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측의 조선 칭제 추진은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 청산을 분명히 하는 데 일차 의미가 있었고, 다음으로는 메이지유신의 모델에 따라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의 위상을 유도하는 뜻이 있었다. 정치의 중심이던 국왕을 배제함으로써 좋게 생각하면 개화 정책 추진을 순조롭게 하자는 것이었고, 나쁘게 생각하면 일본의 영향력 내지 지배력에 대한 저항을 없앤다는 뜻이었다. 각국 공사들이 이에 반대한 것은 칭제 자체보다 칭제를 통해 일본의 영향이 너무 빨리 커지는 것을 꺼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환궁한 몇 달 후 그 주변에서 칭제 추진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물론 일본 측의 칭제 추진과 다른 의도였다. 고종은 전제군주의 위상을 더 강화하고 싶어 했다. 1897년 8월 광무 연호를 세우면서부터 칭제를 공론화하여 두 달 후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이때 일본이 앞장서서 황제 칭호를 승인한 것은 일단 사대 관계 청산이라는 한 가지 목적은 이뤄지는 것이므로, 황제권의 제도화라는 또 한 가지 목적은 서서히 추구해 나가겠다는 뜻이었다.
대한제국 건립은 당시 상황으로는 비교적 자주적 의지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다. 그리고 정책 수립과 추진에도 임오군란(1882) 이후 청나라와 일본의 간섭과 주도에 따르던 데 비하면 상당한 자주성이 있었다. 1897년 2월의 환궁부터 1904년 2월의 러일전쟁 발발까지 7년간이 시대 변화에 대한 조선 왕조의 주체적 반응을 제일 폭넓게 살펴볼 수 있는 시기다.
이 시기에 청나라는 극심한 침체와 혼란에 빠져 조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러시아가 어느 정도 견제하고 있었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은 일본의 야욕에 비교할 수 없이 미약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관파천 등 유리한 상황을 소극적으로 이용하는 데 그쳤다. 러일전쟁에서 충돌한 이해관계도 조선이 아니라 만주를 둘러싼 것이었다.
7년간의 소강상태에 임하는 조선 왕조의 자세는 대한제국 건립으로 시작했다. 고종 개인에게는 위신을 높이고 절대 권력을 쥐고 싶은 욕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명목상의 칭제라 하더라도 개인의 욕심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고종은 칭제를 통해 종래보다 넓은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외세에 극심하게 시달리는 상황을 겪는 동안 조선 조야에는 근왕(勤王)의 분위기가 크게 일어났다. 왕이 왕 노릇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기에 앞서 왕이 왕 자리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절박한 과제로 널리 인식된 것이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도 을미사변처럼 황당한 사태를 겪고는 나라 지키는 일을 더 절박하게 여기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뒤를 잇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구호가 힘을 얻었다.
고종의 칭제에는 정통 성리학을 고수하는 일부 보수파를 제하고는 큰 반대가 없었다. 그러나 칭제에 찬성하는 사람들 가운데 칭제의 실제 의미에 대한 생각에는 큰 편차가 있었다. 고종과 그 친위 세력이 황제권의 절대화를 노골적으로 추구하는 데 대해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고, 그 의구심이 표현된 큰 통로의 하나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에서 상징적 역할을 맡은 인물이 서재필(1864~1951)이었다.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은 1895년 말 귀국해 이듬해 4월 <독립신문>을 창간하였고, <독립신문>을 통해 제창한 독립문 건립 운동을 계기로 하여 7월에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통해 주장한 '자주독립'과 '충군애국'이 독립협회의 기본 강령이 되기는 했지만, 독립협회는 출범하면서부터 넓은 범위의 당시 유력계층의 정치적 욕구를 표현하는 수단이 되었다. 정치 참여집단과 민간의 유력계층이 모두 이 운동에 합류했고, 안경수, 이완용 등 친러 정부 고관들이 초기에 조직을 이끌어서 당시 협회 수뇌부는 고급 관료 친목 모임 같은 성격까지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고관들이 독립협회에 적극 참여한 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정부의 지지 기반을 넓히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고종과 그 친위 세력에 대항하는 힘을 얻는 것이었다. 아관파천 상태에서 고종은 이범진을 필두로 하는 친위 세력에게 절대적 신뢰를 주며 조정 대신들의 정책 제안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친위 세력 성장은 임오군란 때부터 왕실이 거듭해서 위험을 겪는 가운데 계속되어 온 현상이었는데, 아관파천에 이르러서는 조정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난 회에 언급한 김홍륙이 친위 세력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인데, 출신이나 자격이 정상적 관리 등용에 적합지 않은 사람들이 임금과 사적인 관계를 통해 권력을 얻게 된 것이었다. 서영희는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에서 이 집단의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처럼 광무연간 권력의 핵심에 진출한 근왕 세력의 정치적 부침은 매우 극단적이었다. 원래 아무런 정치적 기반 없이 정계에 진출한 이들로서는 오로지 황제의 신임만이 그 지위를 보장받는 유일한 근거였으므로, 황제의 총애에 따라 어느 날 갑자기 부상한 인물이 다시 황제의 신임을 잃고 곧바로 실세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났다. 따라서 황제의 총애와 지근거리 확보를 두고 근왕 세력 내부에서도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에게 같은 하위 계층 출신으로서의 횡적인 연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황제와의 수직적인, 그러면서도 사적인 연관 관계만 존재하였다. 황제의 최고신임을 받았던 이용익과 이근택의 대립도 바로 그러한 근왕 세력 내부의 암투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96쪽)
김홍륙은 한때 고종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몰락한 인물이었는데, 그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독다(毒茶) 사건이라는 희한한 수법을 사용한 것이 눈에 띈다. 비리가 적발되어 귀양 갈 참이었던 그를 서둘러 처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너무 많이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지.
김홍륙의 뒤를 이어 황제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김영준이란 자도 희한한 뒤끝을 보여줬다. 일본 공사관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김영준은 무고(誣告)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1899년 경무사로 있을 때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순에 넣자고 동료인 시종 신석린에게 제안했다가 응하지 않자 신석린을 체포하고 당시의 고관 태반을 역모사건에 연루시키려 했다. 이 고변은 효과를 일으키지 못했지만 고종은 그를 두둔했다. 충성심으로 인한 잘못이니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법 담당관의 업무 수행을 공의가 아닌 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권력이 사유화된 결과였다.
김영준은 이듬해 고종의 신임을 갖고 경쟁하던 내관 강석호를 무고하다가 이번에는 관직을 빼앗겼다. 강석호가 미국 공사관과 짜고 공화제 추진을 획책한다는 무고였다. 고종이 공화제라면 원수처럼 여기는 점을 노린 것인데, 강석호는 조정 대신들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김영준은 그리고도 부족해서 친미파와 친러파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또 추진하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김영준의 발호 과정에서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 등 외세 줄서기 현상이 눈에 띈다. 이것은 개항 초기의 친일-친청 대립과 다른 양상이었다. 1880년대까지 친일-친청은 크게 봐서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하는 급진파와 양무운동에 동조하려는 온건파 사이의 정책 대립이라 할 수 있는데, 청일전쟁 이후의 외세 결탁은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기울어졌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고 핵심 인물 몇이 살해당한 후 고종의 자의적 통치를 견제할 수 있는 국내 정치의 메커니즘이 사라졌다. 고종의 사유화된 절대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힘은 외세뿐이었다. 조정의 대신으로 있어도 고종의 변덕 앞에 신분보장의 길은 어느 외세든 골라서 스폰서로 삼는 것뿐이었다. 국익을 위해 외교관들과 접촉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지만 개인적 이해관계가 더 일반적인 동기였다.
열강의 외교관들은 이권 확보를 위해, 그리고 자국에 유리한 정책을 유도해 내기 위해 인맥 관리에 나섰다. 외국 공사들을 영수로 하는 당쟁이 벌어지는 판이었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줄을 바꾸기도 한다는 점이 전통시대 당쟁과 달랐을 뿐이다.
▲러시아가 일본을 견제해 주는 일시적 소강상태 속에 고종이 권력의 사유화에만 매진하자 모처럼 넓은 범위의 조선인들이 독립협회를 통해 정치적 표현에 나설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너무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조직력을 발휘해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노선을 이끈 것은 박영효가 대표하는 친일파 집단이었다. 독립문 현판을 쓴 이완용이 친서양적 고종 친위세력에서 친일파로 변신하는 계기도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만들어졌다. ⓒ프레시안 |
외세 줄서기 현상은 독립협회에서도 나타났다. 창립 초기의 협회에는 여러 성향의 개화파만이 아니라 보수파까지 참여하여 '독립'을 내세운 기념 사업을 함께 벌였으나 1년이 지나 대한제국 건립을 앞두고 토론회를 정기적으로 열면서 친러파와 친일파 사이의 노선 투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고종은 칭제 지지 운동을 이끌어내는 통로로서 협회를 이용하다가 협회의 정치활동이 강화되는 데 따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898년 2월 구국 운동 선언을 계기로 활동이 확대되면서 독립협회는 황제에 종속되지 않은 유일한 정치기구로서 두드러진 존재가 되었다. 그에 따라 친정부적 인사들은 협회에서 탈퇴하거나 뒷전으로 물러서고 정부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정부에 불만을 가진 민심이 독립협회에 크게 모이던 상황을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장안의 군사와 백성들은 정부에 대해 이를 갈았지만 일어설 만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독립협회가 공의를 지킨다는 소문을 듣고 서로 뒤질세라 달려왔다. 고관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비분강개하며 뜻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 많이 모여들어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자 윤치호가 일곱 대신들을 공격했고, 고영근도 조병식, 민종묵, 유기환, 이기동, 김정근을 오흉이라 지목하고는 여섯 차례나 상소하여 죽이라고 청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대궐을 지키며 땅이 울리도록 큰소리로 외쳤으며, 종로에 커다란 목책을 설치하고 단결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임금이 엄한 비답과 온화한 말로 타이르며 여러 차례나 해산하라고 명했지만 끝내 듣지 않았다. 변란의 조짐이 이미 뚜렷이 나타났다.
독립협회에는 정부의 태도와 시책에 불만을 가진 여러 부류 사람들이 모였는데, 그중 강한 조직력을 가진 것이 친일파였다. 특히 일본에 도망가 있던 박영효의 추종자들이 협회의 소장 간부층에 대거 침투해 협회를 강경노선으로 이끌어갔다. 1898년 말 독립협회가 공화제를 추진한다는 익명의 투서를 계기로 독립협회가 고종의 해산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거니와, 독립협회에는 분명히 시정 개혁 운동 차원을 넘어서는 정체(政體) 변혁 운동의 요소가 나타나고 있었다.
대한제국 건립의 기본 노선은 권력의 사유화였다.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궁내부가 비대해진 것이 그 단적인 징표였다. 이런 권력 사유화는 유교 정치의 원리에 용납되지 않는 것인데, 오랜 세도정치를 통해 정치의 공공성이 쇠퇴한 끝에 대원군 납치(1882)에서 민비 살해(1895)에 이르는 외세의 격렬한 개입까지 겹쳐져 조선의 정치에서 유교적 질서가 말살된 결과를 보여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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