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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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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에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던 이유는?

[근대 의료의 풍경·25] <제중원> 보고서 ①

해링턴은 알렌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자신의 저서 제목처럼 "하느님, 마몬(재물의 신), 일본인" 등 세 가지 키워드로 요약했다고 했는데(제23회), 거기에 "기록자(chronicler) 알렌"이라는 칭호 한 가지를 더 붙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알렌은 <Korea : Fact and Fancy>(1904년), <Things Korean>(1908년)과 같은 저서뿐만 아니라 일기, 편지, 보고서 등 매우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우리나라의 모습과 미국과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거니와, 특히 제중원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알렌의 그 같은 기록들이 없었다면 제중원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훨씬 피상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 부분 잘못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 <Things Korean>의 표지. <알렌의 조선 체류기>, <조선 견문기> 등 두 종류의 한글 번역본이 있다. ⓒ프레시안
알렌 역시 당시의 다른 서양인과 마찬가지로 오리엔탈리즘적 시각과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조선의 문화와 종교와 (전통) 의료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문명적 요소가 거의 없다고 여긴 조선을 그저 개화(開化)와 교화(敎化)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알렌 개인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류 속에서 서양인은 자신만이 진정한 문명인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선교사는 일반 서양인보다 더 강한 기독교식 "선민의식(選民意識)"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당시 다른 서양인의 기록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알렌이 남긴 기록을 볼 때에도 주의가 필요하지만, 그 기록을 통해 많은 지식과 정보뿐만 아니라 성찰 거리를 얻을 수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몇 회에 걸쳐 알렌의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가운데 특히 질병과 환자 진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이 <보고서>는 알렌과 헤론이 제중원에서 첫 1년 동안 자신들이 활동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작성을 의뢰한 기관이나 단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제출처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공식 문서의 성격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헤론은 1886년 4월 8일자에서 "보고서를 이미 작성했습니다"라고 했으며, 알렌은 4월 12일자에 "연례 보고서를 펴내느라 분주합니다"라고 했다. 이것으로 보아 대체로 4월 초순에 보고서 작성이 완료되어 출판 준비를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알렌의 6월 20일자 편지에 "병원 보고서들을 입수했습니다. 보고서 중 얼마를 박사님께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보고서는 6월 20일 이전에 발행(표지에 인쇄처가 일본 요코하마의 Meiklejohn 회사로 되어 있다)된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는 표지, 제중원 도면, 병원에 관한 서술(Narrative Concerning the Hospital), 외래 환자 분류(Dispensary Cases Classified),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Notes on Dispensary Cases), 입원 환자의 상세한 기록(Hospital In-Patients in Detail), 입원 환자에 대한 설명(Notes on Hospital Cases), 재정 보고(Treasurer's Report) 등 총 38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보고서의 총론격인 "병원에 관한 서술"과 "재정 보고"는 알렌 혼자 작성했으며, 나머지 부분은 알렌과 헤론이 공동으로 서술한 것으로 생각된다.

알렌은 "병원에 관한 서술" 부분의 말미에서 1년 동안 제중원을 찾은 환자의 질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말라리아는 가장 흔한 질병으로, 4일열(four-day ague)이 가장 흔하다. 매독은 말라리아 다음으로 많으며, 그 영향(증상)이 매우 많고 다양하다. 쌀을 먹는 모든 나라와 같이 물론 소화 불량이 많다. 소화 불량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은 종교가 아닌 다른 대상물들을 신봉하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믿음은 확실하다.

나병이 흔하다. 모든 종류의 피부병을 볼 수 있다. 수종(水腫)이 흔히 보인다. 연주창이 매우 많다. 요컨대 이곳에서는 잘 알려진 모든 질병이 다양하게 변형된 상태로 보이며 각기와 멜라닌증(黑色症) 등 흔치 않은 병들도 있다. 디스토마와 사상충증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7쪽. 제중원을 찾은 환자들에서 보이는 질병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첫 해 동안 제중원을 찾은 환자 가운데 말라리아와 매독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았다. ⓒ프레시안

이것은 언뜻 평범한 임상 기록으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의료사에서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근대 서양 의학의 관점으로 우리나라의 질병 발생 상황을 다룬 최초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1883년 4월부터 1885년 3월까지 부산의 제생의원 원장을 지낸 고이케(小池正直)가 <계림의사(鷄林醫事)>에서 자신이 제생의원에서 진료한 조선인과 일본인 환자들의 질병에 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제4회) 그 책이 출간된 것은 알렌의 <보고서>보다 1년 늦은 1887년이어서 "최초"의 영예를 차지하지 못했다.

알렌은 이렇게 환자들의 질병을 개관한 다음, "외래환자 분류"에서 다음 표와 같이 질병을 크게 18가지로 분류했다. 이러한 질병 분류 방법은 요즘과는 조금 차이 나는 것으로, 당시 미국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 이 표는 <보고서>에 기술되어 있는 내용을 필자가 정리한 것이다. ⓒ프레시안

표에서 보듯이 제중원을 찾은 환자는 소화기계 환자(19.4퍼센트), 비뇨 생식계 환자 및 매독환자(18.2퍼센트), 발열 환자(11퍼센트) 순이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이 기록은 제중원을 찾은 환자에 관한 것이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당시 조선의 질병 발생 상황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할 터이다.

▲ <보고서> 8쪽. 발열 환자를 접촉성(contagious), 접종 부작용(by innoculation), 풍토병성(endemic) 등으로 세분했는데, 대부분(94퍼센트)이 풍토병성 발열 환자였다. ⓒ프레시안
이제 가장 흔한 세 가지 중 발열(fever) 환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발열 환자 1147명 중 4일열이 713명(62퍼센트), 매일열 177명(15퍼센트), 3일열 171명(15퍼센트), 우두(접종 부작용) 31명(3퍼센트), 이장열(弛張熱) 18명(2퍼센트), 각기 15명(1퍼센트), 두창 8명 순이었다.

앞의 "병원에 관한 서술"에서 언급한 것과 연결을 지어 보면 알렌은 4일열, 매일열, 3일열 등 풍토병성 발열을 모두 말라리아로 여긴 것 같다. 이 점은 "외래 환자에 대한 설명"을 보면 더욱 뚜렷하다.

"치료한 질병 중 가장 흔했던 것 가운데 한 가지가 다양한 종류의 말라리아였는데, 모두 1061례를 진료하여 전체 환자의 대략 10분의 1을 차지했다. 이러한 환자들은 전국 도처에서 찾아왔으며, 500리(135마일)나 떨어진 곳에서 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겨울에 본 환자들은 거의 모두 4일열 말라리아였고, 여름과 가을에 병원에 온 환자들은 주로 매일열과 3일열 형이었다는 점이다."


▲ <보고서> 22쪽. 알렌과 헤론은 말라리아 환자 중 겨울에는 4일열이, 여름과 가을에는 매일열과 3일열 환자가 많았다고 기록했다. ⓒ프레시안

사실 이때까지 서구에서도 말라리아에 대한 연구는 크게 진척되지 않았다. 1880년 프랑스의 기생충학자 라베랑(Alphonse Laveran·1845~1922)이 알제리에서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원충(原蟲)을 처음으로 발견했으며, 영국의 기생충학자 로스(Ronald Ross·1857~1932)가 아노펠레스 모기가 사람을 물 때 말라리아 원충이 사람의 핏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실히 밝힌 것은 1895년이었다. 또 증상만이 아니라 혈액 검사를 통해 말라리아 여부와 종류를 진단한 것은 서구 사회에서도 20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 라베랑(왼쪽)과 로스(오른쪽). 이들이 말라리아 연구로 각각 1907년과 1902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것은 당시 말라리아가 조선과 같은 후진국에서만이 아니라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을 침략하던 서구 선진국에서도 큰 문제였음을 뜻한다. ⓒ프레시안

우리나라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는 거의 모두가 3일열 형(型)이다. 1930년 충청남도 서산과 홍성에서 처음 4일열 말라리아의 발생이 보고되었는데, 그것도 오진으로 보는 학자가 있을 정도로 4일열은 매우 희귀하다. 그렇더라도 1880년대에는 4일열이 많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와 같은 뚜렷한 이유 없이 몇 십 년 사이에 말라리아의 주된 타입이 바뀔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마라리아의 증세와 치료법".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에 재직하던 박병래가 쓴 글로 <가톨릭청년> 1933년 7월호에 실렸다. 이 글에서 박병래는 4일열 말라리아가 충남 등지에 더러 발생한다고 했는데, 그것조차도 오진이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기생충학자도 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말라리아는 거의 모두가 3일열 형이다. ⓒ프레시안
따라서 알렌이 4일열 말라리아라고 진단한 것은 열이 4일 주기로 오르는 다른 종류의 질병들을 제대로 분간(감별 진단)하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알렌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당시 근대 서양 의학의 말라리아 진단 기술의 한계 때문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외국인인 알렌으로서는 조선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가 거의 모두 3일열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열의 특성이 어떻든 말라리아로 생각했을 것이다.

요컨대, 제중원에서 말라리아 환자라고 진단받은 사람 가운데 실제 말라리아 환자는 보고치보다 훨씬 적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른 근거가 없는 이상 3일열 형만 말라리아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당시 진단이 어떻든 발열에 대한 치료제는 무조건 "특효약" 금계랍이었다는 점에서 진단의 의미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1899년 독일의 제약 회사 바이엘이 아스피린을 출시한 뒤로 해열제로서의 금계랍의 독점적 지위는 무너졌다.)

요즈음은 발열의 원인을 모른 채 무작정 해열제를 쓰는 것은 금기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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