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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vs 일본…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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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vs 일본…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라고?

[망국 100년·37] 러시아 짝사랑

표트르 대제(1672~1725) 때 제국의 틀을 잡았다고 하지만, 러시아는 서유럽 사람들에게 터키제국과 별 차이 없이 머나먼 곳의 광대하고 불가사의한 나라였다. 18세기에 서유럽에서 근대를 향한 여러 가지 변화가 화려하게 펼쳐지는 동안 러시아에는 서방의 귀족 문화가 겨우 궁정 주변에 도입되고 있을 뿐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군대가 중부 유럽을 휩쓸 때까지도 러시아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스웨덴, 터키 등 인접국 외에는 거의 아무런 대외 관계가 없는 은둔의 나라였다.

나폴레옹의 몰락에 주역을 맡으면서 유럽의 강국으로 갑자기 화려하게 등장하면서 러시아의 유럽 문명 수입이 활발해졌다. 19세기 초까지 러시아가 중세적 농노제를 지키고 있었던 일차적 이유는 기후 때문에 농업 생산성이 낮은 데 있었다. 19세기 들어 새로운 기술과 품종을 들여오면서 급속도로 생산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사회경제적 변화가 집약적으로 진행되어 1861년 농노 해방에 이르렀다.

변화가 집약적으로 일어난 만큼 러시아는 사회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심한 혼란을 겪었다.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러시아의 산업화 수준은 중부 유럽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친 농업 생산성의 빠른 발전은 변화를 위한 상당한 동력을 제공했다.

덩치가 큰 다민족-다종교 국가로서 러시아는 종족보다 영토를 중시하는 특이한 국가주의 성향을 가진 나라였는데, 이것이 나폴레옹 전쟁의 승리로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서방과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유럽 근대 문명을 선망하고 러시아가 유럽의 확실한 일원이 되기 바라는 풍조가 일어났다. 슬라브주의(러시아주의)와 유럽주의 사이의 문화적 대립이 러시아 사상계의 바닥 흐름으로 깔려 있는 가운데 19세기 후반에는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허무주의 등 강렬한 정치 사상이 새로 형성되는 지식인층 사이에 도입되고 자라났다.

크리미아 전쟁(1853~56)으로 서유럽 세력과 대형 충돌을 겪으면서 러시아의 변화가 가속되었다. 농노 해방을 앞두고 알렉산더 2세 차르의 널리 알려진 말이 있다. "농노들이 밑에서부터 스스로 해방시키러 나오기 전에 농노제를 위에서부터 철폐해버리는 편이 낫다." 알렉산더 2세는 18세기 후반에 유행했던 계몽 전제군주를 지향했다. 그는 의회는커녕 자문을 위한 귀족 대표회의 정도 회의체조차 군주권에 저촉되는 것으로 보았다.

농노가 국민이 되면서 러시아가 근대적 국민국가에 접근하기는 했지만, 정치사회적 불안이 크게 일어났다. 예전의 농노들은 귀족과 지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네는 우리를 소유합니다. 그러나 땅은 우리가 소유합니다." 농노 시절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경작권 대신 근대적 소유권을 얻기 위한 조건은 매우 가혹했다. 러시아는 지주의 온정을 바라던 농노들 대신 자기네에게 유리한 정책을 차르에게 요구하는 국민으로 가득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차르 체제에 기대를 접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알렉산더 2세(1855~81)는 농노 해방만이 아니라 지방의회(zemstvo)와 선출직 치안판사 설치 등 차르 전제 권력에 저촉되지 않는 범위에서라도 근대적 개혁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암살을 계기로 러시아 정부는 개혁적 보수의 길을 버리고 반동적 보수의 길로 치우쳤다. 이에 따라 지방의회에 근거를 둔 개혁파에서도 차르 체제를 부정하는 경향이 늘어갔다.

알렉산더 3세(1881~94)와 니콜라이 2세(1894~1917)는 군사력과 산업의 근대화만을 생각하고 정치와 사회의 근대화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농촌에는 정책적으로 방기된 상태에서 사회경제적 문제들이 쌓여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이래 서방에서 도입되어 생산성을 향상시켜 준 농업 기술은 노동력을 절감하는 특성을 가진 것이었다. 농노 해방은 이 특성을 적극 활용하는 풍조를 일으켰다. 그런데 산업과 도시로의 인구 이동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19세기 말의 러시아 농촌에서 인구 과잉 문제가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1900년경, 1억이 넘는 러시아 인구 중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 약 100만, 1퍼센트가 안 되는 비율이었고, 대학 교육을 받았거나 받고 있던 사람은 다시 그 10분의 1 숫자였다. 초등 교육을 받은 사람도 500만이 안 되었다.

그 유리한 자원 조건을 가지고도 철강 산업이 자급자족 수준에 도달한 것이 1890년대의 일이었다. 1897년에야 통화의 금본위제를 확립하고 외국 자본을 본격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한 것을 보면 서방의 자본과 그에 따른 서방 기술의 도입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1900년의 러시아는 귀족층과 소수의 신지식인 계층이 유럽 문화와 문명에 친숙하다는 점을 제하고는 같은 시기의 일본보다도 근대국가의 면모가 투철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인구는 일본의 3배가 넘었고 영토는 30배에 달했다. 게다가 러시아는 근대화의 본산인 유럽의 대국이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당시 두 나라의 근대화 수준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시베리아철도도 완성되지 못한 단계에서 극동 지역의 전쟁이라면 러시아가 크게 유리한 조건을 가지지 못한 싸움이었다. ⓒ프레시안

동북아시아에서 일본과 충돌을 일으킬 때 러시아의 상황은 이런 것이었다. 1850년대의 일본 개항 이래 러시아는 다른 유럽국과 달리 일본과 직접 부딪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지만 청일전쟁 때까지는 대체로 원만하게 관계를 풀어가고 있었다. 1895년의 3국간섭이 갈림길이었다. 일본을 적대적으로 압박하고 만주 지역에 러시아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이 정책은 비테 재무상이 이끄는 기술관료 집단의 동방 중시 노선을 반영한 것이었다.

만주를 동서로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를 시베리아와 연결하는 동청(東淸) 철도 건설권을 1896년 러시아가 따낼 때까지도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1898년 일본이 원하던 요동반도에 러시아가 진출하고 만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철도를 따낸 일, 1900년 의화단사건을 계기로 만주에 러시아군이 대거 주둔하게 되면서 러일전쟁에 이를 갈등이 시작되었다.

만주에서 러시아가 약간의 우선권을 가지는 대신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맡긴다는 '신사 협정'이 1896년 2월의 아관파천 당시 일본 정부에서도 러시아 조정에서도 양국 간의 절충점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러시아에게 조선은 사석(捨石)이지, 요석(要石)이 아니었고, 아관파천은 사석의 가치를 늘려준 행운일 뿐, 요석으로 바꿀 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파천 석 달 후에 베베르-고무라 각서와 야마가타-로바노프 교섭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극동 진출이 부동항 획득에 큰 목적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따라서 부동항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이 러시아에게 큰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부동항이라도 어느 바다로 나가는 항구냐에 따라 가치의 차이가 있다. 1900년경의 러시아에게 서해 진출은 동해 진출보다 비교가 안 되게 큰 가치를 가진 방향이었다. 다른 유럽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에게도 중국 진출에 극동 정책의 초점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청일전쟁을 몰고 온 갈등 중에서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문제가 제일 큰 요인이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한국 문제는 부수적인 요소였다.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 것도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 증대를 꺼린 것이 직접적인 이유였다. 중국을 표적으로 놓고 서양 열강들의 입장에서 볼 때 러시아와 일본은 특별한 지리적 이점을 가진 나라들이었는데, 경쟁 상대로 러시아를 더 꺼렸기 때문에 일본을 지원했던 것이다.

1895년 청나라의 경쟁을 따돌린 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는 더 이상 큰 장애가 없었다. 을미사변이라는 자충수로 인해 10년 가까이 진출 방식에 제약을 가졌을 뿐이다. 청나라와 일본 다음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던 러시아에게조차 한국은 중국 진출이라는 큰 과제의 주변 요소였을 뿐이다. 다른 서양 열강들은 더 말할 것도 없는 입장이었다. 대한제국이 던져주는 이권이 있으면 입맛이 당기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을 뿐이지, 그 이권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부담을 무릅쓰고 달려들 대상이 아니었다.

고종의 대한제국은 중립화를 통해 일본의 야욕을 봉쇄한다는 환상을 오랫동안 추구했다. 그 환상을 실현시켜 줄 대상으로 어느 나라보다 러시아를 쳐다봤다. 일본에게 요긴한 한국을 일본에게 양보하는 대신 만주에서 일본의 양보를 얻는 것이 대한제국에 얽매이는 것보다 러시아의 국익에 더 유리한 길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은 이것이 고종의 개인적 환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종이 개명군주를 지향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러시아의 차르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알렉산더 2세 같은 개혁적 개명군주는 아니고 알렉산더 3세나 니콜라이 2세 같은 반동적 전제군주가 모델이었던 것 같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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