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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학교는 왜 실패로 끝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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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중원> 학교는 왜 실패로 끝났나?

[근대 의료의 풍경·18] 제중원 학당 ③

제중원 학당은 근대 의학 교육에 대한 의욕과 기대를 가지고 자못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생도들이 3년 내지 5년의 교육 과정을 마치면 일반 의사(general physician) 자격을 주고 관리로 임용하겠다는 애초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도로 입학하여 제중원 주사가 된 이의식의 경우도 성공 사례로 보기 어렵다는 점은 지난 회에서 언급했다.

제중원 학당의 교육은 우두 의사 교육과 대비된다. 거의 전적으로 조선 정부(외아문)와 조선인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우두 의사 교육은 충청도 지역에서만 적어도 39명의 우두 의사를 양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우두 한 가지만 시술하는 우두 의사 교육과 의사 교육을 일률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두 접종은 당시 가장 큰 문제이던 두창(천연두)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우두 의사의 중요성은 상당히 컸다. 또한 일본에서 그랬듯이 우두 의사 교육은 서구 이외의 많은 나라들에서 근대 의학 교육의 효시 역할을 했다.

▲ <우두절목(牛痘節目)> 중의 우두 의사 명단. 1880년대 충청도에서 배출된 우두 의사 39명의 이름과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 액수가 기록되어 있다. 세금은 매해 12월에 징수하여 우두 사업을 총괄한 외아문에 납부했다. ⓒ프레시안
제중원 학당 교육이 기대했던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남아 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판단하기 쉽지 않지만 가장 큰 책임은 당연히 조선 정부에게 있다 할 것이다. 국왕과 정부는 근대 의학 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인식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런 교육이 성과를 거두기 위한 실제 준비와 실행에는 소홀했다고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국왕의 "진두지휘식" 개입만 두드러졌을 뿐 정부(외아문)가 의제를 마련하고 또 그것을 해결하려는 시스템의 작동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병원 학교도 다소 경시되어 왔습니다만 국왕께서 듣고서 즉시 새 생도들을 보내고 이전 생도들은 적절히 지원을 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잘해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루에 한 시간도 가르치기 어렵고 최근에는 전혀 가르치지 못했습니다(The hospital school has also been somewhat neglected, but the king, when informed, promptly gave orders that the new students should be sent and the old ones properly supported, so that now we are getting on well. I find it now however difficult to give them an hour a day for teaching and often recently have not been able to teach them at all)." (헤론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7년 11월 13일자 편지)

왕권국가에서 국왕의 역할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러한 국왕의 역할이 정부 시스템을 통하지 않고 전제적(專制的)으로 작동할 때 효과는 즉흥적이고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경우에도 국왕의 근대적 개혁에 대한 관심은 대체로 "과시"에 그칠 수밖에 없는 내재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학당에서 실제 교육을 담당했던 알렌과 헤론 등은 어떠했을까? 알렌은 학당을 병원의 영향력과 기회를 증대시킬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다른 일에 시간을 쓸 수 없을 것"(제17회 참조)이라고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학당 교육이 시작된 이후,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겼을 뿐 알렌의 일기와 편지에는 학당에 관한 언급이 별로 없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제중원 학당 교육이 성과를 거두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에 참여한 알렌, 헤론, 언더우드가 서로 협조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학당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헤론과 언더우드는 소외되어 있었고, 그들은 개설 직전에야 그러한 사실을 알고 참여하게 되었다. 알렌은 그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의학교 설립) 계획은 내가 창안해서 추진했다. 그러나 일을 추진하면서 동료들로부터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일전에 우리는 모임을 가졌는데, 그 모임에서 이들은 나와 함께 일하기로 했다(The scheme originated with me and I put it through. Had the antagonism of my co-workers to deal with. We had a meeting the other day, in which these gentlemen worked to use me up)." (1886년 3월 29일자 일기)

알렌과 헤론 사이의 갈등은 그들이 제중원에서 함께 일한 초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매우 고질적이었다. 따라서 서로에 대한 언급은 조심스럽게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다음의 기록에서 1886년 10월 무렵 헤론이 제중원 학당에서 매일 한 시간씩 교육을 해야 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헤론은 격주로 하루 세 시간만 일하는 것 이외에 모든 시간을 자신의 개인적 일에 사용해 왔습니다. 그는 병원 학교에서 매일 한 시간씩 가르쳐야 하는 것에 크게 불평을 하면서 항상 그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Heron has had all of his time to himself except, say three hours daily every other week (not more). He complains greatly at having to teach an hour daily in the Hospital School and is always trying to worm out of it)." (알렌이 1886년 10월 2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이번에는 헤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헤론은 알렌에 비해서 오히려 학당 교육에 관한 기록을 비교적 많이 남기고 있다. 헤론은 초기부터 학당 교육을 선교의 한 수단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제중원과 달리 학당에서는 어느 정도 선교가 가능했다는 사실은 언더우드도 언급한 바 있다.)

"이것(학당 교육)은 우리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좋은 자료(기회)를 제공합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동안, 이곳 조선에서 기독교에 대해 말할 일___(This give us good material to work on, and if in our teaching ___ work which will tell for Christianity here in Korea)." (헤론이 1886년 4월 8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이처럼 헤론 역시, 알렌과는 다른 이유에서였지만, 학당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중요하게 생각한 만큼의 많은 시간을 교육에 할애하지는 못했다. 초기에는 하루 1시간씩 교육했고 뒤에는 거의 교육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일로 바쁜 것이 주된 이유로 보인다. 그 다른 일이란 제중원 진료인 경우도 있었지만, 그밖의 이유가 더 많았다.

1885년 4월 제중원이 문을 열고 몇 달 동안 알렌과, 그리고 6월에 합류한 헤론이 환자 진료에 진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을에 들면서부터는 오히려 환자가 줄어들어 진료가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어떤 때에는 알렌과 헤론이 격주로 번갈아 진료를 할 정도였다.

"지금 이곳에는 의사 두 명이 있을 필요가 거의 없습니다. 진료소에 오는 사람의 수가 약간 감소했고, 이곳 관리들이 약을 조제하는 것을 잘 도와주기 때문입니다(Two physicians were scarcely needed here now, as the attendance at the dispensary had slightly decreased and good assistance in preparing medicines was given by the officials there)." (헤론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5년 10월 26일자 편지)

위의 기록은 제중원 학당 개교 이전의 것이지만, 의사 두 명이 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제중원 환자가 많지 않았음을 알려 준다.

제중원 진료가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알렌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다음은 알렌이 제중원을 이전, 확장하자고 외아문에 건의했을 무렵인 1886년 8월 23일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이다.

"오늘 병원으로 막 떠나려는데 국왕이 사람을 보내 저를 불렀습니다. 이번 주는 제 (근무) 주라서 헤론에게 대신 병원에 가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는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저는 환자가 많지 않아서 병원 일은 2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Today I was sent for by the King just as I was setting out for the Hospital. This is my week. I asked Heron to go instead and he flatly refused. I mentioned that it would not take two hours to do the hospital work, for the number is very low now)."

따라서 그들이 학당 교육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제중원 진료 때문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썼던 것은 대체로 제중원 진료 이외의 일이었다. 그러한 사정을 헤론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들어보자.

"물론 그(알렌)가 매우 많은 기금을 끌어오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이를 위한 시간을 그에게 주기 위해서 조선인 진료를 거의 모두 제가 하고 있습니다(Of course it may be said that this is only right since he brings in the funds very largely, but as in order to give him time for this, I do all or nearly all with the Korean practice)." (1886년 8월 27일자)

알렌이 미국 주재 조선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받아 떠난 뒤, 헤론의 일은 더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제중원 환자가 한때 증가하여 헤론이 그 일만으로도 벅차한 적이 있었지만 대체로 다른 일이 더 큰 부담이었다. 다음과 같은 그의 기록을 보면, 다른 일이란 외국인 진료, 왕실 진료, 그리고 제중원이 아닌 헤론 자신의 집에서 환자 보는 것 등이었다.

"저는 1년 동안 이곳 일을 저 혼자서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박사님도 외국인 진료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다. 그리고 지금 궁궐 일은, 제 생각에, 무척 힘듭니다(I don't know how it will be possible to do well the work here for a year, single handed. You know how much of the foreign practice there is and the palace work is now, I believe, quite heavy)." (1887년 9월 4일자)

"이것(제중원 일)은 제 업무의 비교적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외국인 진료와 집에서 환자 보는 것이 가장 힘이 많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This tells comparatively the smaller part of my work. The foreign practice and the patients I see at home making up the most laborous part of it)." (1888년 5월 20일자)

헤론은 이러한 일들로 바빠 교육을 거의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헐버트와 언더우드가 주로 교육을 담당했다.

"헐버트 씨는 현재 하루에 두 시간씩 병원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거기서 정기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가 도와주어 정말 기쁩니다. 아시다시피 언더우드 씨도 하루에 두 시간씩 가르치고 있습니다(Mr. Hulbert is at present teaching two hours a day in the hospital school. I find it almost impossible to be regular in teaching there, so I am very glad to have his help. As you know, Mr. Underwood teaches two hours a day)." (1889년 12월 18일자)

▲ 1886년부터 1891년까지 육영공원 교사로 일한 헐버트. 1888년 3월경부터는 제중원 학당 교육도 사실상 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헤론에 의하면, 그때부터 자신들이 그 대가로 매달 25달러를 헐버트에게 지불했다고 하는데, 그 연유에 대해서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다. ⓒ프레시안
요컨대, 헤론은 제중원 학당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주로 과외의 업무 때문에 그 일을 충실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교육은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와, 학당 초기부터 관여했던 언더우드가 거의 전담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학당은 "의학 교육 기관"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헤론의 기록에 따르면, 헐버트는 이미 1888년 3월경부터 하루 2시간씩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다.

<통서일기> 1890년 4월 21일(음력 3월 3일)자에 제중원 교사라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무렵까지 제중원 학당이 존속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그보다 훨씬 전에 의학 교육 기관으로서의 의의는 상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정부와 외국인 의사, 양쪽 모두 의욕은 있었지만 학당을 애초 계획대로 운영할 준비와 역량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큰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을지 모른다.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차라리 제중원 학도들을 대상으로 도제식 교육을 충실히 하는 것이 당시로는 현실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서구 사회에서 의학 교육은 대체로 19세기부터 도제식에서 정규 대학 교육으로 이행, 발전했다. 그 전에는 정규 교육을 받은 의사는 전체 의사들 중 극소수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는 서구 국가 중 그 점에서 가장 뒤늦은 편이었다. 하지만 사정에 따라 도제식 교육이 더 적절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아진 나중에도, 에비슨은 주로 도제식 교육을 통해 1908년에야 처음으로 의사를 배출했다. 조선에 오기 전 캐나다에서 약학대학과 의과대학의 교수 경력을 가졌던 에비슨도 정규 학교식 교육보다 도제식 또는 혼합식 교육을 활용했는데, 1880년대에 벌써 정규 학교식 교육이라니, 지나치게 의욕이 앞선 일이었는지 모른다. 더욱이 대학에서 교육을 해본 경력이 전혀 없는 알렌과 헤론에게는 매우 벅찬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당시의 경험을 살려, 조선정부는 1899년에 독자적으로 의학교를 설립하여 1902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식 의사 19명을 배출했고, 외국인 선교의사들도 1908년에 7명의 의사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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