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 선생이 쓴 한국문단계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의 한 대목이다. '난쏘공'은 철거민 '난장이' 가족을 통해 '거인들'에 의해 주도되는 산업화의 부작용과 그에 대한 항거를 이야기한다. '난쏘공'이 세상에 나온 지 30여 년이 지났지만, 거인에 의한 난장이 축출작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2009년 1월 20일에 있었던 '용산참사'는 그 상징적인 참극이었다.
'야구라'(☞ 바로가기)는 탐욕이라는 이름의 2009년 판 바벨탑 '용산참사'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은 故 양회성 씨의 아들인 양종민 씨를 만났다. 한때 프로야구 선수를 꿈꾼 양종민 씨는 현재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일식 조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야구 선수로서, 또한 사회적 약자로서 겪었던 그의 삶은 비상구 없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여실히 증언한다.
▲고대 바벨탑이 하늘에 닿고 싶은 인간의 교만이 부른 비극이라면, 현대의 바벨탑은 자본과 탐욕이 만든 참극이다. 자본과 물질만을 추구하는 한 제2, 제3의 용산참사는 필연이다. ⓒ프레시안 |
처음에는 전철연이 뭐 하는 데인지도 몰랐어요. 왜 아버지가 거기에 나가시는지도 몰랐고. 그냥 '뭔가를 하시는구나!'라고만 생각했죠. 그러다가 하루는 갑자기 아버지가 멀리 외국에 가신다는 거예요. 그 다음 날 아버지가 저랑 형을 불러서 같이 술 한잔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목소리를 가늘게 떨면서) 형이 피곤하다면서 "오늘은 술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불같이 화를 내시는 거예요. "아버지랑 술 한잔도 못 하느냐!"라면서.
평소에는 화를 잘 안 내시는 분이 그러니까 이상한 느낌도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술자리에서 아버지가 "외국에 나가 있는 게 한달이 될지 일년이 될지 몇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엄마를 잘 보살펴 드리고, 만약에 할머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도 잘 치러 드려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시더라고요. 사실 그땐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속으로 화도 좀 났어요. 매일 힘들다는 부모님의 혼잣말을 듣는 것도 저한테는 엄청난 스트레스였거든요. 야구를 한다고 부모님 속만 썩였으니까요.
나만의 찬란한 그라운드
야구는 많이 늦게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거의 끝날 가을 때쯤. 갓난아기 때부터 아버지 손잡고 야구장을 많이 가서 그런지, 정말 야구가 하고 싶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많이 졸랐어요. 야구를 하고 싶다고.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못하다가, 하루는 리틀야구를 하는 친구를 따라갔는데 감독님이 "너도 공 한 번 던져봐라!"라고 했어요. 공 던지는 모습을 보더니 야구를 하라고 권유하시더라고요. 어머니한테 전화하시더니 갑자기 저한테 유니폼을 입히고서는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시작한 거죠.
좋아하는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했죠. 야구를 하는 게 마냥 즐거웠어요. 중학교에 가서도 묵묵하게 열심히만 했어요. 그러다가 정식 경기에 처음 출전한 게 중학교 2학년 때예요. 그것도 대통령배 서울시 예선대회. 선발로 나갔는데 제가 놀랄 정도로 잘 던졌어요. 그 대회에서 3경기 등판해서 4이닝 동안 한 점도 안 줬어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오니까 야구가 더 재미있어졌죠. 근데 3학년에 올라가면서 꼬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중학교 3학년 때는 거의 경기를 못 나갔어요. (말꼬리를 흐리면서) 특별히 부상은 없었는데…. 후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지만, 야구부 감독님이 야구부 총무를 맡아달라고 부탁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근데 어머니는 야구부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아들 뒷바라지만 열심히 하며 회비만 꼬박꼬박 내면 될 거로 생각해서 거절하셨어요. 그때부터 경기에 못 나가다가 딱 1경기에 등판했어요. 쌀쌀하고 비가 날리는 날이었어요. 그런 날에 잘못 던지면 투수는 부상을 당하기 쉽잖아요. 그래서 주전 투수 대신에 마운드에 올랐는데, 운 좋게도 잘 던져서 승리투수가 됐어요. 그러고 또 경기에 못 나갔어요.
▲양종민 씨는 무작정 좋아서 야구를 시작했지만, 야구가 준 것은 고통이었다. 야구계 역시 사회와 마찬가지로 재능보다는 돈이, 노력보다는 배경이 중요한 세계였다. ⓒ야구라 손윤 |
서울고에 진학해서도 2학년 초반까지는 괜찮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 저를 경기에 뛰게 해준 투수 코치님이 코치로 계셨거든요. 근데 감독님이 문제가 있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면서 코치진이 다 바뀌었어요. 그러면서 연습경기에는 간간히 나갔는데, 정식 경기는 거의 못 뛰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연습하고서는 택시비가 부족해서 걸어간 적도 허다했을 정도로.
그땐 속상하고 마음대로 안 돼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허공을 바라보면서) 경희대학교랑 연습경기를 했는데, 감독님이 무슨 생각인지 저를 선발로 올리더라고요. 마운드에 올라서 보니까 그동안 벤치에만 앉아있던 선수들이 다 나온 거예요. 평소 주전으로 뛰던 선수들은 벤치에서 쉬고. 그때 제가 4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어요. 근데 갑자기 저를 비롯한 선수들을 주전으로 다 바꾸는 거예요. 무슨 일인가 했더니 경희대 감독님이 야구장에 오신 거예요. 벤치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막 나왔어요. 그러다가 한서고로 전학을 갔어요.
근데 전학을 가게 된 것도 제가 원한 게 아니라 감독님의 반강요로 간 거예요. 그땐 야구를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상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곳에서 마음껏 던져보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한서고에서 출발은 굉장히 좋았어요. 감독님으로부터도 인정을 받았고. 겨울에 훈련을 매우 열심히 하고 경기 경험도 많이 쌓았는데, 그다음 해에 경기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하루는 어깨가 찢어질 듯이 아팠어요. 도저히 못 참아서 병원에 갔더니 어깨에 뼛조각이 돌아다니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도 당시 동의대 김민호 감독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상황이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야구계의 유전무죄 무전유죄
김 감독님은 "대학에서 1, 2년 재활하고 3, 4학년 때 경기를 뛰면 되니까 원래대로 오라"고 하셨지만, 고등학교 감독님이 부모님을 찾아와서 유급하라는 거예요. 내년에 뛸 선수가 마땅치 않다면서. 저나 부모님이나 유급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계속 거절했지만, 마음이 흔들렸던 게 저랑 같이 유급을 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랑 그 부모님으로부터 매일 전화가 왔어요. "유급을 하고 함께 좋은 데로 가자!"라고. 그래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유급을 하기로 하고 어깨 수술을 받았어요.
근데 수술을 하고 나서 재활을 해야 하는데, 감독님이 제대로 안 시키는 거예요. 저는 돈이 좀 들더라도 전문 트레이너한테 제대로 재활을 받고 싶었어요. 운동하는 선수는 몸이 재산이잖아요. 근데 감독님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중요한 대회는 거의 초반에 몰려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어렸을 때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검은 고무줄을 이용해서 재활훈련이라고 시키는 거예요. 오로지 그거 하나로만. 정말 답답했죠. 이렇게 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거 같아서 제가 전문 트레이너가 있는 스포츠센터에 찾아갔어요.
스포츠센터에서 한 달 정도 재활을 하고 오니까 새 투수 코치님이 오셨더라고요. 자기가 키운 투수 한 명을 데리고. (쓴웃음을 지으면서) 근데 그분한테는 그 선수밖에 안 보이잖아요. 정말 그 친구는 하루가 멀다고 팔꿈치가 아프다면서 훈련도 빠지고 했는데, 경기는 혼자 다 나갔어요. 다른 이들은 죽으라고 해도 경기에 나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고. 많이 억울했죠. 그러다가 봉황대기 8강전에 선발로 나갔어요. TV로도 중계됐는데. 그날 몸 상태는 나쁘지가 않았어요.
▲최근 서울의 한 고등학교는 몇 해 전 비리로 징계를 받은 이를 정식 코치로 임명했다. 또한, 프로야구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야유와 조롱이 응원이라는 이름으로 더그아웃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학원 스포츠의 근간은 교육의 일환이 아니라 성적이라는 결과만 중요시하는 성적지상주의이기 때문이다(사진은 특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이 없음). ⓒ야구라 손윤 |
첫 타자를 삼진으로 잡고 두 번째 타자는 볼넷으로 걸어 내보냈지만, 3번 타자를 유격수 병살타성 타구로 유도했어요. 1회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유격수 앞으로 가는 평범한 땅볼인데, 그걸 이른바 알을 까는 거예요. 이닝이 끝날 상황이 1사 1, 3루가 된 거죠. 4번 타자도 유격수 땅볼로 유도하면서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유격수가 또 실책을 범했어요. 어린 마음에 경험도 많지 않다 보니까 힘이 쫙 빠지더라고요. 다른 선수도 실책을 범하면서 그 1회에만 4점을 줬어요. 그게 저의 마지막 공식 경기였어요.
김민호 감독님이 그때도 동의대에 오라고 다시 제의를 하셨는데, (한숨을 내쉬며) 저는 그 다음 해에 동의대가 아닌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었어요. 동의대에는 저랑 같이 유급한 친구가 들어가고. 친구를 위해서 양보한 게 아니라 원천봉쇄를 당했어요. 김 감독님은 저희 부모님을 만나려고 했는데, 고등학교 감독님이 연락처를 안 가르쳐주고 막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지방의 2년제 대학에서 연락이 왔는데, 거기는 정말 가기 싫었어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야구를 하기 싫은 친구들이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서 가는 곳이었거든요. 그래서는 대학에 가는 의미가 없잖아요.
야구가 정말 좋지만 환경이 그러지 못하니까 답답했죠. 그러면서 야구에 대한 마음을 접었어요. 돌이켜보면, 그때 야구를 그만뒀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어요. 머리는 그만둔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아직 미련이 남았던 거죠. 한 번도 마운드 위에서 마음껏 던져보지 못했으니까요. 하루는 예전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를 하신 분이 연락을 주셨어요. "나랑 함께 다시 도전해보자!"라고.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았어요.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근데 부모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못한 거죠. 아들이 한다고 하니까 묵묵히 지켜보신 겁니다.
비상구가 보이지 않는 사회
그래서 가게 된 게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예요. 전반적인 야구 실력은 우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야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은 참 좋잖아요. 파트너가 없으니까 야구장 근처 공원 화장실에 스트라이크 존을 그려서 연습했어요. 매일 2, 3백 개씩 던졌어요. 그런 어느 날 고등학교 감독님이 저한테 와서 명함을 주시는 거예요. 그땐 정말 영어도 거의 모를 때였는데, 눈치코치로 '세미프로팀에 테스트를 받으라'는 의미인 걸 알았어요. 그래서 거기에 갔는데, 그 팀 감독님이 저를 딱 보더니 무시를 하더라고요.
키도 작고 그러니까. 실실 웃으면서 마운드에 올라가서 한 번 던져보라고 하더라고요. 세미 프로라고는 해도 우리로 치면 사회인야구 수준이고, 또 연습을 많이 하면서 페이스를 끌어올린 터라 제 공을 포수가 못 잡는 거예요. 감독님이 깜짝 놀라더라고요. '저 조그마한 애가 저런 빠른 볼을 던진다.'라고. (살짝 웃으면서) 그 다음 날부터 그 팀 에이스가 된 거죠. 근데 1년 36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연습을 했는데, 준비하는 기간이 기약 없이 길어지면서 지치더라고요.
하루는 어머니와 통화하며 "언제까지 이렇게 연습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심신이 지쳐서 그만두고 싶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때 아버지가 IMF로 전전긍긍하다가 기존 가게를 정리하고 월세가 싼 곳에서 샤브샤브 가게를 하셨거든요. 어머니랑 통화를 할 때 고기를 썰고 있었는데, 야구를 그만둔다는 소리에 깜짝 놀라셔서 그만 기계에 손가락이 끼신 거예요. 거의 절단될 뻔했다고 하더라고요. (눈시울을 붉히며) 그걸 어머니는 저한테 얘기를 안 했어요. 그 사실을 뒤늦게 알고 시드니 시내 한복판에서 주저앉은 채 막 울었어요. 그 사람이 많은 곳에서.
▲부동산 투기와 선거 등으로 뉴타운을 비롯한 재개발·재건축 사업이라는 일대 광풍이 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원 거주민의 재입주율이 15%도 되지 않는 것을 보면 누구를 위한 사업인지 의문이다. ⓒ프레시안 |
제가 군대문제가 해결 안 된 상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간 거라 비자 연기가 안 되더라고요. 근데 거기에도 이민 온 야구인들이 많거든요. 오문현 씨 아시죠? (프로야구 원년 팀인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1982년 데뷔. 빙그레 이글스에서 은퇴) 그분이 "우리가 알아서 해줄 테니까. 여기 있어라"고 하셨는데, 저는 한국에서 해야 야구로 승부를 봐야 하기 때문에 돌아온 거죠. 군대 문제가 있어서 일단 2년제 대학에 들어가서 계속 야구를 하려고 했어요. 가기로 한 데도 있었고. 그해 제가 몇 번이나 병무청에 문의했는데, 매번 올해는 영장이 안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심하고 훈련에 전념하는데, 어느 날 영장이 나왔더라고요. 황당했죠. 연기를 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게 제 야구 인생의 마지막이었던 거죠.
군대에 가서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지만,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거 같아요. 전역하고 나서는 정말 뭘 해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오로지 야구만 했으니까요. 일본만 해도 야구 선수도 수업을 다 받아야 하고, 게다가 일정한 성적이 안 되면 팀이 전국대회에 출전해도 경기에 못 나가잖아요. 근데 우리는 야구에 '올인'하기 때문에, 안 됐을 때 다른 길이 거의 없어요.
초등학교 코치도 한 달 정도 했는데, 가르치는 것은 재밌고 즐거웠어요. 근데 시쳇말로 치맛바람이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초등학교도. 제 경험도 떠오르고 해서 싫어서 그만뒀어요. 그러고 시작한 게 일식 조리사예요. 처음 1년은 정말 하기 싫었어요. 그런데도 시작한 거는 부모님한테 너무 미안해서예요. 제가 내성적인 성격이라서 그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남들처럼 부모님에게 효도도 하고 싶고 해서 야구를 하는 것처럼 일을 열심히 했어요. 정말로.
용산이라는 이름의 바벨탑
아침에 출근하는데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아버님이랑 같이 있느냐?"라고. 아무 생각 없이 "아버지는 잠깐 멀리 가셨다"라고 했어요. 근데 친구가 "TV를 보는데 용산 쪽에 불이 크게 났다. 너희 가게 쪽인 것 같다"라면서 "빨리 연락을 해보라"라고 채근하더라고요. "우리 아버지는 거기 안 계시니까 걱정하지 마라."라고 말하고서는 전화를 끊었어요. (눈가를 촉촉이 적시며) 지금 생각해보면, 아닐 거로 믿고 싶었던 거죠. 그때부터 불안한 거예요.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점심이 끝날 때까지 진짜 멍하게 있었어요. 어머니와는 연락도 안 되고.
오후에 어머니랑 통화가 됐는데, 그냥 우시는 거예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으라.'라고 말씀하시고는 계속 우시더라고요. 그때야 용산에 갔어요. 가니까 완전 난장판이더라고요. 머릿속이 백지가 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어요. 그런 상태로 집에 가니까 어머니는 반실신 상태였어요. 그때까지도 뭐가 뭔지 몰랐어요. 그냥 아버지가 실종되신 거로 생각했어요. 아니, 그렇게 믿었어요. 그러다가 용산경찰서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서는 정말 분노가 일었어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믿기지가 않아요. 어느 유가족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저나 가족들 모두 안정이 안 돼요.
얼마 전에 할머님이 돌아가셨어요. 한 3년을 치매로 앓으셨기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모르고 눈을 감으셨어요. 어딘가 멀리 가신 줄로만 아시고. 할머님 장례로 온 가족이 다 모였어요. 그때 저희 숙부님들이 어머니한테 우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빚으로 가게를 차린 거라서 많이 힘들었거든요. 아버지가 할머님 이름으로 시골에 사둔 집이랑 땅이 있었어요. 아버지가 "빚 때문에 힘드니까 그걸 팔아야겠다."라고 했는데, 숙부님들이 반대하셨어요. 그러고는 그렇게 되셨으니까 숙부님들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좋은 내일'을 꿈꾼다. 그러나 그 꿈이 현실을 만나면 '악몽'이 된다. 우리 사회의 중심에 인간이 아닌 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하루는 시청 쪽에서 걸어오다가 사고현장을 보려고 하는데 경찰이 쫙 깔려서는 막고 있더라고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마음 놓고 못 보느냐!"라고 실랑이를 하는데, 그냥 서 있는 사람을 막 때리는 거예요. 제 앞에서. 정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때리는 경찰을 밀치는데, 뒤에서 누가 발로 차더라고요. 날아차기에 맞아 넘어지면서 무릎을 심하게 찧었어요. 그러고 또 발에 눈을 차였는데, 조금만 밑에 맞았다면 실명할 수도 있었데요. 눈이 정말 탱탱 부었어요.
무릎은 괜찮은 거 같아서 그냥 뒀는데, 하루는 욱신거리면서 심하게 떨리는 거예요. MRI를 찍었더니 안에 연골이 찢어졌어요. 수술하고 다 낫는데 6개월 정도 걸렸어요.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없는 사람이 항상 당하고, 없는 사람이 항상 쫓겨요. (헛기침을 하면서) 많이 가진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정말 착한 일이지만, 없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하면 참 열심히 산다고 하잖아요. 또 조금만 법도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역시 없는 사람이구나!'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 법도를 어겨도 있어서라고 넘어가잖아요.
저도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뉴스도 거의 보지를 않았어요.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저희랑 처지가 비슷한 친한 형이 한 명 있어요. 그 형 집이 양재동 비닐하우스촌이에요. 올해 초에 그 형한테 전화가 와서 얘기하더라고요. '우리 동네도 조만간 치러 온다고 하는 데 걱정'이라면서. (잠긴 목소리로) 그런 일이 제 옆에서 또 일어나니까 '없는 사람은 어쩔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방에 가다가 보면 공사를 대단히 많이 하잖아요. 좀 과장되게 말하면, 서울에서 여수까지 공사 안 하는 데가 없는 것 같아요. 공터나 자연 그대로 있는 데가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제가 봐도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경쟁이라는 말이 어떤 면에서는 참 좋은 것 같지만,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 물어뜯고 죽이는 것을 달리 표현한 것처럼 느껴져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경쟁이 빚은 결과라고 생각해요. 용산이라는 두 단어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거예요. 그 앞을 지나가도 기억이 날 거고, 우리 가족 누구나 평생 용산을 짊어지고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죽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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