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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제중원> 여의사는 '가짜'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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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온 <제중원> 여의사는 '가짜' 의사?

[근대 의료의 풍경·20] 최초의 여의사 엘러스의 정체

1886년 7월 4일 엘러스(Annie J Ellers·1860~1938)가 제물포에 도착했다. 육영공원에서 교사로 일할 헐버트 부부, 길모어 부부, 그리고 번커와 함께였다. 독신으로 조선에 온 엘러스와 번커(Dalziel A Bunker·조선식 이름은 房巨·1853~1932)는 꼭 1년 뒤 부부가 되었다.

"조선에 온 최초의 여의사"라는 엘러스. 하지만 그는 의사가 아니었다. 다음은 헤론이 1886년 10월 19일 엘러스가 의사가 아니라는 문제에 대해 엘린우드와 편지로 상의한 대목이다.

"저희는 엘러스 양을 좋아합니다. 그녀는 (임무를 마치고) 교체될 때까지 역할을 잘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정식 의사라면 많은 면에서 더 나을 것입니다. 그녀가 의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녀는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기서는 알지 못합니다. 그녀가 궁궐에 소개되었을 때, ___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우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We like Miss Ellers and think she will fill the place well until she is relieved. Of course a regular physician would be better in many respects; it is not known here that she has not a medical education, in other words that she is not a doctor. When she was introduced to the palace it was a ___ physician, so that it is a very uncertain place we are in)."

▲ 별세한 지 1년 뒤인 1939년 10월 <Korea Mission Field>에 실린 엘러스(1860~1938)의 사진. ⓒ프레시안
알렌도 비슷한 사정을 1886년 12월 16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다.

"새로운 여의사 한 사람도 파송하셔서 박사님이 엘러스 양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녀가 저희와 함께 귀국하여 2년 동안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You had also better send a new lady Dr. and allow Miss Ellers to go home with us and obtain her degree as she is bound to do in two years anyway by your promise to her)."

알렌의 말대로 엘러스가 의학 학위를 받기 위해 2년 동안의 과정이 더 필요하다면, 엘러스는 의학 교육을 어느 정도 받고 조선에 왔던 것일까? 일부에서는 "1881년 록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 의과대학에 진학했으며 선교사로 파견될 무렵 의학 과정을 거의 마친 상태"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에서 4년제 의과대학의 효시는 1893년에 설립된 존스홉킨스 의대이다. 1880년대에는 하버드 의대 등 몇 군데만이 3년제였고, 대부분 2년제이거나 그보다 더 짧았다. 알렌은 1년, 헤론은 2년 동안 의대를 다녔다. 설령 당시 보스턴 의대가 3년제였다고 하더라도, 알렌의 언급대로 2년을 더 다녀야 한다면 엘러스는 조선에 오기 전에 1년 동안 의대를 다녔을 뿐이다. 한편, 헤론은 엘러스가 "의학 교육을 받지 않았다"라고 했다.

요컨대, 엘러스는 의학을 전혀 공부하지 않았거나 조금 공부한 상태로 조선에 와서 의사 행세를 한 것이었다. 따라서 엘러스는 "조선에 온 최초의 여의사"가 아니라 "조선 최초의 무자격 의사"였던 것이다.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인 엘린우드는 이러한 사실을 언제 알았을까? 헤론의 10월 19일자 편지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일까? 같은 편지의 다른 구절을 보면 그런 것 같지 않다. 헤론의 보고 이전에 엘린우드도 이미 무언가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인상이다.

"박사님께서 저희에게 보내신 지난 편지에 또 다른 여의사 파송에 관해 물어보신 데에 대해서, 그것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In reference to the question asked in your last letter to us, concerning the sending out of another lady physician, it does not seem to be necessary)."

또 앞에서 인용한 알렌 편지의 "박사님이 엘러스 양에게 약속하신 대로"라는 구절은 더욱 의아하다. 엘린우드가 엘러스에게 그러한 약속을 한 시기가 나와 있지 않지만, 처음부터 의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엘러스를 조선으로 파견하며 나중에 의학 교육을 받도록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을까?

엘린우드가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시기보다, 그가 전후 사정을 알고서도 시정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점이 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헤론은 1887년 11월 1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별다른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그러다가 감리교 쪽에 새로 온 여의사 때문에 엘러스의 자질 문제가 궁궐 내에서 불거지는 듯하자, 서둘러 학위를 소지한 여의사를 파송해 달라는 요청을 하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왕비의) 약을 받으러 온 관리가 감리교 선교병원에 새로 온 여의사(메타 하워드)에 대해 물으면서 그녀와 번커 여사 중 누가 더 훌륭한 의사냐고 했습니다. 저는 번커 여사는 알지만 이 (새로 온) 여성은 온 지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다고 답하기는 했지만, 그런 질문을 듣고 깜짝 놀라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님께 호턴 양을 지체 없이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 번커 여사가 학위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당장 우리 둘 모두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The official who came to get the medicine inquired concerning the new lady doctor at the M.E. compound, "whether she or Mrs. Bunker were the best physicians?" I replied that "I knew Mrs. Bunker and that this lady had been too short a time for me to know her", but I was startled at hearing such a question and wondered what it meant and it made me decide to urge you to send out Miss Horton without delay. (…) If it should come out that Mrs. Bunker has not a degree, I am afraid trouble would at once arise for us both)."

의사가 아닌데도 의사 행세를 한 엘러스,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별다른 조처를 취하지 않은 헤론과 알렌(엘러스를 귀국시키자고 건의는 했다), 그리고 엘린우드. 선교사, 의사, 종교 지도자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소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 엘린우드(Frank Field Ellinwood ·1826~1908). 딸 메리 엘린우드가 1911년에 편찬, 발간한 <엘린우드의 생애와 활동>에 수록된 사진이다. 그는 예순이 다 된 1880년대 중반부터 1900년대초까지 20년 가까이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총무로 조선 선교를 총괄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프레시안
미국에서라면 이들이 이렇게 행동했을까? 이들은 과연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 국왕과 왕비를 어떻게 여겼던 것일까? 지난 번(제13회)에 언급했듯이 북장로교가 조선에서 감리교와 치열한 선교 경쟁을 했고, 그 핵심에 여의사 파견이 있었던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이들의 행동이 합리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여의사 파견의 주된 목적이 조선 여성들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당연히 그러한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했던 이유는 왕비와 국왕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1887년 5월 30일)에 따르면, 엘러스와 알렌은 거의 매일 입궐했는데 대개 진료는 이목을 피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국왕과 왕비에게 바깥소식을 전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1887년 7월 엘러스는 번커와 결혼식을 올렸다. 예식 장소는 알렌의 집이었고, 주례는 신랑의 육영공원 동료 교사이자 목사인 길모어가 맡았다. 조선 왕실에서는 결혼을 축하하여 신혼부부에게 집을 장만해주었으며, 신부에게는 조선산 금 60돈(8온스)으로 만든 커다란 팔찌를 선물로 주었다.

▲ <일성록> 1888년 1월 6일(음력 1887년 11월 23일)자. 국왕은 엘러스에게 내린 직첩과 문적은 세상에 반포하지 말라고 명했다. ⓒ프레시안
그리고 국왕은 1888년 1월 엘러스에게 정2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을 특별히 제수했다. 이때 헤론에게도 2품계를 내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국왕은 엘러스에게 내린 직첩(사령장)과 문적(관련 문서)은 세상에 반포하지 말라고 명했다(職牒文蹟勿爲頒布). 알렌과 헤론에 대해서는 없던 일이었다. 국왕이 엘러스의 문제점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국왕과 정부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특히 결혼 뒤에 엘러스의 근무 태도에 문제가 많았음을 헤론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사들이 제게 말하기를 때때로 그녀(엘러스)를 거의 하루 종일 기다려야 한답니다. 그녀는 오전 11시에 출근해야 하는데도 종종 오후 2, 3시쯤 와서 기껏 15분이나 20분 있다가 가버린다고 합니다. 병원 관리들의 불평이 대단합니다(Chusa's tell me, that they have to stay almost all day sometimes, waiting for her, going often at 2 or 3 pm, when her hours is eleven am. She hurries through and goes away, never staying more than 15 or 20 minutes and often less. The hospital officials complain greatly)."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8년 1월 15일자 편지)

하지만 이러한 점만으로 엘러스를 평가하는 것은 부당할지 모른다. 엘러스는 조선 여성의 교육에 힘을 써 정동여학당(정신여학교의 전신)을 탄생시켰다. 1917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필자의 외조모는 자신의 신앙심과 민족 의식이 주로 정신학교 재학 시절에 길러졌으며, 그 덕에 3·1운동 때 처녀 교사의 처지임에도 가혹한 감옥살이를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하곤 했다.

엘러스는 1894년 감리교로 소속을 바꾸어 1926년까지 선교사로 활동하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32년 사망한 남편의 유골을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했으며, 1937년 조선으로 돌아와 1년을 더 살았다. 1938년 8월 8일 세상을 떠난 엘러스는 남편 곁에 합장되었다. 이들 부부의 묘비에는 "날이 새고 흑암(黑暗)이 물러갈 때까지(Until the day dawn the shadows free away)"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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