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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거대한 사냥감'…한국은 먹을 게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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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거대한 사냥감'…한국은 먹을 게 없어!

[망국 100년·38] 러일전쟁을 향해

1900년 무렵 세계 제1의 강국은 단연 영국이었다. 19세기 유럽 성장의 중심축인 기계 공업 위주 산업화를 18세기 말 앞장서 시작함으로써 획득한 우위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을 계기로 확고하게 굳어져 19세기를 '대영제국 영광의 세기'로 만들었다.

영국의 생산력에 대한 심각한 경쟁은 1870년대 이후 독일제국에 의해 비로소 제기되었다. 19세기의 산업화는 석탄과 철광의 분포에 따라 벨기에 지역을 거쳐 독일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1871년 독일제국의 성립으로 산업의 힘이 국가의 힘과 결합할 계기를 맞은 것이었다. 독일은 산업화의 후발국이었지만 후발국의 이점을 활용하는 입장에서 영국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빠른 속도로 추격해 갔다.

20세기로 접어들면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한 양극화가 뚜렷해지게 되지만, 1890년대까지는 영국에 대한 도전자로서 독일의 위치가 아직 그렇게까지 확연하지 않았다. 영국의 오랜 라이벌 프랑스, 그리고 신흥 강국 러시아가 독일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후진국이면서 큰 덩치를 가진 러시아가 1890년대까지 영국에게 몹시 신경이 쓰이는 상대였다. 크리미아전쟁(1853~56) 때 산업화에 형편없이 뒤진 나라이면서도 만만찮은 저력을 보인 러시아였다. 서유럽 국가들이 바다를 통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러시아는 독점적으로 시베리아를 경영하고 이슬람권의 배후로 진출할 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제국주의 경쟁의 가장 큰 표적인 중국에 배후로부터 접근하고 있었다.

중국은 16세기 초 유럽인이 인도양에 진출할 때부터 세계 최대의 보물 창고였다. 중국과의 교역은 유럽 상인들에게 최고의 사업이었다. 아편전쟁(1839~42)은 침략이 아니라 이 사업을 늘리는 데, 즉 개항 그 자체에 목적을 둔 것이었다.

제2차 중영전쟁(1856~60)의 목적은 그보다 적극적인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유럽의 산업화가 많이 진행되어 있고, 플랜테이션 등 식민지에서 산업 원료를 확보하는 방법도 발달해 있었다. 이제 중국에서도 사치성 상품의 반출에 그치지 않고 근대 산업의 원료 획득과 상품 판매를 위한 종속적 위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유럽인이 추구하는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는 19세기를 지내는 동안 변화를 겪었지만,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가치는 줄어들지 않았다. 유럽에서 먼 위치 때문에, 그리고 중국의 강력하고 안정된 정치 조직 때문에 그 가치를 바로 활용할 수 없었지만, 유럽의 산업화가 진행되어 나갈수록 중국의 투자 가치는 더욱더 자라나고 있었다.

제2차 중영전쟁 때까지 중국 진출에 앞장선 것은 해상 활동력을 가진 나라들이었다. 포르투갈이 16세기 초 이 해역에 진출한 이래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 해상 세력들이 중국 교역에 앞장서 왔다. 그런데 1858년 러시아가 청나라와 아이훈 조약을 맺으면서 경쟁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당시까지 북대서양에서 중국 해안까지 항해하는 데는 반년이 걸렸다.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도 3개월이 걸렸다. 시베리아 횡단 육로는 해로보다 유리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러시아가 1891년 착공한 시베리아철도가 만주를 가로지르는 동청철도와 연결되어 1903년 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여객 운송을 시작했을 때 운행 시간이 열흘 안쪽이었다.

러시아는 1913년까지 시베리아철도에 15억 루브르를 투입했다. 당시까지 어느 유럽 국가도 하나의 사업에 이렇게 큰 투자를 한 일이 없었다. 유럽의 내륙국이던 러시아를 동아시아 진출의 선봉으로 만드는 사업이었다. 유럽과 극동 사이에 물자와 병력을 보름 내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은 다른 열강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전략적 이점이었다.

중국에 관심을 가진 다른 유럽 열강, 특히 영국은 거대한 전략적 가치를 가진 시베리아철도 부설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도 극동 지역에서 러시아 세력의 성장에 대한 영국의 경계심을 보여준 일이다.

시베리아철도 건설이 절반쯤 진행됐을 때 러시아에 유리한 상황이 중국에서 전개되었다. 청일전쟁의 타결에 독일, 프랑스와 함께 개입한 삼국간섭(1895)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러시아는 이듬해 동청철도 부설권을 청나라에게 얻어냈다. 만주를 가로질러 치타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청철도는 러시아 국경 내로 연결되는 본선보다 거리를 크게 단축시켜줄 뿐 아니라 중국 중심부로의 진입로도 마련해 주는 쾌거였다.

1898년 여순을 조차하면서는 하얼빈에서 여순에 이르는 동청철도 지선을 깔아 중국 중심부로 향한 길이 완성되었다. 이 지선은 러일전쟁 후 일본에게 넘어가 남만주철도라는 이름으로 만주철도(滿鐵) 사업의 출발점이 된다.

▲ 러시아는 유럽의 동쪽 끝, 미국은 유럽의 서쪽 끝에 있는 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는 동쪽으로, 미국은 서쪽으로 대륙을 개척해 각자 태평양에 이르렀다. 19세기에 서부 개척을 시작한 미국보다 17세기에 시베리아를 가로지른 러시아가 훨씬 앞선 출발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미국이 '태평양 세력'으로 일어선 반면 러시아는 일본에게 가로막힌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가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보다 30년 앞섰다는 사실이 이 차이를 가져온 중대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프레시안

영국은 청일전쟁 전까지 열강의 중국에 대한 침략을 억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다른 열강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한 방어적 전략이었다. 영국인 로버트 하트가 1863년부터 청나라 총세무사를 맡아(하트는 1907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청나라 재정을 관리해 줬고, 청나라와 열강 사이의 분쟁에도 영국이 앞장서 조정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청일전쟁 후로는 일본에게 손길을 돌렸다. 청나라의 자위 능력이 한계에 이른 것으로 보았고, 만만치 않은 상대로 자라난 독일, 지정학적 이점을 가진 러시아가 오랜 숙적 프랑스와 힘을 합쳐 밀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일본과 손잡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청일전쟁 개전 직전인 1894년 7월 영국이 일본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해 준 것이 일본과 새로운 관계의 출발점이었다.

이 단계에서 영국 금융자본의 역할에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이때는 산업자본주의가 금융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시점이었고, 영국의 우위가 산업 분야보다 금융 분야에서 더 확고한 상황이었다. 영국의 금융자본 중에는 몇 세대 사이에 대륙에서 건너온 유대인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유대인을 박해하는 러시아에 적대감을 품고 일본을 적극 도왔다고 하는 설명이 나온다.

전체적 흐름을 결정할 만큼 큰 요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부분적 요인으로라도 작용했을 개연성은 있다. 실제로 러일전쟁 때 일본이 로스차일드가로부터 많은 전비를 융자받았기 때문에 일본이 큰 배상금을 얻지 못한 채로 전쟁이 종결되자 "재주는 일본이 넘고 돈은 로스차일드가 벌었다"는 취지의 풍자가 떠돌았다고 한다.

이 시기 러시아 정책의 한 중요한 측면을 대표한 사람이 세르게이 비테(1849~1915)였다. 비테는 1889~91년 철도청장을 지내면서 시베리아철도 건설 계획을 세우고, 1891년부터 1903년까지 교통장관과 재무장관 등의 위치에서 철도 건설과 산업화를 지휘했다. 일본과의 전쟁을 불사하는 호전적 극동 정책에 반대하다가 실각했으나 러일전쟁 전황이 불리하자 강화회담 대표로 다시 기용되었고 수상에 임명되었다. 포츠머스 회담에서 최대한 러시아에 유리한 협상을 이끌었고, 수상으로서 제국의회(Duma) 설치와 입헌정치 시행 등 중요한 개혁의 방향을 세웠다.

경력 자체에 드러나는 것처럼 비테는 러시아 근대화의 지도자였다. 그는 일본과의 대립을 최대한 피하려 했다. 일본을 영국 편으로 몰아붙이지 않으면서 경제적 수단을 통한 만주 진출을 꾀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이래 고종이 매달리는 것을 니콜라이 2세가 뿌리치지 못한 것은 욕심 때문이었고, 차르의 의중에 영합하는 소위 궁정파가 러시아를 일본과의 전쟁으로 몰고 갔다. 니콜라이 2세는 러일전쟁이 끝난 뒤에야 또 도움을 청하는 고종에게 국내 사정이 힘들어 도와줄 여력이 없다는 거절 편지를 처음으로 보냈다.

일본은 1889년 2월 헌법 발포를 전후해 국민 개병제 실시, 지방 제도 개편 등으로 근대국가를 궤도에 올렸다. 이후 몇 년 동안 경제 불황과 정치 혼란 속에서도 군비 증강을 꾸준히 계속한 결과 청일전쟁으로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메이지 헌법에서 군을 천황 직속으로 하여 정부로부터 독립시켜 놓은 점이 후에 군국주의로의 흐름을 막지 못한 구조적 문제로 지적되는데, 헌정 출범 당시에 청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해야 했던 상황으로는 군부의 독립이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일본에게 대박이었다. 3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게워냈지만 대만을 획득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립했다. 배상금 2억3000만 량은(그중 3000만 량은 요동반도 포기의 보상) 당시 청나라 공식 세입의 3배였고 일본 국가 세입의 4배였다. 산업 발전과 군비 증강을 여러 해 동안 나란히 추진할 재원이 마련된 것이었다.

현실적 이득 못지않게 중요한 소득이 국격 향상이었다. 함포외교 앞에서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이 메이지 유신 이래 국가적 과제였는데, 이제 열강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면서 조약 개정의 길이 활짝 열렸다. 이로써 일본은 열강의 침략 대상의 위치를 벗어나 열강의 협력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1900년 의화단 사건 때는 북경에 진주하는 연합 8개국의 대열에 2만여 병력으로 당당히 참여했다. 이 대규모 병력 동원으로 일본은 중국 쟁탈전에서 자기네 유리한 입장을 서양 열강들에게 과시했다. 이 때 러시아는 10만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는데, 일본은 러시아군과 대비되는 엄정한 군기를 지킴으로써 열강의 신뢰를 얻는 데 힘썼다. 당시의 일본은 신뢰를 잃어 가는 청나라를 대신해 "동아시아의 헌병"으로 열강의 인정을 받고자 했다.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의 촉구에 응해 1902년 봄에 만주로부터 철군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초 비테가 실각한 후 철군을 중단하고 오히려 여순의 요새화 등 더 적극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견제에 뜻을 같이 하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영일동맹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되어 온 것인데, 이삼성은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한길사 펴냄) 2권에서 여기에 미국까지 넣어 "영-미-일 제국주의 카르텔"을 이야기한다. 영국처럼 드러난 입장은 아니라도 미국이 음양으로 일본에 도움을 준 사실을 부각시킨 것은 좋은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은 유럽의 변경에서 출발해 대륙을 개척해 나간 끝에 태평양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대칭되는 위치에 있던 나라였다. 러시아가 17세기 말에 이미 태평양에 도달한 데 비해 미국의 출발이 크게 늦었지만 19세기 말에는 '태평양 국가'로서의 위상에서 미국이 앞서 있었다.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횡단 철도가 1869년 개통된 것이 결정적 차이를 가져왔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미국은 하와이를 편입하고 필리핀과 괌을 경영할 만큼 활발한 해군력을 태평양에 펼치고 있었다.

당시의 미국에게 필리핀과 괌은 그 자체로 큰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미국의 시선도 그 끝은 중국에 꽂혀 있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 영국이 인도에, 러시아가 연해주에 중국을 향한 전진 기지를 두고 있던 것처럼 미국도 태평양 건너편에 전진 기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 전진 기지를 확보하는 데도 현지인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미국은 중국 진출에 독자 노선을 추구하기보다 자신에게 유리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유능한 파트너를 만난다면 자기네가 주니어 파트너 역할을 맡을 용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열강은 중국이라는 미증유의 거대한 사냥감을 놓고 어떤 접근 방법이 적당할지 모색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적 태도로 동맹과 연합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3국간섭에 프랑스와 독일이 참여했지만 동맹 수준의 확고한 공조가 아니었다. 서로서로 견제하며 일시적 균형을 이루고 있던 상황이 의화단 사건에 이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로 깨졌다. 러시아는 여러 나라의 질시 대상이 되고 몇 나라가 일본을 그 대항마로 선택했다.

고종의 대한제국은 을미사변으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했던 방식으로 상황을 계속 풀어나가기 바랐다.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개입을 피하려 하는 열강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 나라 저 나라에 이권을 퍼주기 바빴다. 특혜를 가지고 측근들의 충성을 확보하려 한 고종의 행태가 그대로 확대 복사된 정책이었다.

그러나 열강들에게 한국은 중국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의 한낱 주변 요소일 뿐이었다. 반면 일본은 적으로 삼느냐 편으로 삼느냐에 따라 득실이 크게 갈리는 중요한 상대가 되었다. 일본의 미움을 사면서까지 매달릴 만한 큰 이권을 한국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일본을 적대할 만큼 적극적 태도를 보인 것이 러시아에서 비테를 실각시킨 베조브라조프 등 궁정파 세력이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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