산의 비효율성을 피하기는 어렵다.
소출은 작고 품삯이 많이 든다면 당연히 생산원가는 지극히 높을 수밖에 없고, 그래서는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재료가 되지 못한다. 또 천연물질이라 해서 독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니 적절히 관리해주어야 한다.
또 한 가지 유기농의 단점은 사람에게 해로운 대장균 O-157이나 살모넬라와 같은 병원체와 각종 기생충의 오염을 근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의 맥도널드는 햄버거에 들어가는 토마토를 유기농으로 바꿨다가, 식중독을 일으키는 병원성 대장균 때문에 햄버거에서 아예 토마토를 빼버리기까지 했다. 여러 사람에게 해로운 균과 대장균을 관리하기 어렵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기생충도 재현될 소지가 분명히 있다. 퇴비에 쓰이는 동물들의 분뇨를 철저히 소독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변형 식품의 딜레마
유기농 생산의 비효율성이 심각하기에 대규모 곡물 회사에서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유전자 변형 식품, 곧 GMO다. 콩과 감자, 옥수수처럼 대량으로 재배되는 작물의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바꿔서 해충에 강하고 소출이 많은 변형 품종으로 만든 것인데, 현재 약 50여 종이 개발되었다.
이 GMO를 놓고, 농약 사용의 억제나 식량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는 쪽과, 인간에 의한 강제 진화는 생태계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으며 식품의 안정성도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견해로 나뉘어 찬반 양론이 격렬하다.
이 문제에 대한 반응은 유럽과 미국이 전혀 다르다. 영국을 위시한 유럽은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추세다. 하지만 미국은 이들 곡물 회사가 미국 회사이니만큼 대체로 GMO를 수용하는 편이고, 다만 소비자의 권익을 위해 그 원료가 GMO인지 아닌지를 표시하는 정도로 규제하고 있다. 또 과학자는 식품으로서의 위해성에는 문제가 없기에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다. 하지만 이들 종까지 먹어치울 수 있는 슈퍼 곤충의 출현 등 생태계 교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현재 GMO 식품에 대한 선택은 개인이 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GMO 식품의 범람은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 국내의 어느 식품 회사가 GMO 작물을 원료로 쓰지 않겠다고 공표한 일도 있지만 벌써 우리 주변에는 보이지 않게 수많은 GMO 식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콩기름은 GMO 콩에서 추출했고, 많은 가공식품의 원료에도 GMO 재료가 들어가 있다. 채소조차 GMO 종자를 심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생산한 농민조차 모른 채로.
또 우리가 즐겨 찾는 고기는 어떠한가? 소나 돼지, 닭이 먹는 사료 대부분은 이 GMO 종자로 생산된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유럽 나라보다 훨씬 식량 자급도가 떨어지기에 많은 양의 사료를 수입해야 하며, 그중 많은 부분은 GMO의 종주국인 미국이 아니면 몬샌토 같은 거대 곡물 회사의 영향권에 있는 곳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GMO 곡물의 수입을 완전히 금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기도 어렵겠지만 축산 농가는 가축 기르기를 포기하고 식료품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 그러니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GMO에 대한 반대보다는 최소한 가공 식품의 원료로 GMO 제품을 썼는지 쓰지 않았는지를 정확히 표기하도록 법제화하는 일이다. 그 유해성을 떠나서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조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
입맛의 다양성과 개성을 없애는 가공 식품
GMO와 함께, 아니 그보다 훨씬 먼저 우리 식생활을 좌우해온 것은 가공 식품의 범람이다. 1960년대 라면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우리 생활 속으로 침투해온 가공식품들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해졌다. 이제는 요리에 취미가 없는 사람이 혼자 생활하더라도 웬만큼은 이 가공 식품에 의지해 살아갈 수 있을 정도다. 또한 대단한 미식가여서 매일 제대로 된 음식을 찾아 먹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가공식품의 영역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흔히 가공 식품은 우리 건강에 좋지 않다고 말한다. 재료 유래의 불확실성, 보존을 위한 여러 첨가물의 위해성 문제에다, 소비자의 눈길과 입맛을 끌기 위해 여러 착색제와 설탕, 소금, 그리고 MSG를 과다하게 사용한다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공 식품 자체가 우리의 본성인 입맛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가공 식품의 입맛에 길드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여러 다양한 측면처럼, 자연계의 변화처럼 지역과 개인은 그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입맛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왔는데, 가공 식품에 길들면 그런 다양성과 개성조차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마치 미국의 코카콜라가 미국인의 입맛을 지배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가공 식품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세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프레시안(손문상) |
지역에서 나는 것을 그 지역에서 소비하자
어쨌거나 지금 이 세상에서 음식과 음식 재료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좋은 재료로 만든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서로 상충하는 측면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제로 한정시켜 보아도 뚜렷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먹는 것 가운데 우리가 생산하는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농촌의 인력이 부족하고 농업에 대한 보조금조차 무역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명목으로 무역 협정에서 제외되는 현실에서는 질 좋은 음식 재료를 많이 생산할 수 없다.
우리 농산물의 생산량이 적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우리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수입된 음식 재료는 신선하지도 않거니와 그 유래를 검증하는 게 불가능하다. 우리가 환경과 기후의 변화에 대응하고 음식 재료의 질을 스스로 통제하려면 식량의 자급률을 높여야만 한다. 그래서 새로운 운동 '로컬 푸드(local food·지역 먹을거리)'가 제시되고 있다.
음식은 신선한 재료가 생명이다. 고기와 생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채소나 다른 재료들도 그렇다. 신선함의 맛이란 시장에서 사 먹는 것과 텃밭에서 갓 따온 풋고추의 맛만 비교해도 금세 알 수 있다. 가까운 곳의 것을 먹는다면 신선함 말고도 다른 이익이 있다. 운송비가 적게 들고 운송 도중에 식품의 변질을 막기 위한 여러 장치가 생략되니, 첨가물의 공포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지역에서 나는 것을 신선한 상태로 지역에서 소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형태다.
안전한 밥상을 위하여
물론 몇 가지 난점도 있다. 특히 지금은 특화된 작물로 상업적 기업농으로 변해가고 있는데 이는 농업의 생산성을 높이고 전문지식의 축적에 도움을 준다. 이런 상황에서 농촌을 로컬 푸드로 재편하기도 어렵거니와, 전문성이나 생산성, 생산단가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대도시 집중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높은 편이고 그나마 수도권 집중 현상은 특히 심하다. 이런 편중화는 지역권을 하나로 묶는 데에도 크나큰 장애가 된다. 게다가 대도시는 아파트 위주의 구조라서 쿠바의 도시농업처럼 가구나 집단 단위의 텃밭을 가꾸기도 어렵다.
하지만 식품 재료의 질을 높이고 바람직한 먹을거리를 확보하며 앞으로의 식량 전쟁에 대비하려면 지금부터라도 머리를 짜내야 한다. 지금 일고 있는 생활협동조합 운동도 그 한 방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보다는 훨씬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형태가 되어야 한다.
그 밖의 해결 방안으로는, 실업의 해소와 공공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지금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 기업을 통해 대안을 모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대기업이 만드는 사회적 기업이란 사실 사탕발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역의 공공성에 이바지하는 사회적 기업이나 다양한 형태의 생활협동조합이 연계하여 직업적인 농업 교육을 부활시키고 '로컬 푸드'를 위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구축해야 한다.
더는 우리 입으로 무엇을 먹는지 모르거나 모든 식품을 의심의 눈으로 보지 않도록, 식량 무기의 총알이 우리 삶을 위협하지 않도록 서둘러 그 시스템을 만드는 일만이 우리의 음식문화를 참된 풍요로움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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