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 씨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쓴 칼럼이 문제가 돼 확대된 이번 사태는 미국 일간지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이하 <LA 타임스>)가 지난 10일 보도했다. 상당기간이 지나서야 외신에 이번 일이 나가게 된 셈이다. 한국 언론 중 이를 보도한 곳은 지난 12일 <LA 타임스> 기사를 번역 보도한 <참세상>이 유일하다.
이를 두고 브린 씨는 13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한국 언론이 삼성에 겁을 먹은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여전히 내 칼럼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마이클 브린 씨는 1982년 영국 일간 <더 타임스>의 서울 특파원으로 한국에 정착, 15년간 현장 기자로 활동해왔다. 이후 <Mr. 김정일> <한국인을 말한다> 등의 책을 썼으며 <이데일리> <코리아타임스> <동아일보> 등에 칼럼을 기고했다. 지난 2005년 기업 홍보대행사 '인사이트 커뮤니케이션스'를 설립했다.
▲마이클 브린 인사이트 커뮤니케이션스 회장. ⓒ프레시안(최형락) |
삼성전자, 명예훼손 이유로 10억 소송 제기
문제가 된 글은 브린 씨가 작년 크리스마스에 쓴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에 받은 선물"이라는 제목의 칼럼이다. 영자지 <코리아타임스>에 기고한 글은 한국의 유명인들이 크리스마스에는 어떤 선물을 보낼 것인지를 가정해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글의 풍자 대상은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 등이며 삼성전자도 포함됐다. 현재 이 글은 <코리아타임스>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상태다.
<LA 타임스>에 따르면 브린 씨는 칼럼에서 삼성전자가 종업원들에게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의 사진을 나눠주며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사진 옆에 걸어둘 것을 지시한다고 썼다. 삼성그룹의 총수 권한을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세습체제에 빗댄 셈이다.
브린 씨는 또 "한국 경제가 놓인 반석인 삼성이 새해 소망을 담은 연하장에 5만 달러짜리 상품권을 동봉해 정치인, 검사, 기자들에게 보낸다"고 썼다.
<코리아타임스>는 이 칼럼이 나간 바로 다음 날인 12월 26일자 1면 오른쪽 하단에 짤막한 해명서(Clarification)를 냈다. "본지는 마이클 브린 씨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관한 금요일자 칼럼이 유머거리였음을 명확히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건희 회장이 사면된 작년 12월 29일, 명예훼손과 잠재적 손실을 이유로 브린 씨와 <코리아타임스>, 그리고 이 신문사 편집국장에게 100만 달러(약 10억 원) 규모의 소송을 제기했다.
그 이유에 대해 <LA 타임스>는 "삼성은 이 논평이 한국 법이 허용하는 풍자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강조했다"며 "삼성이 80%의 수익이 해외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국제적 명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떠한 '작은 사고나 실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 삼성 관계자는 전화 통화에서 "브린 씨는 칼럼이 풍자였다고 하지만 사실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아 명예훼손의 소지가 많았다"며 "검찰에서도 명예훼손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으니 기소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풍자 자체를 문제삼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관계에 대한 설명이 없다면 이를 사실로 믿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설명했다.
삼성, '전적인 사과' 받고 소 취하
이어 한달 가량이 지난 올해 1월 29일, <코리아타임스>는 다시 정정보도(Correction)를 내 "당시 칼럼은 뉴스에서 나온 사실들을 기반으로 했으나 칼럼니스트는 유머나 풍자가 들어간 부분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았다"고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이후 이 신문과 편집국장은 소송 대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삼성과 브린, 양 측은 당초 이번 달 12일로 예정됐던 재판 준비를 진행해왔다. 그 동안에도 브린 씨는 주변의 권유로 삼성 측에 사과를 시도했다.
브린 씨는 "주변에서 사과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해 2월 2일 안면이 있던 이재용 부사장에게 이메일로 사과의 뜻을 표했다"며 "그러나 삼성 측에서 공식적인 사과가 아니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브린 씨는 지난 7일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공식적으로 편지를 보냈고 삼성 측은 소를 취하했다. 삼성 관계자는 "브린 씨가 '전적인 사과(unreservedly apologize)'를 해 소를 취하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브린 씨는 "'내 글은 풍자적 칼럼이었고 어떠한 악의적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며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일어난 이재용 부회장과 그 가족들에 대한 공격만은 사과하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칼럼 자체는 문제될 게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LA 타임스> "삼성의 공격은 언론에 대한 경고"
▲ ⓒ프레시안(최형락) |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는 <LA 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재벌을 비판하는 것은 터부시된다"며 "그들은 절대권력에 가깝다"고 했다.
재벌의 힘과 이에 지배되는 한국 언론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이 신문은 "(한국에서) 대부분의 비판적 기사는 대기업 광고의존도가 낮은 소형 매체에 실린다"며 "평론가들은 대형 언론사가 일반적으로 재벌 리더의 기소 뉴스는 속보로 처리하고 더 이상 깊이 캐묻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보도했다.
브린 씨 또한 비슷한 입장을 고수했다.
브린 "왜 삼성만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나"
브린 씨는 "내 칼럼을 두고 청와대에서도 항의 전화가 왔으나 거기서 끝이었다"며 "왜 삼성만 농담을 받아들이지 못하나"고 지적했다.
또 "<LA 타임스> 등에서는 이를 한국문화의 문제라고 했으나 삼성 등 한국 재벌의 문제"라며 "소수 재벌이 언론을 지배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LA 타임스> 기사는 미국 현지는 물론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다. 대부분은 삼성의 대응이 지나치다는 입장이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주로 찾는 블로그의 하나인 'The Marmot's Hole'에 실린 관련 글에는 13일 오후 현재 216개의 코멘트가 달려 있다.
한 누리꾼은 "내가 이 회사(삼성)를 애용하지 않는 이유"라며 "내 응원팀인 첼시FC의 셔츠 앞면에 검정색 테이프를 둘러야 할 때"라고 비꼬았다.
다른 누리꾼은 "기업홍보(PR)의 실패 사례"라며 "만약 이번 소식이 <파이낸셜타임스>나 <월스트리트저널>에도 실린다면 삼성은 희망하는 수준 이상의 엄청난 규모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이클 브린 "삼성이 법 남용해" 13일 오전 서울 종로에 위치한 인사이트커뮤니케이션스 사옥에서 마이클 브린 씨를 만났다. 브린 씨는 "내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프레시안 : 사과 경위를 확인하고 싶다. 마이클 브린(이하 브린) : 총 네 번에 걸쳐 <코리아타임스>와 내가 사과했다. 작년 12월 26일과 올해 1월 29일 <코리아타임스>가 일종의 해명서를 냈다. 이를 통해 <코리아타임스>는 소송 대상에서 제외됐다. 나는 주변의 권유로 다시 2월 2일 이재용 부사장에게 개인 이메일을 보내 '농담이었을 뿐이고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사과(apologize)했다. 이 부사장은 2년 전쯤 개인적으로 만난 사이다. 그러나 삼성이 공식적 사과를 요구해 이윤우 부회장에게 편지를 썼고, 삼성이 소를 취하했다. 프레시안 : 당신의 칼럼이 잘못됐음을 인정한 것인가? 브린 : 아니다. 내 칼럼은 문제가 없다. 뭘 사과해야 하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칼럼이 특정인을 공격하려는 의도는 없었지만, 만약 이를 읽고 기분이 좋지 않았던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는 있다. 나는 오히려 지나친 대응을 한 삼성이 나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LA 타임스>는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SNL, 미국의 대표적인 TV쇼)>와 같은 형태의 풍자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고 말한다"며 "미국에서 유명인사나 회사에 대한 명예훼손이 고발되는 경우는 진술이 거짓이고 극단적으로 악의적일 때"라고 보도했다. 프레시안 : <LA 타임스>는 미국 변호사의 말을 빌려 이와 같은 소송이 한국적 특성인 것 같다는 입장을 보도했다. 당신도 동의하나? 브린 : 동의하지 않는다. 내 칼럼은 풍자 스타일이었고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 등도 조롱의 대상이 됐다. 삼성에 대한 건 두 문장밖에 없었다. 심지어 청와대에서도 전화가 왔지만 '괜찮아(That's OK)'가 끝이었다. 삼성만 농담을 못 받아들인다. 이건 한국의 문화 문제가 아니라 언론 자유의 문제다. 프레시안 : 삼성이 언론을 통제하려 한다는 건가? 브린 : 이명박, 오바마, 김정일, 비, 김연아…. 유명인이라면 누구나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대상자가 불만을 제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삼성은 다르다. 삼성은 불만 제기 수준을 넘어 광고로 언론을 지배하려 하지 않는가? 프레시안 : 한국 언론이 삼성 등 대형 광고주에 지배받고 있다고 보나? 브린 : 한국 언론이 광고주를 겁내 독자들의 신뢰를 받지 못한다. 편집과 광고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김용철 변호사가 쓴 책 <삼성을 생각한다> 리뷰가 주요 언론에 전혀 실리지 않았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광고부와 편집부가 완전 분리돼 있다. 광고주가 편집권에 간섭한다면 해고 대상이다. <블룸버그> 기자는 한국 언론인들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취재원과의 점심 식사도 하지 않는다. 나도 홍보회사를 운영하지만, 기업의 홍보는 어디까지나 소비자와 의사소통을 위해 이뤄져야 한다. 한국의 재벌들은 기사 편집에 영향을 미치려하는 것 같다. * <LA 타임스>는 한국에서 일하는 미국인 브랜든 카 변호사와 인터뷰에서 "한국에서는 진실 여부가 중요하지 않고 누군가의 명예를 훼손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다"며 "진술이 사실이라고 해도 중요한 면책사유가 되지 않는다. 풍자 역시 면책사유가 아니다. 미국은 발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닥치고 앉아 있어' 사회였다"고 보도했다. 프레시안 : 한국의 명예훼손 관련 법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브린 : 법이 너무 센 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번 문제가 생겼다고 보지 않는다. 영국도 관련 법이 매우 세다. 문제는 한국 경제가 대여섯 개 재벌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관련 법을 악용하고 있다. 언론중재위원회 사람이 말하길 '삼성은 중재위에 절대로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명예훼손으로 고소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심으로는 재판에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지가 나빠질 것을 우려해서다. 명예훼손을 하는 것은 언론사를 위협하려는 의도가 있다. 한국이나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는 역사적으로 강자가 항상 법을 이용해 약자를 공격했다. 삼성도 법을 남용하고 있다. 프레시안 : 삼성 물건을 많이 쓰나? 브린 : 삼성 자체는 좋은 회사다. 내 책상에도 삼성전자의 제품이 있다. <LA 타임스> 기사에 독자들이 '삼성전자를 불매하겠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나는 반대다. 삼성은 좋은 제품을 만든다. 다만 삼성이 언론의 기사도 만들어낸다고 자만하는 것은 안 된다. 삼성이 '뭐가 재미있고, 뭐가 재미 없는지'를 결정할 권한은 없다. 프레시안 : 15년간 한국에서 기자생활을 해 왔다. 이번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 브린 : 전두환 시대에도 이런 일을 겪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외신 기자로 보호받았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그때나 지금이나 압박을 받는 것 같다. 이번 일에도 한국 언론은 전부 조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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