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개 제중원 사진으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해링턴(Fred Harvey Harrington)의 저서 <God, Mammon, and the Japanese>(1966년)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남쪽(명동성당 쪽)에서 북쪽(을지로 쪽) 방향으로 찍은 것으로 생각된다. "도시 전체와 시골까지 조망할 수 있다"라는 알렌의 기록과 잘 부합한다.
▲ 알렌이 20년 동안 조선에서 선교사와 외교관으로 활동한 내용을 정리한 해링턴의 저서 <God, Mammon, and the Japanese>(1966년)에 수록되어 있는 구리개 제중원 사진. 이 책을 번역하여 <개화기의 한미 관계 : 알렌 박사의 활동을 중심으로>를 펴낸 이광린은 원저의 제목 "하느님, 마몬(재물의 신), 일본인"이 알렌의 조선에서의 활동을 잘 요약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사진에서는 구리개 제중원의 존립 연도를 1887년부터 1902년까지라고 했다. ⓒ프레시안 |
또 한 가지는 선교 잡지 <Korea Mission Field> 1934년 8월호에 실린 것이다. 경사로 보아 사진의 왼쪽은 명동성당 쪽, 오른쪽은 을지로 쪽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규모가 상당히 큰 이 사진 속 건물은 동향(東向)으로 생각되며, 건물 왼쪽에 조금 보이는 것은 에비슨의 사택일 가능성이 있다. 많은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병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은 것으로 여겨진다.
▲ <Korea Mission Field> 1934년 8월호에 실린 구리개 제중원 사진. 1897년에 찍은 것으로 제중원을 조선왕립병원(Royal Korean Hospital)으로 표현하고 있다. ⓒ프레시안 |
YWCA 주차장 옆, "명동 우당(友堂) 길"에는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 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이 표석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대표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독립 투사 이회영(友堂 李會榮·1867~1932) 가문의 집이 있었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 "이회영·이시영 6형제 집 터" 표석. 표석 앞의 길이 "명동 우당 길"이며, 뒤에 보이는 것이 YWCA 주차장이다. 이회영은 안중근이 일제에 의해 처형된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내년은 이회영 형제들이 만주에 세워 항일 독립 운동의 중요한 인적·물적 기반이 된 '신흥무관학교'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프레시안 |
그러면 1886년 늦가을, 제중원이 구리개로 이전한 뒤 재동에 있던 제중원 건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1885년 4월에 설립한 뒤 1년 6개월 동안 크게 두 차례 확장과 단장을 했지만 졸지에 소박을 맞은 셈이었는데, 소박당한 신세처럼 뒷 소식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재동 제중원 건물이 다시 주목의 대상이 될 기회는 몇 차례 있었다. 1895년 의학교 및 부속병원 설치가 논의되었을 때, 1899년 의학교가 실제로 설립되었을 때, 그리고 같은 1899년 내부 소속의 병원(뒤에 광제원으로 개칭)이 창설되었을 때이다. 새로운 의료 기관을 설립할 때 기왕에 병원으로 썼던 건물을 이용하는 편이 여러 모로 편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세 차례의 경우에 재동 제중원을 활용하려 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1895년의 경우에도 그 전해에 에비슨에게 운영권이 넘어간 구리개 제중원을 환수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제7회), 재동 제중원에 대한 언급은 없다. 관련 기록이 유실되었을 수도 있고, 소유권이 민간인에게 넘어가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항간에는 이상재(月南 李商在· 1850~1927)가 한때 재동 제중원 자리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 1899년 5월 30일자 <독립신문> 기사. 내부 소속의 병원(대한 병원이라고 표기했다)이 6월 1일 전 사간원 건물(公廨)을 이용하여 개원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행여 문구로만 돌리지 말고 (…) 외국 병원들과 같이 내실 있게 사업을 하기 바란다"라며 이 병원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나타내었다. ⓒ프레시안 |
이 기사대로 외아문(갑오개혁 뒤에 지금의 세종로 미국 대사관 근처로 이전했고 명칭도 外部로 바뀌었다) 위의 집이라면 예전 제중원 자리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은 "백송나무"(제11회)가 아니라 "왜송나무"라고 한 점이다. 혹시 근처에 왜송나무가 있는 집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그러나 조금 뒤에 보듯이 재동 광제원 자리가 제중원 자리와 일치함은 명백하다. 어쨌든 백송을 왜송이라고 한 것은 수수께끼이다.
광제원은 대한제국기의 국립병원으로, 요즈음 식으로 말해 양한방 협진 병원이었다. 그 병원의 성격처럼 대한제국 정부의 의료 정책의 골간은 근대 서양 의학과 전통 한의학을 병용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의 국정 방침인 구본신참(舊本新參)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 최신경성전도(1907년). (A) 외부(外部)가 있었던 자리. 이 지도에는 이미 외부 대신 통감부가 자리 잡고 있다. (1) 광제원의 첫 자리 (2) 1900년 10월에 이전한 광제원 자리 (3) 의학교 자리. 당시 중요한 국립 의료·의학 교육 기관들은 대개 이 지역에 있었다. ⓒ프레시안 |
광제원은 처음부터 환자가 적지 않았다. 외래환자 수는 한 달에 1000명이 넘었고, 양약 시술을 받은 환자와 한약 시술을 받은 환자의 비율은 대체로 6대4였다. 환자 수로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한성병원(漢城病院)과 비슷했고, 구리개 제중원보다는 많았다. 광제원은 개원 1년 4개월 뒤인 1900년 10월 재동 제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간원 건물이 원래 병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어서 여러 모로 불편하고, 또 많은 환자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황성신문> 1908년 2월 8일자. 학부(學部)에서 관립 여학교를 설립할 것이며, 학교 건물을 빠른 시일 내에 새로 짓기 어려워 이전의 광제원을 사용할 것이라는 기사이다. ⓒ프레시안 |
▲ <독립신문> 1899년 10월 5일자. 한성병원에서 9월 한 달 동안 외래환자 519명을 보았고, 투약 시술 수는 868명이라고 보도했다. 외래 환자와 투약 시술자를 구별한 기준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두 가지를 합치면 광제원을 이용한 환자 수와 비슷했다. 또 한성병원(지금 Cinus 명동점 자리)이 있던 곳은 이미 일본인 밀집 지역이었는데, 환자가 모두 한국인이라고 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프레시안 |
그 점은 1908년 2월 8일자 <황성신문>이 잘 보여주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도 같은 날짜에 마찬가지 내용을 게재했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정리하면, 1886년 후반부터 약 15년 동안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옛 제중원이 1900년 10월부터 1908년 초 무렵까지 7년여 동안 광제원으로 쓰였다가 다시 관립여학교로 넘어간 것이다. 관립여학교가 제중원 자리에 있었던 것은 여러 다른 자료들로도 확인되는 바이므로 앞에서 언급했던 "왜송" 문제도 해결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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