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의 연재를 시작하며 - 간디스토마 아기 코만도' 이야기 자연 다큐멘터리 <파브르 곤충기>를 보면, 양의 간으로 들어가기 위해 개미의 뇌를 장악한 간디스토마 기생충 이야기가 나온다. 그 영상물을 본 지 벌써 5년쯤 지났지만, 현대인의 처지가 바로 저거라고 생각하며 소름끼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간디스토마 기생충이 개미의 뇌를 장악해 무슨 짓을 하는지만 간단히 소개한다. 개미 뱃속으로 들어간 여러 마리 유충 중에서 아기 코만도 한 마리가 개미의 뇌로 들어가 뇌의 통제권을 잡는다. 턱을 열고 닫고 하는 신경 근처에 자리 잡고 앉은 아기 코만도는 개미들을 매일 저녁 밖으로 나오게 할 뿐 아니라 식물의 꼭대기까지 기어오르게 한다. 이 명령에 따라 개미들은 양이 풀을 뜯으면서 자신들을 먹으러 와주기를 기다리며 양턱으로 꽃이나 잎의 줄기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꽉 붙들고 있다. 아무도 먹으러 와주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턱을 꼭 다물고 몸을 떨면서 해가 다시 뜰 때까지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때 간디스토마 유충이 개미의 뇌와 턱을 동시에 놔주면 개미는 정상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니, 내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거야? 아, 그리고 뭘 하고 있는 거지?" 풀에서 내려온 이들 개미는 간디스토마 유충이 들어 있지 않은 정상적인 개미들과 어울리며 논다. 그러나 이것도 자기 뇌의 통제권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잠시뿐이다. 더더욱 이상한 점은 꼭 신들린 듯한 이 개미들이 아무 풀에나 가서 매달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은 양이 좋아하는 풀, 즉 목동주머니라 불리는 냉이와 개자리풀 같은 곳에 매달린다. 간디스토마 유충은 개미의 뇌를 놔주기라도 하지만 현대 문명의 유충은 결코 그런 자비조차 베풀지 않기 때문에, 현대인은 이 개미보다 더 비참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현대 문명 속에서 무엇이 이 코만도 유충인지 정체를 파헤치고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탐색하기 위해 잡설의 연재를 시작한다. 원래 이 원고는 서로 관련이 깊은 세 권의 원고 가운데 하나인데, 가장 나중에 완성됐으면서도 가장 먼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참고로, 모두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이 원고들을 잠시 소개하면, '바보 여신'이 현대 문명을 비판하는 <헤이, 바보 예찬>은 일종의 연설문으로 '잡설'은 바로 이 연설문의 주석서 격에 해당하며, <심씨부녀전>은 '잡설'의 사상이 녹아 있는 현대판 소설 심청전으로서 (판소리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잡설체'로 쓰였다. '잡설'의 연재를 허락한 <프레시안>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또 <프레시안>의 훌륭한 독자들을 만나게 되어 더없는 영광으로 생각한다. <필자> |
ⓒ김용철 |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 ①
술자리에서 들은 말이다. 작가 아무개 씨가 어린이 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데 인기가 좋다고 한다. 거창한 소리보다는 일상의 이야기를 잘 꾸며주어야 아이들이 그것을 통해 교육적으로 훌륭하게 계발된다는 것인데, 혹할 만한 얘기라 하겠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 작가가 쓴 책을 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역겨움 섞인 조소가 흘러나왔다.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은 내용으로, 시장 안에 있는 상점에서 엄마가 아이와 함께 옷가지들을 사고 어쩌고 하는 생활 이야기다. 이 가냘픈 작가와 다투고 싶지도 않거니와 내가 다루려는 주제도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일도 없다.
그러나 거대 담론이 퇴조하고 일상이 각광받는 시류에 편승해 여기저기서 오피니언 리더들이 일상의 담론을 들고 나오는데, 이게 참으로 가관이다. 이들은 이런 흐름을 이끌어낸 포스트모던 사상의 절박성에는 눈감은 채, 단어가 풍기는 인상 정도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말하면서 마치 새로운 깃발이라도 든 것처럼 아우성을 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왜 이렇게 짝퉁이 판치는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밀레는 감자가 석류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건 일반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는 눈일 뿐이라며, 목적이 고상하기만 하면 지상의 모든 사물이 숭고함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소재라고 말했다. 여기서 일상의 강조는 '일반적인 눈'을 부각시키려는 게 결코 아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 즉 일반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개별의 것을 특별하게 보는 것이다.
자질구레한 일상, 그건 그냥 자질구레할 뿐이다. 도대체 그게 무슨 수로 삶을 기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가 예쁜 신발을 선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는 이유는 생활 따위를 훌쩍 뛰어넘어 그 신발이 아이의 분신이자 정령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즐거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 그리고 선물로 대하는 여행!
자본주의는 현대의 일상을 생산한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 삶의 불꽃을 빼앗는 일상, 다른 생명과의 유대를 말살하는 일상을 생산하는 것이다. 작가라는 자가 이런 것을 어린아이에게 교육적인 양식으로 주려 한다니!
예쁜 신발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다. 사지 않으면 선물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이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걸 살 수 있는 돈이 아니라 선물이다. 상품으로서의 예쁜 신발이 아닌 것이다. 일상이 기쁨을 주는 까닭은 그것이 바로 선물로서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일상이란 우유병이 아줌마가 되고, 아빠의 라이터가 태권도장 아저씨가 되는 세계다. 아이들은 판타지 속에서 살고 있다. 친구가 신은 예쁜 신발을 갖고 싶을 때 아이들은 자기 얼굴을 친구의 얼굴과 바꿔버린다. 갓난쟁이는 까꿍 할 때마다 새로운 우주와 만난다. 우리는 아이들의 이 세계를 왜 그토록 아름답게 여기는가? 바로 아이들의 일상이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나 평론가, 교육자, 기자, 편집자 등 이른바 오피니언 리더들이 최근 생활 동화다 조기 교육이다 해서 그 판타지를 깨부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이 자본주의의 첨병인 줄도 모르고 자본주의의 획일화에 대항해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 착각의 근저에 바로 거대 담론에 대한 짜증과 일상에 대한 아첨(이익)이 있다. 시류에 따르니 돈을 쉽게 벌 수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단어가 풍기는 이미지가 '개성을 중시하는 다양화'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꿩 먹고 알 먹기다.
이런 풍토에서 거대 담론과 일상에 대한 오해가 생겨났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잘못된 눈을 하고 있기 때문에 오해가 생긴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들은 적어도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아닌가? 사실을 말하면,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전문가란 '방식'을 통해 본래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자이니 안 그럴 수 있겠는가? 게다가 대부분 수박 겉핥기 전문가들이라, 자기들 하는 일이 이전 체계를 견고히 하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전문가의 자의식이라 할 수 있는 내성(內省)마저 이들에겐 없으니,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수많은 세월 동안 눈앞에 널려 있던 일상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너나없이 일상을 주워 삼키는 이들은 일상을 꼭 '방식'으로서 설명한다. 그래야 전문가 소리를 듣고 밥 빌어먹고 사니까 이해는 간다. 아무튼 일상은 이들에게 '새로운 방식'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작가도 일상을 생활동화라는 '방식(형식)'으로 꾸며내자고 이야기하고 다닌다지 않는가. 이 같은 '방식'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들이 그들의 잘못된 눈에서 벗어나려면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일상이 밀레의 감자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려면 '선물로서의 일상'이 돼야 한다. 그것은 어린애가 선물로 받은 예쁜 신발이다. 이것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자. (계속)
새 연재 '잡설'의 필자인 김영종 씨는 <실크로드, 길 위의 역사와 사람들>(사계절 펴냄), <반주류 실크로드사>(사계절 펴냄), <난곡 이야기>(청년사 펴냄) 등을 쓰고, <실크로드의 악마들>(피터 홉커크 지음, 사계절 펴냄)을 옮겼습니다. 곧 <헤이, 바보 예찬>(동아시아 펴냄)이 나올 예정입니다. 김영종 씨는 중앙아시아 역사와 문화에서 문명의 대전환의 실마리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갖고 국내에 중앙아시아 관련 도서를 소개, 출간해 왔습니다. 이제 이런 수년간의 작업을 바탕으로 새로운 문명의 꼴을 보여주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 이번 연재는 그 새로운 시도의 한 보기입니다. '잡설'은 월, 수, 금 매주 세 차례 발행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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