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쿠데타의 실패로 일본에 망명했던 박영효(朴泳孝·1861~1939)는 근 10년 만인 1894년 8월에 귀국한 뒤 12월에 내부대신에 임명되어 7개월가량 재임했다. 박영효는 이 가운데 처음 5개월은 친일 성향의 김홍집과, 나중 한 달 남짓은 친미적인 박정양과 연립내각을 이끌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지난 번(제7회)에 살펴보았듯이, 1895년 6월 14일(음력 5월 22일) 내부대신 박영효는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공문을 보내, 앞으로 쓸 일이 있으므로 에비슨에게 빌려준 전(前) 제중원 관사를 되돌려달라고 했다. 제중원은 그 전해 8월에 내부로 소속이 바뀌었지만, 그 직후인 9월에 에비슨에게 제중원 운영권을 이관한 부서는 외부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을 환수하려는 박영효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20여 일 뒤인 7월 6일 박영효가 내부대신 직에서 전격적으로 해임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영효의 갑작스러운 실각에 대해서는, 그가 일본에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일본이 그를 견제해서, 왕권을 제약하려 해서 국왕의 눈 밖에 났기 때문에, 또는 역모를 꾀했기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그만큼 실각 사유가 명확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기대와는 달리, 1895년 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 이후 박정양, 이완용, 이범진, 이채연, 윤치호, 이하영 등 친미-친러파가 세력을 점차 넓혀갔다. 미국 주재 공사를 지낸 박정양(朴定陽·1841~1904)이 5월 31일에 총리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러한 정세 변화의 한 단면이었다.
또 알렌이 당시 총리 임명 과정에 관여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이때에도 알렌에 대한 국왕의 신임은 각별했다. (알렌은 미국 주재 조선 공사관 재직 시절 박정양, 이완용, 이채연 등과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특히 이채연은 제중원 주사로 재직할 때부터 알렌과 가까운 사이였다.)
▲ <조선귀족열전>(1910)에 수록된 박영효 사진. 박영효는 일제에 의해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조선귀족회 회장으로 귀족회관 건물주가 됨으로써 옛 구리개 제중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프레시안 |
이 무렵, 제중원과 관련되는 또 다른 일이 발생했다. 6월 25일(음력 윤5월 3일), "에비슨의 순검(경찰관) 폭행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서흥에 사는 오치서(吳致瑞)라는 사람이 제중원 앞에서 횡사하여 순검이 조사해보니 병을 고치러 제중원을 찾았다가 치료가 어려워지자 의사가 쫓아내어 횡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성부에 문서를 보내어 매장하도록 했는데, 그날 밤에 제중원의 서양인 의사 '어비슌'이 병원 고용인 십여 명을 거느리고 구리개 파출소(交番所)로 와서 시체를 옮기려 하면서 당번 순검을 무수히 구타했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경무사(경찰청장) 이윤용은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6월 27일자로 공문을 보내, 위와 같은 조사 결과를 알리고 순검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도 서양인 의사에게 폭행과 모욕을 당했으니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 경무사 이윤용이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보낸 1895년 6월 27일(음력 윤5월 5일)자 공문. ⓒ프레시안 |
이윤용(李允用·1854~1939)은 동생인 이완용과 함께 나중에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지만 1895년 무렵에는 춘생문 사건과 아관파천에 깊이 관여하는 등 친미-친러파의 대표적인 인사였다. 즉 이 당시에는 정치외교적 노선 때문에 에비슨을 공격할 리는 없는 것이다. 또 이윤용은 평생 줄서기와 눈치 보기의 대가로서 공연히 에비슨을 무고하여 막강한 미국의 눈 밖에 날 일을 할 사람도 아니다.
또 이 사건이 에비슨의 개인적 일탈 행위인지, 제중원 반납 요청에 대한 불만의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시기적으로 묘하게 겹쳐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 6일 내부대신 박영효는 국왕의 명령으로 해임되었으며, 경무사 이윤용은 경무관 이규완, 최진한과 더불어 내부의 제청으로 해직되었다. 체포령이 내려진 박영효는 그 즉시 일본으로 달아나 다시 1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하게
▲ 이윤용. 일제에 적극 협력한 공으로 훈일등욱일대수장(勳一等旭日大綬章)과 욱일동화대수장(旭日桐花大綬章)을 받았고, 또한 남작 작위도 받았다. ⓒ프레시안 |
그 뒤 이들 정동파(친미-친러파)는 11월 28일, 일본군과 친일파들에 의해 경복궁에 유폐되어 있던 국왕을 구출(탈취)하기 위해 "춘생문(春生門) 사건"을 일으켰다. 이 "거사"는 실패했지만 두 달 반 뒤인 이듬해 2월 11일 이들은 다시 "아관(俄館)파천"을 감행하여 성공했다. 12·12 군사반란 때처럼 수도의 한복판이 활극의 무대였다.
▲ <일성록> 1895년 7월 6일(음력 윤5월 14일)자. 여기에는 박영효, 이윤용 등의 해임 사실만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프레시안 |
한참 뒤인 1902년 11월 4일자 <황성신문>에는 원수부(元帥府)에서 2연대를 창설하기 위해 구리개 제중원과 인근 가옥을 매입할 계획이 있다는 기사가 실렸다. 후속 보도나 다른 기록이 없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약 그러한 논의가 있었다면 이미 재동 광제원과 훈동 의학교 및 부속병원이 있는 이상 정부가 구리개 제중원을 환수하더라도 병원으로 사용할 계획은 없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구리개 제중원이 정부로 환수된 것은 1905년 4월이었다. 이때 미국 측과 협상을 한 것은 일본 공사관의 서기관 하기와라(萩原守一)였고, 일본이 나섰던 것은 물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즉 제중원을 환수받아 에비슨이 쓰던 사택은 전형적인 친일파 미국인으로서 당시 대한제국 정부의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Stevens)의 사택으로 사용하고, 병원은 일본인과 친일파의 사교클럽격인 대동구락부가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제중원의 환수 조치는 에비슨에게서 되찾아 사실상 일본인들에게 다시 넘겨주는 것으로, 대한제국의 입장으로서는 하나마나한 일이었다. 아니, 환수를 하기 위해 치를 비용을 생각하면 오히려 손해나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환수를 위한 비용이란 1894년 9월 제중원의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넘겨주면서 맺은 협정에 따른 것이다. 즉 에비슨 측이 건물의 증개축, 수리 등에 들인 비용을 정부가 환수 시에 지불해야 하는 돈이다. 이 협정에 따라 정부는 에비슨 측에 건물의 증개축, 수리 비용 1만1269원90전, 임차료 및 이사비용 1700원을 지불했다. 그밖에 별도로 제중원에 이웃한 에바 필드의 집과 대지를 구입하는 비용 1만9020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대한제국 정부가 대금 지불을 끝낸 뒤 곧바로 대동구락부 신축공사에 들어갔다.
대한제국 정부로서는 하나마나하거나 오히려 손해나는 환수를 했지만, 어쨌든 환수는 한 것이었다. 일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제중원을 환수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전시작전권 환수만큼이나 어려운 제중원 환수였다.
마지막으로, 정부가 에비슨 측에 지불한 건물의 증개축, 수리 비용 1만1269원90전의 내역을 살펴보자.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1905년 4월 10일)에는 다음과 같이 내역이 밝혀져 있다.
이 가운데 병원과 관련해서 지출한 비용은 얼마나 될까? 에비슨의 사택이 양옥 1채, 한옥 1채라고 하니 "한옥 수리비(Repairs on Korean buildings)" 중의 일부는 병원 수리비로 쓰인 것일까? "의사 사택 건축비"만 하더라도 거의 3년치 제중원 운영비이다. 반면에 "하인 거처 비용"의 구체적 내역은 알 수 없지만, 고작 260원이다.
에비슨이 자기 집을 짓는 데 사용한 비용의 일부라도 병원에 들였더라면, "선교부는 현재 우리가 일하는 환경처럼 나쁜 곳에서 일 시킬 권리는 없다"라고 한 에바 필드의 하소연(제21회)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았을까? 에비슨이 그토록 제중원의 운영권을 넘겨받으려 했던 이유가 진정 무엇이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 영문본. 증개축 및 수리 비용의 내역이 적혀 있다. 원래 두 쪽에 나뉘어 기록된 것을 편의상 합쳐서 나타내었다.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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