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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성병 환자는 어떻게 치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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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의 성병 환자는 어떻게 치료했을까?

[근대 의료의 풍경·26] <제중원> 보고서 ②

남아메리카 페루(잉카)의 원주민이 오래 전부터 말라리아와 같은 열병 치료에 사용하던 기나 나무껍질이 유럽에 도입된 것은 1630년대였다. 그리고 200년쯤 뒤인 1820년에 프랑스의 약사 펠레티에(Pierre Joshep Pelletier)와 카방투(Joshep Bienaime Caventou)가 기나 나무껍질을 분리, 정제해서 키니네(중국인들은 음을 따서 "金鷄蠟"이라고 적었다)를 만들어내었다. 키니네는 말하자면 아메리카 전통 의료와 유럽 근대 과학의 합작품인 셈이다.

프랑스에 이어 곧 독일, 영국에서도 키니네의 대량 생산에 들어갔고, 19세기 말에는 미국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약의 성격이 채집, 재배되는 식물(약초)에서 공산품으로 변화하는 시초였다. 그리고 새로운 약품을 생산한 나라들은 새로운 시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 기나 나무(Cinchona pubescens·金鷄蠟樹). 페루의 국목(國木)이다. 키니네의 화학 구조식(오른쪽). ⓒ프레시안

그러면 금계랍(金鷄蠟)이 조선에 들어온 시기는 언제쯤일까? 황현(黃玹·1855~1910)이 쓴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하루걸러 앓는 학질은 속칭 '당학(唐瘧)'이라는 병인데, 우리나라 사람이 이 병을 아주 두려워했다. 노쇠한 사람은 열에 네다섯은 사망했으며 젊고 기력이 좋은 사람도 몇 년을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 금계랍이란 약이 서양에서 들어온 뒤로는 사람들이 그것을 한 돈쭝만 복용해도 즉효가 있었다. 이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불려졌다. 우장(牛漿·우두 원료)이 나오자 어린아이가 잘 자라고, 금계랍이 들어오자 노인들이 명대로 살게 되었네."

이어서 황현은 "이 해부터 서양의 습속을 따라서 석탄, 석유, 성냥을 쓰게 되었다"라고 한 다음, 석유에 대해 "우리나라는 경진년(1880년) 이후 처음 사용했는데 처음에는 색이 붉고 냄새가 무척 지독했으며 한 홉이면 열흘 밤을 켤 수 있었다"라고 기록했다.

이것을 보면 금계랍이 처음 전래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이미 1880년 무렵부터는 조선에서 널리 쓰이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호를 개방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벌써 조선은 서양산 약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중원을 찾은 열병 환자가 많은 것으로 보아 제중원도 금계랍을 보급하는 데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 1898년 10월 12일자 <독립신문>(왼쪽). 세창양행과 제중원의 금계랍 광고가 나란히 실려 있다. 세창양행은 독일제, 제중원은 미국제를 수입해서 팔았다. 당시 금계랍은 황금(金)알을 낳는 닭(鷄)이었다. 제중원 광고 기사 위의 태극 문양이 인상적이다. 일제시대의 금계랍 포장지(오른쪽). 금계랍은 일제시대에도 여전히 가장 많이 쓰인 약 가운데 하나였다. ⓒ프레시안

금계랍은 1890년대와 1900년대 대표적인 히트 수입 상품이었다. <독립신문>에는 1896년 11월 7일부터 1899년 12월 4일 폐간 때까지 금계랍 광고가 600회 이상 실렸다. 전체 광고 건수 4693개의 15퍼센트나 되었으니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 1899년 8월 9일자 <황성신문>. 당시 제중원에서는 미국산 금계랍 외에 회충약과 고급 벽지(盤子紙)도 팔았다. 제중원의 광고는 1899년 8월부터 10월, 1901년 8월부터 10월 사이에 거의 매일 게재되었다. 태극 문양의 위 아래가 <독립신문>과는 반대이다. ⓒ프레시안
금계랍 광고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독일인 마이어(Eduard Meyer)가 경영하는 세창양행(世昌洋行) 광고였고, 간혹 제중원에서 내는 광고도 실렸다. 제중원의 금계랍 광고는 <황성신문>에 게재한 경우가 더 많아 100회가 조금 넘었다.

이번에는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말라리아 다음으로 많다고 언급된 매독과 비뇨 생식계 질병을 살펴보자. 이 계통의 환자 1902명 가운데 매독 환자가 760명이었고, 매독 골막염 96명, 매독성 항문 고무종 89명, 매독성 궤양 60명, 매독과 나병 병발 52명, 매독성 여각진 44명, 안면 매독 결절 21명, 매독성 인후궤양 18명 등 매독의 후유증으로 제중원을 찾은 환자는 380명이었다(매독 공포증 7명은 제외).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에는 매독 후유증을 200례 이상 치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독과 그 후유증을 합치면 1140명으로(이것으로 보면 말라리아 환자보다 더 많다) 전체 환자 1만460명 중 10.9퍼센트를 차지했다. 그리고 연성하감 235명, 임질 156명, 경성하감 146명, 만성임균성요도염 51명으로 매독 이외의 성병환자는 모두 588명으로 전체 환자의 6퍼센트였다.

매독은 1494년 이탈리아와 프랑스 군대 사이의 전투 과정에서 돌연히 발생하여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구대륙" 각처로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그 전에는 매독을 구대륙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1494년 유럽의 한 복판에서 새로운 병(한 동안 매독은 "새로운 병", "프랑스 병", "이탈리아 병" 등으로 불렸다)이 생겨난 것일까?

▲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의사인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1478-1553). 유명한 의학시(醫學詩) <프랑스 병에 걸린 시필리스(Syphilis sive morbus gallicus)>(1530년)를 지었다. 시필리스(매독)라는 병명은 여기에서 유래되었으며, 이 시에는 매독이 성적 접촉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적혀 있다. ⓒ프레시안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아직도 대립하고 있다. 한 가지는 아메리카로부터의 전래설로, 1492년 콜럼부스 원정대가 자신들이 "발견"한 카리브 제도(서인도제도)에서 유럽으로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원래 유럽에 미미하게 있었던 매독이 이 무렵 여러 사회적·자연적 조건의 변화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기원이야 어떻든 유럽에서 출발한 매독은 1498년 인도, 1500년 무렵에는 벌써 중국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에는 1512년부터 매독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며, 조선에도 1515년쯤에는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교통 수단을 생각하면 매우 빠른 전파였다.

그리고 어느 나라든 일단 매독이 발을 들이면 무서운 속도로 번져나갔다.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에는 대유행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렇다고 전혀 유행이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매독은 성 풍속과 관련이 있으므로 성에 대해 엄격했던 조선에서는 전파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독에 대한 뾰족한 예방과 치료 방법이 없었고, 위생 상태와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았던 시절에 매독 환자가 병리생태적 균형에 이를 때까지 점차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다른 성병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제중원의 성병 환자가 전체 환자의 16퍼센트나 차지하므로 매우 많게 보이지만 그것을 부정할 근거도 별로 없다. 당시 매독과 임질 등에 대한 진단이 혈청 검사나 세균 검사를 통한 것이 아니므로 오진의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1905년 독일의 동물학자 샤우딘(Fritz Schaudinn·1871~1906)과 피부과 의사 호프만(Erich Hoffmann·1868~1959)이 매독균을 발견하고, 다음 해에 독일의 세균학자 바서만(August von Wassermann·1866~1925)이 매독의 혈청 검사법(바서만 법)을 개발하기 전에는 의사의 임상적 판단이 진단의 유일한 기준이었다. 임질 등 다른 성병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성병들 사이의 감별 진단이 까다로울 수는 있지만, 성병과 그밖의 다른 질병들을 분간하는 것은 대체로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매독 환자 11퍼센트, 그 밖의 성병 환자 6퍼센트라고 보고된 것은 상당히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수치가 전체 인구의 성병 감염률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렌과 헤론은 "외래 환자에 대한 기록"에서 자신들의 매독 치료 효과가 매우 좋아서 제중원을 찾는 매독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종창이나 고름이 생긴 환자에 대한 외과적 절개 등으로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했겠지만 근대 서양 의학도 전통 의술과 마찬가지로 매독이나 그밖의 성병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606"은 1910년에 세상에 선을 보였고, 다른 세균성 성병들에 대한 치료는 항생제가 개발된 1940년대에나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밖에 1932년부터 만들어진 설파제가 어느 정도 치료 효과를 거두었을 뿐이다.

▲ 최초의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606"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독일의 면역학자 에를리히(Paul Ehrlich·1854~1915)와 일본의 세균학자 하타 사하치로(秦佐八郞·1873~1938). 엄밀히 말해 이 약을 개발하는 데에는 하타의 공이 더 컸다고 평가된다. 이들의 업적은 매독 치료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화학요법의 길을 연 것이었다. 에를리히는 이미 1908년에 면역 반응의 이론으로 곁가지설(側鎖說·side chain theory)을 제창하는 등 면역학에 관한 업적으로 메치니코프(Ilya Ilich Mechnikov)와 함께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매독 특효약인 살바르산 계통 화합물의 구조식(오른쪽). 이제 약초에서 유효 성분을 추출, 정제하여 약을 생산하는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험실에서 연역적으로 신약을 합성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은 자본과 기술이 축적된 회사와 나라에서만 가능했으므로, 약의 세계적 독점 시대가 개막된 것이기도 하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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