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밥만 먹고 못 살아!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밥만 먹고 못 살아!

[판다곰의 음식 여행·14] 강과 바다를 뛰노는 것들

이 지구 위에 육지는 큰 대륙들이 바다를 사이하고 섬처럼 서로 떨어져 있지만 바다는 모두 하나로 통해 있다. 이 지구 위 모든 생물이 바다에서 시작되었듯 바다에는 정말 많은 생물이 살고 있다.

먼 옛날 초기의 인류가 바닷가에 섰을 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머나먼 수평선과 밀려오는 흰 파도들, 그리고 저 바다 건너편의 아득한 그리움? 아니면 거센 파도가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두려움? 그것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눈앞에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먹을 것이었다.

옛사람들의 식량 창고였던 바다와 강

지금도 바닷가 모래사장과 바위, 그리고 개펄에는 무궁한 먹을거리가 널렸으니 바로 조개와 굴이다. 이 연체동물은 움직임이 없거나 느리기에 인간이 별다른 도구 없이도 포획할 수 있는 손쉬운 대상이었다. 많은 신석기 시대 패총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지금 남아 있는 패총의 구성 성분을 보면 굴과 바지락, 백합과 같은 조개 종류가 가장 많다.

특이한 것은 이 패총에는 고래나 상어 같은 큰 동물의 뼈도 있는데 이들까지 바다에 나가 잡아온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가끔 고래나 상어가 바닷가로 떠밀려오는 것을 보면 운이 좋아 이런 것들을 포식할 기회를 잡았던 것 같다.

이 패총에 생선의 뼈나 나무를 이용한 낚싯바늘이 있는 것을 보면 비록 원시적이기는 했지만 낚시도 했던 것 같다. 요즘과 같이 쇠로 만든 굽은 모양의 낚싯바늘이 아니었기에 미끼만 빼앗길 확률이 높고 성공 확률은 낮았겠지만 그래도 심심치 않게 포획물을 건져 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잡은 물고기 뼈도 이 패총에 함께 있다. 그리고 그물추도 함께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물로도 물고기를 잡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새로운 고기잡이도 망망대해에서는 지극히 성공률이 낮은 방법이었고 그래서 배를 채우는 것은 주로 조개와 굴이 가장 많았을 것이다.

바다라면 몰라도 맑은 개울에서는 조금 더 고기잡이의 확률을 높일 방법이 있었다. 물속이라도 눈에 보이는 깊지 않은 곳이라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뭇가지나 대나무를 가지고 노니는 고기를 찔러서 잡거나, 활을 잘 쏘는 우리 민족답게 화살을 쏘아 잡을 수도 있었다. 여름철 냇가의 천렵처럼 여러 명이 물고기를 몰아 간단한 그물로 잡기도 했고, 독이 있는 풀을 짓이겨 물에 풀어서 물고기를 잠시 기절시키는 방법도 썼다.

가장 손쉬운 것은 회유하는 물고기를 잡는 것이다. 연어, 송어, 은어, 숭어와 같은 물고기들이 강으로 알을 낳으러 올 때를 기다리면 좋은 목에서는 간단한 소쿠리 같은 도구로도 물고기를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시기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쉽기는 해도, 사람이 물고기를 잡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고기는 육식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라 해안선이 긴 나라에 속한다. 사정이 그러니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기본적인 식량 채취의 수단이었음은 당연하다. 바다에서 소금을 얻을 수도 있으니 물고기가 썩지 않게 염장하는 기술도 일찍 발달했다. 배를 만들어 무역을 할 만큼 조선술이 발달한 시기에는 가까운 바다에 나가기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물고기를 잡는 일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 같지만 잡는 방법에 따라 먹는 생선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은 물고기를 하도 많이 잡아먹어 물속에 있는 개체수도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고려 시대의 어업을 보면 고기잡이배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 어량을 설치해놓고 간조의 차이로 물고기를 가두어 잡는 어업이 주류였던 것 같다. 어량은 고정적인 설치물로, 간조의 차이가 심한 바닷가 개펄에다 돌이나 나무, 대나무, 또는 그물로 막아놓고 함정을 설치해 썰물이 되어도 물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장치다.

썰물이 되면 바구니나 손에 들 수 있는 그물을 가지고 가서 물고기를 주워 담는다. 돌로 쌓아 반영구적인 장치를 만들기도 하지만, 조수의 힘 탓에 망가지므로 때때로 보수를 해줘야 한다. 이것이 대체로 조선 시대 말까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는 대표적인 방법이었다. 잡히는 물고기는 때에 따라 달랐겠지만 주로 근해에서 노니는 고기였다. 이 어량은 소금과 함께 풍부한 수입을 가져다주었기에 대부분이 지방 토호의 큰 재산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어량을 권문세가에 상으로 주는 일도 많았다.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 사람들이 권문세가는 고기를 주로 먹고 상민들은 수산물을 많이 먹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수산물이란 주로 조개와 굴, 새우젓, 그리고 미역·다시마·김과 같은 해조류를 뜻한다.

고려는 불교가 국교라 살생을 금한다고 해서 고기 먹는 것을 금기시했겠지만, 돈 많고 권력 있는 권세가에서는 양과 돼지를 키워 먹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뭍에서 자라는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을 잡는 것은 살생이라 했지만 물고기는 그런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도 황실에서 불교를 믿어 도축을 금했지만 물고기까지 금하지는 않았다. 일본이 물고기를 많이 먹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서구에서도 사순절 기간에 육식을 금했지만 생선은 예외였다. 인간이 보기에는 물속에서 자라는 생선이 인간과 너무 다르기에 생명으로 취급하지 않은 듯싶다. 아무튼 고려의 귀족들은 저희들은 고기를 먹고 서민에게는 저희들 소유의 어량에서 나는 해산물과 염전의 소금을 팔아 이익을 챙겼으니 극락왕생을 한 사람은 별로 없을 성싶다.

해조류를 많이 먹는 것이 우리나라 수산물 채취의 큰 특징 같다. 우리는 지금도 김, 다시마, 미역, 파래, 톳, 매생이 등을 비롯해 해조류를 아주 즐기는 편이다. 일본도 우리 못지않게 해조류를 즐기지만 미역은 우리가 훨씬 많이 먹는다. 중국은 일부 해조류를 먹기는 하지만 별로 즐기지도, 많이 먹지도 않는다. 서구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또 하나 특징은 일본과 같이 생선을 회로 즐겼다는 점이다. 생선을 회로 즐기는 전통은 일본과 한국밖에는 없다. 한국은 생선 말고 육회도 즐겼으니 날것을 먹는 것은 원래 식생활 전통이었던 것이다. 이 전통은, 유교를 숭상한 조선 시대에는 공자가 날고기를 먹었다 하여 더욱 공고해졌다. 물론 신선하게 운반하기 어려우니 내륙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에 절이거나 말린 생선, 젓갈밖에는 먹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왕공귀족들은 신라나 조선의 석빙고에서 보듯 겨울 얼음을 저장해 여름에 신선한 생선을 먹는 데에 쓰기도 했다.

ⓒ프레시안(손문상)

이 물고기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물고기야 바다에서 자라니 국경이 있을 턱이 없고 대체로 잡히는 것을 먹었으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 따라 잡히는 물고기가 다르니 낚시로 잡을 때와 어량에서 잡히는 고기, 그물로 거둬들이는 물고기가 다 다르다.

우리가 요즘 가장 즐겨 먹고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생선이라 첫손가락에 꼽아도 좋을 명태를 보자. 조선 시대 초기인 세종 때만 하더라도 문헌상에는 이 명태가 나타나지 않다가 조선 중기가 되어서야 물고기 이름이 나타난다. 동해안은 조수간만의 차이가 작기에 어량을 설치하기에 유리한 곳이 아니다.

명태는 찬물에 사는 어종이기 때문에 동해안에서만 잡힐 수 있다. 더군다나 먼 바다에 떼 지어 다니는 물고기니 어량이 있다 한들 잡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이름이 없는 물고기는 먹지 못하게 했는데, 태 씨 성의 어부가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들고 명천 태수를 찾아가 이름을 붙여줄 것을 간청한다. 이름을 모르니 먹을 수도, 그렇다고 팔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수가 '함경도 명천에 사는 태 씨 성을 가진 어부가 낚시로 잡았다'는 뜻에서 한 자씩 따서 그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것이 조선 중기의 일이니 그 이전에는 명태를 먹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은 말린 것을 북어, 생물을 명태라고 한다. 얼리지 않은 것은 생태라 하고 언 명태를 동태라 한 것은 냉장, 냉동 기술이 발달한 최근의 일이다. 원래 북어라는 이름은, 처음 명태를 본 사람들이 대구의 새끼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북쪽에서만 난다고 하여 붙인 것이다.

요즘처럼 겨울철 명태를 잡아 추운 덕장에서 말려 북어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로 거의 영·정조 때에 이르러서였다. 그 시기에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주낙질을 하여 명태를 대량으로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말린 북어는 마차와 배에 실려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러니 술을 마신 다음 해장국으로 북엇국을 먹게 된 것은 아무리 빨라도 조선 후기 이후부터인 셈이다.

밥상 위의 어류도감

조선 초기부터 말까지 가장 성행했던 물고기는 청어였다. 지금은 바다가 따뜻해져 연안에서는 거의 청어를 볼 수 없고 어쩌다 잡은 청어도 옛날 것과 맛이 다르지만, 조선 시대에는 몇 해 동안 이 청어가 잡히지 않던 시절이 가끔 있긴 했어도 평소에는 대단히 많은 양의 청어가 잡혔나 보다.

특히 영일만 일대가 청어의 산지로 유명했는데 잡아서 염장도 하고 말리기도 하여 전국적으로 청어가 가장 흔한 생선이 되었다.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미처 말리지 못한 청어는 비료로 쓸 정도였다. 지금도 포항의 명물인 과메기는 원래 청어 말린 것이었는데 청어가 잡히지 않아 꽁치로 그 재료를 바꾼 것이다. 청어는 그 당시 주방에서 국물을 내는 데에 빠질 수 없는 생선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생선은 바로 조기다. 몸에 기운을 북돋아준다고 조기(助氣), 머리에 돌 같은 것이 있다 해서 석수어(石首魚), 또는 노란 몸에 돌이 들어 있다고 황석어(黃石魚) 등의 이름을 가진 이 생선은 제수용으로 요즘도 빠질 수 없다. 동중국해에서 난류를 따라 발해만으로 알을 낳기 위해 회유해 오는 것을 충청도와 전라도 지방에서 잡을 수 있다.

이렇게 잡힌 조기를 잘 씻어 염장했다가 채반에 말린 것이 굴비다. 굴비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이자겸이 법성포 지역에 귀양을 갔다 말린 조기를 먹어보고는 임금께 진상하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굴비(屈非)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요즘도 법성포 굴비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잡기는 배를 타고 먼 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쓴다. 그리고 예전의 굴비는 냉장이 발달하지 않아 마른 굴비였던 데에 반해 요즘은 연한 육질을 탐해 덜 말린 굴비를 만든다.

남해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선은 대구였다. 비리지 않고 살이 많기에 말려서도 먹고 전을 뜨기도 하는, 제수에 꼭 필요한 생선이었다. 살만 발라내기 쉽기에 생선살만 먹는 서양 사람들도 좋아하는 생선이다.

또 고등어는 서해와 남해 연안에서 흔히 잡을 수 있는 생선 가운데 하나다. 고등어의 옛 이름은 고도어(古刀魚)다. 생긴 모양이 옛날 칼과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 지금은 고등어가 되었다.

서해안에서는 민어와 숭어와 같은 알배기 생선들이 잡히고 아주 좋은 생선으로 여겨졌다. 살도 많지만 특히 알이 크기에 소금을 뿌려 잘 말리면 어란이 된다. 일본과 한국, 중국뿐만 아니라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지역이면 대개 이렇게 어란을 만들어 먹었다.

우리 생선 이름에 '치'라는 접미사가 붙은 것이 많다. 이렇게 '치' 자가 붙은 꽁치, 갈치, 날치, 삼치, 준치와 같은 생선들은 흔히 잡히는 생선이었다. 대부분 귀하게 여기는 생선은 '물고기 어(魚)' 자를 붙였다. 제사상에 올리는 물고기는 '치' 자가 들어간 생선이 없다. 생선이 귀하더라도 고등'어' 아니면 문'어'를 올려야 한다.

고깃배가 바뀌면 물고기도 바뀐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 연안의 고기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의 신기술을 받아들여 건조한 일본 어선들이 독차지했다. 우리 어부들도 어촌계를 조직해 신식 어선과 발달한 어구들을 도입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해안의 물고기들은 거의 일본 어선들이 독식했다. 한일어업협정 때문에 두 나라 사이에 다툼이 일어날 때, 이런 역사적 사실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가보다.

다만 일본 사람들이 우리와는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우리가 즐기는 조기와 명태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았고, 일본 사람들이 즐기는 도미나 붕장어 같은 생선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제는 이 경계도 다 허물어졌지만 아직도 일본 사람들이 명태나 조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그나마 우리가 이것들을 비교적 싸게 먹을 수 있는 이유다.

고깃배가 바뀌고 어망이 바뀌고 음파 탐지기 같은 새로운 장비들이 등장하면서 잡을 수 있는 물고기도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잡지 못하던 멸치 떼를 쫓아 잡고 배에서 직접 쪄서 말리기도 하고, 꽁치나 고등어는 잡아서 아예 배에서 통조림을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연안에서 물고기를 잡는 데서 그치지 않고 큰 배로 먼 바다에 나가 원양 어업을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고기인 참치는 몸집이 크고 살이 실해서 참 물고기라는 뜻으로 '참치'라 했다지만 예전의 관점으로 보면 '참어' 또는 '진어'라 해야 맞지 않나 싶다.

광어는 광어로되 광어가 아니다

요즘은 생선 하면 으레 구이나 조림보다는 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기를 회로 먹은 것은 우리의 오랜 전통이지만, 싱싱한 물고기를 접할 수 있는 곳에서만 회를 즐길 수 있으니 실제로 바닷고기를 회로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내륙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바닷고기는 대체로 말린 것이나 지독히도 짜게 염장한 것뿐이고, 회라 하면 냇가에서 잡은 민물고기나 육회를 즐길 뿐이었다.

날것을 좋아하는 풍습 탓에 민물고기를 날로 먹어 1970년대까지는 디스토마 중독이 심했을 정도다. 그때만 하더라도 서울에서조차 생선을 회로 먹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고속도로의 개통과 운송 수단이 발달한 1980년대부터는 번화가에 일본식으로 회를 파는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반일 감정이 여전히 심할 때여서 버젓하게 '일본식'이라 표기하지는 못했지만 일본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달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살아 있는 물고기를 직접 현지에서 해수 탱크에 담아 운송하는 시스템이 발달한 뒤로는 전국적으로 '일식'과 횟집들이 번창하기 시작한다. 그 뒤로는 '스시'를 파는 집들도 우후죽순처럼 많이 생겼다.

지금은 전국 어디를 가나 회 한 접시 먹기 어렵지 않다. 이제는 잡힌 고기만으로는 모자라 바다에서 양식한 생선들을 먹고 있다. 아예 '바다 목장'이라 이름을 붙인 대규모 양식장들이 들어서고 참치까지 양식에 성공했다고 한다. '자연산'이 아니면 그 가격이 몹시 낮으니, 광어는 광어로되 예전과는 또 다른 광어회를 우리 입에 넣는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