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새로운 '정보'로 독자의 지적 욕구를 자극할 것. 둘째, 참신한 '해석'으로 독자의 고정 관념을 흔들 것. 셋째, 진정한 '감동'으로 독자의 굳은 마음을 깨울 것. 이 세 가지 중 한 가지만 갖추더라도, 좋은 책으로 꼽을 만하다.
날마다 수십 권의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앞에서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책을 접하기는 쉽지 않다. 박경미(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의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녹색평론사 펴냄)가 돋보이는 이유다. 그가 수년간 <녹색평론> 등에 기고한 에세이를 모은 이 책은 앞에서 열거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말 그대로 '좋은' 책이다.
"예수는 농민의 친구였다"
"글쓰기는 궁극적으로 글 쓰는 대상의 건강함에 의해 평가된다." (웬델 베리)
예수, 톨스토이, 간디, 함석헌, 리영희, 지율…. 박경미가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에 실린 스물한 편의 에세이에서 언급하는 이들이다. 그가 함석헌을 언급하면서 했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 책은 무엇보다도 이들의 치열한 삶 때문에 "빛을 발한다." 그는 이들의 삶을 되새김질하면서 우리 시대의 그늘을 비춘다.
예를 들면 이렇다. 신학을 공부하는 박경미는 호슬리의 <갈릴리 : 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펴냄)을 소개하면서, 예수의 삶에서 우리가 간과했던 지점을 짚는다. 그는 특히 미국을 중심에 둔, 국내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예수의 삶을 재해석하는 일련의 흐름('예수 세미나')을 비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가가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은 자기 시대의 이상형에 과거를 끼워 맞추는 것이다. 종종 이것은 역사가 자신의 나르시시즘과 결부되어 있다. 자기 시대와 자기 자신을 향한 나르시시즘의 은밀한 유혹을 역사가는 뿌리치기 어렵다. 나와 내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예뻐 보이게 마련이고 그쪽으로 굽게 마련이다. (169쪽)
박경미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요즘의 신학자들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예수의 삶에 초점을 맞춘답시고, 이런 나르시시즘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들이 복원한 예수의 모습은 "종말론적 예언자로서의 비장함과 촌스러움이 사라진, 쿨하고 경쾌한 현인" 다시 말하면 "마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현대 지식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의 삶은 어땠을까? 박경미는 예수의 고향 갈릴리가, 가난한 농민의 농촌이었다는 데에 주목한다. 애초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던 이 예수의 이웃들은 갑자기 로마제국, 토착 귀족(헤롯 가문), 대제사장 등의 삼중의 지배자에게 예속된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예수는 이런 고통 받는 이들을 위로하면서 등장했다.
서로 빚을 탕감해주고(누가 11:2-4 ; 마태 18:23-34) 상대방의 근심과 기본적인 필요를 들어주라는(누가 6:27-36, 12:22-31) 예수의 요구는 지역 공동체의 갱신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의 일부로서 (농민들이 삼중고에 시달리는) 그러한 상황과 아주 잘 들어맞는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지역 공동체의 갱신과 재활성화이다. (179쪽)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의 기쁨과 슬픔, 눈물과 희망을 자양분으로 탄생한 예수 운동은 무엇보다도 바닥에서부터 솟아나는 자생적인 공동체 운동이었으며, 민중의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삶의 회복 운동이었다. 그것은 (…) 파괴의 위협에 처한 전통적인 갈릴리의 소농 중심 마을 공동체가 벌인 자생적인 삶의 회복 운동이었고, 밑바닥 민초들의 사회적 보존 운동이었다. (183쪽)
박경미의 목적이 단순히 예수의 삶에 호기심을 갖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는데 있지는 않으리라. 그는 갈릴리 땅에 뿌리 내린 예수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지금 이 곳에서 예수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되묻는다. 갈릴리 땅의 핍박받는 농민의 모습은 바로 이 땅의 가난한 이웃의 모습과 고스란히 겹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
▲ <마몬의 시대 생명의 논리>(박경미 지음, 녹색평론사 펴냄). ⓒ프레시안 |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예수의 비유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한 시간 일한 사람에게 5000원을 주었다면,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는 40000원은 주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현대의 신학자에게도 골칫거리였던 이 비유를 놓고, 박경미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는 다른, 공동체에 기반을 둔 도덕 경제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한정된 양의 재화만을 가진 고대 사회에서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나 적게 한 사람이나 어느 정도 부족한 임금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공동체 자체가 유지되고 존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고르게 가난해야만 '함께 사는 삶' 자체가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 주인의 자비는 공동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베풀어졌으며, 따라서 그것은 공정하다.
(…) 모든 사람에게 그가 하는 일의 양이나 질에 따라 임금을 지불하는 것이 공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대부분의 장애인과, 아예 경쟁의 출발선 자체가 뒤처져 있는 사람의 경우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 많은 시간 일한다 해도 동일한 임금 체계를 적용한다면 삶의 극한선상에 내몰릴 수밖에 없다.
마치 이 비유에서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일한 만큼 임금을 받았다면 그날 굶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 (이 사람이 굶어죽지 않는 일은) 먼저 일한 사람도 똑같은 임금을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만 실현 가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먼저 일한 사람과 나중 일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서로 돕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24~26쪽)
앞에서 살펴본 갈릴리 땅에 뿌리 내린 예수의 삶을 염두에 두면 이런 해석의 의미는 더욱더 또렷해진다. "더 얻을 수 있는 자기 몫을 포기하라는 요구는 파괴된 공동체적 삶을 회복시키고, 공동체 내의 약자를 제일 먼저 배려하는 예수 운동의 기본 원리와 일맥상통하기"(26~27쪽) 때문이다.
예수의 삶에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교회에서 '장로'를 맡은 대통령부터 교회에서 '걸식'하는 노숙인까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일가? 바로 이 부분에서 박경미의 참신한 '해석'이 빛을 발한다. 그는 이렇게 예수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준다.
우리들이 이 비유에서 일차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맨 처음 일한 사람에게 요구되었던 물질적 이익의 포기이다. 나중 일한 사람의 인간다운 삶은 그가 자신의 잉여를 포기했을 때 가능하다. 오늘날 '사랑'을 물질적 언어로 번역하면 그것은 '가난'일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해야 한다. (29쪽)
"희망은 믿음이다"
박경미는 이 책에서 대학에 몸담고 있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을 토로한다. 그의 자괴감이 낮아진 지식인의 위상이나 인문학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며 정부, 기업에 손을 벌리는 동료의 모습이 불편하다. 지식인이 괴로워해야 할 진짜 이유는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 위기 선언은 국가와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자립적이고 자생적인 인문학이 더 이상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인문학 파탄 선언'이다. (…) 인문학의 고결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그 중요성을 주장하려면, 그리고 사회를 향해 대접받기를 요구하려면, 적어도 민중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해야 지식 팔아 밥 먹고 살면서 최소한의 염치라도 지킬 수 있다. 인간성을 밑바닥에서부터 위협하는 시대의 야만성에 괴로워하기는커녕 어떻게든 그 조류를 타볼까 궁리나 하는 주제에,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사회를 나무라고 뭔가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보기가 민망하고 창피하다. (271~274쪽)
그렇다. 박경미가 보기에 이 시대 지식인의 역할은 '경고자'다. 벼랑 끝으로 달려가는 사회를 향해서 "폭주를 멈추라!" 이렇게 경고하는 사람. "경고가 소용없다면 비명이라도 질러야 한다." 그는 오늘날 지식인이 이런 역할을 못하는 것이, 또 자신이 그런 흐름 속에 서 있는 것이 괴롭다.
이런 야만의 시대에 박경미와 같은 지식인이 희망을 말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그는 리영희와 같은 그의 전 세대 지식인이 가졌던 이성에 대한 믿음, 진보에 대한 희망도 부정한다. "오늘 우리가 세계의 현상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근거해서 역사의 진보와 희망을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진보에 대한 희망이 무너진 지점에 와있다." (81쪽)
그럼에도, 그는 이 책 곳곳에서 희망을 말한다. 단, 그가 말하는 희망은 역사의 진보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그는 '다른' 희망을 이렇게 정의한다.
"희망은 일이 잘될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라, 잘되든 못되든 이렇게 해야 말이 되지, 하는 믿음이다." (하벨) "역사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이대로 가면 공멸이라는 자각,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그래도 이러해야 한다는 신념에 근거해서만 우리는 세계의 변화에 대해 말할 수 있다." (82쪽)
아직도 박경미가 말하는 희망의 의미가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가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그는 책의 다른 곳에서 '운명'과 '희망'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운명'은 세상에는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일깨워줌으로써 한편으로는 신비와 무한에 대한 감수성을 잃지 않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떠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는 정신의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운명' 앞에서는 어떠한 정치 권력이나 경제 권력도 그 한계가 자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140쪽)
희망이란 참으로 역설적인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이 아니면 희망을 갈구하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희망에서 나온 행동도 상황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고 고투하고 있는 한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사랑과 고투가 중단되었을 때, 희망은 사라지고, 삶의 지속성도 사라진다. (141쪽)
이젠 인정해야 할 듯하다. 우리는 운 좋게도 이 야만의 시대를 함께 손잡고 걸어갈 속 깊은 친구 한 명을 얻었다. 이제 그 친구와 사귀는 것은 당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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