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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학에서 '해고된' 중앙대 학생의 절규에 답한다"

[기고] "기업이 된 대학, 미래는 있는가"

대학이 기업인가?

영국의 한 계관시인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대학"이라고 노래했다. 낭만이 숨 쉬고 자유와 정의와 민주를 부르짖던 지난 시절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자본의 노예들에 둘러싸여 돈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천박한 기업가들이 판치는 곳으로 변했다. 권력마저 시장에 넘어갔다고 말하는 이 상황에서 대학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학문마저 그 순수한 영혼을 팔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대학은 산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래서 혹자들은 산업화되기 위해서 대학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누구는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대학 개혁을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라고 극구 변명해댄다. 학생의 평가는 이젠 더 이상 학문을 가르치는 학자의 몫이 아니다. 대학이 산업이 된 마당에 그 평가는 당연히 기업가의 몫이다.

어떤 반성도 전제되지 않은 채, 기업가 스스로는 대학 졸업생에 대하여 60점 정도로 밖에 평가하지 못하겠다며 노골적으로 평가의 권한을 기업에 내달라고 요구한다. 지금의 대학졸업자가 자기 회사에 들어오면 2년간 재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볼멘 불만을 터뜨리기까지 한다. 이 땅의 대학을 자본의 도구로 전락시키겠다는 무모한 도전이다. 그 시작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중앙대학교 재단인 두산이 신자유주의 방식으로 삶의 방식에 적응하는 새로운 세계 추세에 발맞춘 대학 교육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무자비하게 저지르는 작금의 사태가 이 점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고공의 크레인에 매달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허공을 향해 학문의 자유를 외롭게 외치고 있다. 그들의 양심어린 절규에도 아무런 메아리가 없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 땅에서 대학물을 먹고 살아가는 교수 누구도 용기 있게 일어나 과감하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현실이다.

대학의 영혼은 죽고, 학문의 세계에선 진리가 사라지고, 학자들의 양심은 메말라 줏대 없는 강단만이 산업화된 대학 건물에 대롱대롱 매달린 비참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대학의 지배자가 된 기업가의 자본 밑에서 허우적대며 서로 눈치 보면서 제 정신을 놓아버린 혼수상태에 빠진 마취된 교수들만이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다.

대학이 지식 상품을 파는 백화점인가?

이런 사정을 정확히 갈파한 박노자는 "이제는 낯설게 조차 느껴지지 않는 길거리의 대학광고들이 '지식은 상품이고, 우리는 최고 지식 상품만 제조 판매하는 공장이고 백화점이며, 학생들은 우리의 고객들이고, 교수들은 (주)대학의 임원들이고, 총장은 바로 기업의 꽃, CEO'라고 외치고 있다"고 신랄하게 지금의 대학을 고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더 이상 대학은 상아탑이기를 고집하지 않으며, 고집해서도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 대학의 현실이라고 꼬집고 있다.

덧붙여, 그는 "특정 학교를 나와야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고, 학력이 바로 능력으로 인식되는 한국적인 풍토에서 소위 명문 대학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지식 시장의 고급 명품 백화점'이며, 지식 백화점에서는 취업 시장에서 교환 가치가 높은 실용적 지식을 사야만 하는 편식 현상이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육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

홍윤기는 중앙대가 "애들 뽑아 놓으니 숫자는 좀 알더라"라는 수준의 교육을 시키기 위해 '회계와 사회'를 공통 교육 과목으로 규정한 것을 두고, "대학을 사원 연수원으로 만들어 기업 취직을 위한 스펙 쌓는 사설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전국적으로 대학 졸업자들의 능력을 기업 수준 이하로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발상은 "대학을 기업에 예속시키는 선을 넘어 아예 대학 자체를 기업화시키려는 자본 독재적 발상의 극점에서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스캔들이다. 이 과정의 종말 사태는 거의 파국적"이라고 미래의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

대학의 이념

▲ 중앙대학교 정문 앞 공사장 크레인에서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던 이 대학 독어독문학과 학생 노영수 씨가 최근 퇴학당했다. ⓒ프레시안
이 땅에서 도대체 대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대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무엇을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었고,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대학이 성장 발전해 왔는지를 반성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대학의 개혁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어떻게 문제를 풀어낼 수 있다는 말인가? 학문 연구의 자유와 교수들을 위해 자유로운 길드(결사체)로 형성되었던 유럽과 달리 이 땅에서의 대학은 학문적 관심과 달리 정치적 관심에 설립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민간 주도의 우리의 자생적 요구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민립 대학 운동이 실패하고, 식민 지배의 방편으로 또 명목적으로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경성제국대학이었다.

해방 이후 박정희 독재 정권, 전두환 군사 정권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정치적 관심(이데올로기)이 이 땅의 대학의 본질과 이념을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대학이 한 번도 주체적으로 서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타자의 논리와 외부의 폭력이 대학을 자율권을 훼손하고, 대학은 그 볼모로 여태껏 사로잡혀 왔다. 지금껏 사립대학은 공공의 교육 기관이 아니라, 사적 소유물에 지나지 않았음은 작금의 중앙대를 비롯한 몇몇의 대학 사태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다.

이러한 정치적 볼모로 잡힌 대학 교육이 황폐화되고, 대학의 이념과 본질, 그 사명을 망각하기에 이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물론 대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근본적 대답은 없다. 대학의 이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마땅한 답을 찾기 힘들다. 이념은 결국 '머리 속의 생각'이다. 이념적인 것이 현실적이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현실적이 것이 이념적이어야 할지도 또한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 대학의 이념을 따지지 않고는 대학의 개혁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상(理想)이 없다는 것은 불행하다.

비전과 이념이 없는 민족은 불행한 민족이다. 우리의 이념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이 있어서 우리는 모든 인성의 가르침을 거기에 의존할 수 있다. 이념이 없는 민족에게는 현실의 안주만이 있을 뿐이고, 공허한 정신 상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념은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이어야 한다. 대학의 이념은 대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학의 이념은 우리 민족의 이상과 비전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념이 없는 대학은 죽은 대학이다. 그것은 정신없는 또 내용없는 대학이다. 대학다운 대학, 위대한 대학은 무엇보다 훌륭한 이념 아래 활동하는 대학이어야 한다.

물론 대학 이념의 설정은 어렵다. 어렵다고 돌아가야 할 사안도 아니다. 우리의 과거의 문화 유산과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분명한 대학의 이념을 정초해야 한다. 대학의 사명은 원칙적으로 학문과 예술에서의 창조적 활동을 통하여 민족의, 나아가 인류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데 있어야 할 것이다.

대학과 사회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오랫동안 대학은 학문의 연구와 교수를 위한 교육 기관으로 여겨져 왔다. 이런 의미에서 흔히 대학을 진리의 전당인 상아탑이라고 불러왔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대학이 순순한 학문 연구의 전당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학이 사회와 유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두 번째 의미를 급격히 변화하는 세계에서 다시금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대학이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는가?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은 지난 세기의 대학에 대한 규정이다. 결코 대학은 사회와 유리되어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대학이 하나의 사회로서 엘리트를 위한 사회란 측면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성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요구한다. 그들에게 지워진 책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부담이 되어야 한다. 대학은 학문과 연구 활동을 통해서 이 땅의 앞날을 예비하는 등대와 같은 곳이다. 이런 대학에서 구린내 나는 부정과 비리가 고구마 캐어지듯 캐진다면, 그 민족은 희망이 없다.

물론 오늘의 대학은 소수를 위한 대학이 아니다. 학문과 연구 활동은 대학의 자유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대학의 자율성과 자유를 외친 것은 18~19세기에 이르기까지 칸트, 훔볼트, 셸링 등에 의해서 강조되었다. 칸트는 이성에 바탕을 둔 진리 탐구는 정부의 입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훔볼트는 대학은 국가 기관으로부터 독립되어야 비로소 학문 연구가 옳게 이뤄진다고 강조하였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대학이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학문이 '인간성의 이념'으로 지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독일에서의 대학의 자유를 외쳤던 당시의 시대와 오늘의 상황은 변했다.

미래의 대학 이념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대학은 상아탑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 미래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키워내야 한다. 더구나 대학 교육이 평준화되고 대중 교육의 수단이 된 이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마땅히 직시해야만 한다.

우린 대학의 본질적 사명 속에 이 양 측면을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어느 쪽도 결코 놓칠 수 없는 중요한 대학의 관건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산업화된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술과 산업을 강조하다 보면, 21세기 문화의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교육(人文敎育)이라는 측면이 약화되어 조화로운 인간을 길러낼 수 없다.

민주 시민을 양성하고, 보통의 인간을 교육해야만 한다는 '인간성의 교육'이 약화될 수 있다는 말이다. 대학의 개혁을 비인문적 관점, 신자유주의적 관점, 다시 말해 경쟁과 효율성만을 강조하고, 그 결과(output)만을 강조하는 대학 교육과 그런 도구적 수단을 목적으로 삼는 대학을 목표로 이끌어 간다면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학을 의미하는 이름 'Universitas'는 본디 'universus'라는 말과 그 어원을 같이 한다. 그 의미는 '단편적인 것들 하나로 묶은 전체'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말이 우주와 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다시 인간의 '파편적 지식을 한데 모으는 총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분의 인식을 통한 전체적인 인식을 파악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대학이 그런 역할을 해줘야 한다. 인간의 단편적이고 파편적 지식에 매달리다 보면 인간은 도구적 인간의 차원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대학이 본래 꿈꿨던 그 이상을 우린 저버릴 수 없다. 대학이 전문적 지식을 위한 그 전문성을 유지해야겠지만, 파편화된 전문성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인간 배아복제연구도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인간'을 향한 그 무엇을 위해 필요한지도 염두에 두면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대학교육은 전문적인 지식과 삶의 전체성이라는 통찰을 같이 추구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총체성을 추구하는 대학의 진면목을 위한 대학 개혁 마스터플랜이 짜져야만 한다.

단지 그때그때마다의 상황에 어울리는 대학 개혁은 군사 정권 이래로 이루어졌던 대학 개혁과 마찬가지로 공허한 발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학 개혁은 대학의 본질적 이념과 사명을 직시하면서 이루어져야 한다. 대학 개혁은 대학의 공공성과 자율성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을 그 전제로 하는 바탕 위에서 대학 개혁의 목표가 세워지기 바란다.

대학이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a)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대학의 공공성이 확보된 진정한 자율성이야말로 대학의 본질이어야 한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도덕적 인격적 존재로서의 '조화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인문교육의 강화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렇다고 대학의 자율성이란 이름으로 대학이 신자유주의적 시장 체제 가운데 내팽개쳐져 이념이 상실되고 대학의 비전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경쟁 체제에 방기되어서도 안 된다.

대학은 시장적 질서 속에서 돌아다니는 한낱 물품과 같은 그런 존재적 규정물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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