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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더? 바로 그들의 말을 의심하라"

[김영종의 '잡설'·2]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 ②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 ②

마르셀 모스는 <증여론>에서 원시 사회뿐 아니라 문명 사회에서도 예전에는 물건이 모두 선물의 의미를 가졌음을 밝혔다.

레스(res : 물건을 뜻하는 라틴어-필자)가 원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에 불과한 무기물(無機物), 즉 오늘날과 같이 된 거래의 단순한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 말에 대한 가장 훌륭한 어원 연구는 그 말을 증여, 선물,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의 라(rah)·라티흐(ratih)와 비교하는 것인 듯하다. 레스는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한길사, 204~205쪽)

과연 독자 여러분은 과거와 현재의 개념 중 어느 것이 마음에 드는지? 인류는 수백만 년 동안 선물로서의 일상을 살아왔다. 그리고 사람과 물건을 구별하지 않았다. 물건을 효용과 이익의 개념으로만 본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물건에는 생명이 숨 쉬고 있다. 옛사람들은 '살아 있는' 물건을 가족으로 대했다. 그래서 교환이라는 경제행위를 하더라도 선물의 증여라는 형태를 취했다.

이처럼 생명감 넘치던 인류의 일상이 삶의 상승과 고양을 상실함으로써 어떻게 상품의 일상으로 주저앉아버렸는지 아래의 예는 잘 보여준다.

"정령이 깃든 나무가 있다. 원시인들의 영혼은 나무를 통해 하늘로 올라 다녔다. 문명이 발달하여 나무의 역할을 사다리가 대신하게 되었다. 천국에 오르는 계단이라는 것은 나무의 대역인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상승할 수 있었다.

계단을 둥글게 말면 톱니바퀴가 된다. 기계는 톱니바퀴가 두 개 이상 맞물려 도는 메커니즘이다. 이 기계가 아날로그 세계를 이룬다. <모던타임스>에서 찰리 채플린은 톱니바퀴 안에 들어가 아무리 뛰어도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아무리 뛰어도 절대로 상승할 수 없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도시를 상상할 수 없듯이 현대인은 톱니로 돌아가는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 오르락내리락할 뿐이다.

톱니바퀴를 0과 1로 철저히 단순화시킨 것이 디지털이다. 인류는 톱니바퀴와 디지털에서 편리한 상품을 제공받는 대가로 하늘로 오르는 우주목도 천국에 오르는 계단도 잃어버렸다. 현대인의 일상은 러닝머신 위에서 열심히 달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문명의 형벌이 아닐 수 없다." (오래전에 본, 문명 비판을 다룬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희미하게나마 기억을 살려보았다-필자)


세상이 망조가 들어서, 어린이 책 작가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선물을 고대하는 동심에다 대고 엄마랑 상점에서 산 예쁜 옷이 정령이 아니라 상품이라고 교육하고 있다. 아이의 예쁜 옷은 누가 더 많은 돈을 줘도, 또는 잃어버려도, 또는 도둑맞아도 끝까지 아이의 옷이다. 그 옷은 아이를 예쁘게 해주는 정령이고 가족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그나마 동심에 비견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도 동심 이상으로 현실의 도전을 받고 있다. 사랑은 아주 특별한 선물인데, 이 특별함은 사람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찾아온다. 사랑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이 아름답게 감자를 그린다. 밀레처럼. 사랑은 상품이 되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저항한다. 상품이 되면 감자보다 석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상의 모든 것에 효용과 이익이 아니라 선물과 사랑의 태도를 취한 사람들은 세계에서 도태되었다. 미개인으로, 열등 민족으로, 사회 부적응자로, 실패자로, 혁명가로. 그러나 간디와 같은 위인들은 이런 사람들 속에서만 나온다.

ⓒ김용철

인류가 추구하는 삶은 결국 어떤 의식과 감정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로 귀착된다. 이것은 거대 담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요컨대 어떤 사회인가를 떠나서는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가 줄기차게 있어왔고, 거대 담론이 위력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의 혁명 또는 개혁은 선물로서의 일상을 파괴하는 데 충실했다. 이것이 대중이 거대 담론을 기피하는 진정한 이유다.

거대 담론은 비판받아야 한다. 좌건 우건 간에 어떠한 거대 담론이든 자본주의가 관철시키는 일반화(밀레가 비판한 '일반적인 눈'. 일반화는 본질주의에서 나온다)를 견고히 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2부에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물로서의 일상과 궤를 같이하는 거대 담론은 무엇일까? 특별한 어떤 체계를 만들어내자는 게 아니다. 기존의 거대 담론을 파괴하고 전복해야만 '선물로서의 일상'이 동토를 뚫고 새싹처럼 나올 것이다. 지금 오피니언 리더들이 멋모르고 쓰고 있는 '일상의 담론'은 거대 담론의 줄기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가지나 잎사귀에 불과하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학계에서, 문단에서, 화단에서, 평단에서, 신문에서, 방송에서, 인터넷에서, 이러저러한 장에서 거대 담론을 폄훼하고 일상을 찬양하면서 거대 담론과 위상이 다르지 않은 일상을 거의 발악하다시피 전파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완전히 몽매한 소치다.

일상의 담론을 올바르게 제기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일상'의 구체성을 통해 거대 담론의 문제를 폭로하고 있다. 16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어느 방앗간 주인의 수난을 다룬 <치즈와 구더기>(카를로 긴즈부르그, 김정하·유제분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같은 역사서가 대표적이다. 방앗간 주인은 15년에 걸쳐 세 번 고발당하고 두 번의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가 결국 교황청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그 방앗간 주인의 일상과 항변을 통해 16세기 유럽 사회를 지배한 거대 담론의 허구성과 유해성을 생생히 들여다볼 수 있다.

자본주의는 '거대 담론의 위세'와 '일상의 초라함'도 좋아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거대 담론의 퇴조'와 '일상의 각광'도 즐긴다. 장사꾼에 불과한 오피니언 리더들이 떠들어대는 이야기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위의 어느 경우에도 자신의 진실을 폭로하는 예언자들만큼은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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