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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곽지균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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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그네 곽지균을 추모하며

[오동진의 영화갤러리] 곽지균의 자살이 던지는 의미

감독 곽지균은 한 시대 청춘의 표상이었다. 1986년 그가 만든 데뷔작 <겨울 나그네>는 그 시대 청춘들의 감성을 대변한 영화였다. 당시 청춘들은 그에게 열광했으며 그 역시 청춘들에게 끊임없는 구애와 찬사를 보냈다. 청춘들의 아픔과 고뇌, 방황의 언어를 곽지균 자신만큼은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인물로 비춰지기를 원했다. 1990년 <젊은 날의 초상>에서 2000년 아예 제목을 <청춘>이라고 붙인 영화까지, 그리고 가장 최근작인 2006년의 <사랑하니까, 괜찮아>까지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가 지고지순한 청춘 멜로임을 드러내고 다녔다.

하지만 아뿔사, 곽지균 감독은 그 과정에서 청춘의 덫에 걸린 것으로 보인다. 청춘 멜로는 젊은 층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야 되는 바, 자신에게서 점점 더 이탈돼 가는 어린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곽지균은 심한 좌절에 휩싸인 것으로 보인다. 시대는 변했고, 관객들은 더 이상 순진하지 않으며, 자신은 너무 늙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홀로 연탄불을 피우며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 쯤에서 이제 자신이 더 이상 이승의 영화판에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잘못된 판단이었다.

▲ <겨울나그네>

돌이켜 보면 <겨울 나그네>가 상영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데는 이 영화가 찬란한 태양과 같은 청춘을 노래해서가 아니라 그 햇빛 뒤에 숨겨져 있는 젊은이들의 시대적 좌절을 같이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1986년은 군사독재 정권이 차기 체제로 넘어 가면서(전두환→노태우 정권) 다소 유화적인 제스처를 쓰던 때였다. 하지만 여전히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으며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니힐리즘이 확산돼 있던 때였다. 어딘 가로의 도피처가 필요했었다. 멍청하게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죽을 만큼, 죽어도 좋을 만큼 사랑하는 이야기를 원했었다. <겨울 나그네>는 바로 그런 젊은이들의 마음을 파고든 작품이었다.

시대가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겨울 나그네>를 보는 것은 여전히 스산한 느낌이다. 패션과 헤어 스타일, 화장술, 어법 등의 차이 때문에 옛날 영화를 볼 때면 늘 기이하고 황당하며 다소 코믹한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하지만 <겨울 나그네>는 그렇지가 않다. 현재성이 더 강하다. 그건 이 영화가 청춘의 겉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속을 얘기했기 때문이며 시대를 관통하는 청춘들의 고뇌를 얘기했기 때문이다.

어두운 성격의 의대생 민우(강석우)를 사랑했던 다혜(이미숙)는 자신이 기지촌 여성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고민하고 자학하는 민우를 기다리다 지쳐 현실주의자의 그의 선배 현태(안성기)와 결혼한다. 이 영화의 화자는 결국 다혜인 셈인데, 당시 젊은이들이나 지금 젊은이들이나 다혜처럼 이상과 현실에서 늘 줄다리기를 하며 결국엔 변화보다 안정을 찾지만 변화의 욕구를 항상 간직하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민우-다혜-현태로 이어지는 관계, 거기에 더해지는 기지촌 여성(이혜영)의 사랑까지 영화가 얘기하는 삼각-사각의 러브 스토리는 결코 멜로 라인에 멈춰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삼각과 사각의 불안정한 좌표를 찍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청춘들의 고달픈 정치사회학이 이 영화에 내포돼 있었다. <겨울 나그네>를 보면서 당시 관객들이 그렇게나 눈물을 흘렸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었다.

몸은 장년이 돼갔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었던 곽지균 감독은 청춘들처럼 영화판에서 열심히 뛰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한다는 청춘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찍고 싶은 영화는 많은데 찍을 수 없는 현실이 못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때문에 곽지균 감독은 자살한 것이 아니다.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타살한 것이다. 많은 영화인들은 지금, 곽지균이 그랬던 것처럼 경각에 놓여 있다. 그의 죽음이 단순한 슬픔을 넘어,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때문이다. 그의 죽음이 일종의 경고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 역시 그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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