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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알렌의 진짜 학생은 누구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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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중원> 알렌의 진짜 학생은 누구였나?

[근대 의료의 풍경·17] 제중원 학당 ②

제중원 학당의 개교 전후의 상황을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자. 알렌과 조선 정부 모두 학당에 커다란 의욕과 기대를 가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자신감도 느껴진다.

"정부 학교(대학)가 개교할 때가 되자, 정부는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다른 일에 시간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외아문은 경쟁 시험으로 생도들을 뽑으며, 그들에게 재학 기간 동안 저녁을 제공하고, 졸업하면 일반 의사(관리) 자격을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생도)들은 전적으로 공부를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With the Government school (college) about to open, in which the Government is displaying great interest. I won't have time for other work. The foreign office have promised to appoint the scholars by competitive examination and give them their supper during the school period, making them General physicians (Officers) on graduation. They will also be compelled to stay their full time)." (알렌이 1886년 2월 1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무엇보다 중요한 대목은 졸업생들에게 의사 자격을 주고 정부 관리로 채용하겠다는 정부(외아문)의 방침이다. 이러한 방침은 아래와 같은 우두 의사에 대한 조치를 보아 공허한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 우두 의사에게 주는 "졸업장"과 "본관차첩" 서식.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근대 의학 교육이 시작되었음과 면허 제도의 탄생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몇 해 전부터 지석영 등 민간인과 지방 정부에 의해 실시되었던 근대 의학 교육이 이제 중앙 정부에 의한 것으로 확대,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을 담당한 우두교수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의학 교육자인 셈이다. ⓒ프레시안
조선 정부는 1885년 가을부터 충청도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각 도에 우두국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우두 접종을 실시하는 사업을 벌여나갔다. 이를 위해 지석영 등 우두교수관(牛痘敎授官)을 파견하여 우두 의사를 양성했으며, 소정의 교육을 받은 사람에게는 졸업장과 면허증 격인 "본관차첩(本官差帖)"을 주었다. 이러한 우두 사업을 총괄한 부서도 외아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알렌이 편지를 보낸 2월 1일, <한성주보>에는 오류가 적지 않은 제중원 소개 기사와 함께 10개월 전 <제중원 규칙>의 초안 격으로 존재했던 '공립의원 규칙'이 게재되었다(제10회). 그 가운데 생도에 관한 조항은 다음과 같다. "생도 약간 명이 매일 학업하는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고 휴일 외에는 마음대로 놀 수 없으며 학업에 정통하고 남달리 재능이 뛰어나 중망을 얻은 자는 공천하여 표양한다." 그저 엉뚱한 오보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언급은 곧 개교할 제중원 학당의 운영과 생도들의 의무에 관한 <한성주보> 기사 작성자의 기대가 담긴 것인지도 모른다.

▲ 1889년(기축년) 10월 나광표에게 수여된 우두 의사 졸업장. 졸업장에도 "특허"를 부여한다는 구절이 적혀 있다. ⓒ프레시안
알렌에 따르면, 제중원 학당이 사용할 대지와 건물은 다음과 같이 국왕의 명령으로 마련되었다. 제중원 바로 북쪽으로 붙어 있는 집 한 채가 그것이다.

"백성들을 위한 의료 사업에 항상 자비롭고 적극적이신 국왕 전하는 즉시 명령을 내려, 병원에 바로 붙은 가옥을 매입하고 거기에 교사(校舍)를 꾸미도록 하여 주셨다(His Majesty, ever gracious and kindly disposed to the medical work for his people, at once caused orders to be issued for the purchase of a compound of buildings adjoining the hospital and the fitting up of the same for a school-house)."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5쪽)

외국인은 제중원에 부속된 이 학교(교육 부서)를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불렀는데, 이렇게 여러 이름이 있는 것은 영문 명칭이 특별히 정해진 것이 없어 자의적으로 불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Government School, School of Medicine, School Department, Medical and Scientific School, Government Medical School, Hospital School, Medicoscientific School, Royal Korean Medical College.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제중원 도면. 아래쪽(남쪽) 파란선 부분이 제중원이고, 위쪽(북쪽) 빨간선 부분이 제중원 학당이다. 학당 건물을 구입하여 교사로 단장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제중원의 경우를 보아 단장이 끝난 뒤 곧 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프레시안
또 당시 일본의 <아사노신문(朝野新聞)> 1886년 7월 29일자에는 '제중원 의학당'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서양인들이 사용한 명칭을 나름대로 번역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곳이 정부 기관의 부서라는 점에서 정부의 공식 문서에 나오는 "제중원 학당"으로 부르는 편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5쪽)에는 다음과 같이 제중원 학당의 운영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제중원 학당은 1886년 3월 29일에 경쟁 시험으로 선발된 16명의 생도로 개교했다. 이들에게 가능한 한 빠르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일부 생도는 영어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어, 우리는 곧 이들이 과학 과목들을 배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외아문의 독판, 협판들과의 논의에서 채택된 학교 규칙에 의해 이 젊은이들은 4개월 동안의 시험 기간을 거친 후 상위 12명을 선발하여 정규 과정에 진급시키고, 하위 4명은 탈락시킬 예정이다. 12명의 생도는 매년 선발할 예정이다.

이들에게는 식사, 숙소, 학비 등을 제공할 것이며, 과정을 끝내면 주사의 직급을 가진 정부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생도들은 이사회의 역할을 하는 외아문 독판, 그리고 학당 교원들의 허락 없이는 중퇴할 수 없다(They will not be allowed to leave except on permission of the President of the Foreign Office, who acts as a board of trustees, and the faculty of the institution).

조선 해군의 첫 군함이 취항하게 되면 우리는 군의관(medical officer) 1명을 그 배로 보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기록을 보면, 1886년 3월 29일 개교 당시 제중원 학당의 생도 수는 16명이었으며, 구체적인 경쟁률과 선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경쟁 시험으로 선발되었다. 또 이 생도들은 정부로부터 식사, 숙소, 학비 등을 제공받는 장학생이었다. 따라서 생도들은 기숙사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도면의 녹색 원이 기숙사를 나타낸다.) 또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주사로 등용된다는 것도 상당한 특혜로 생각된다. 하지만 2월에 언급되었던 "일반 의사(general physician)"라는 표현이 없어졌는데 그 의미는 알 수 없다.

이러한 특혜가 있는 대신 생도들은 외아문 독판과 교원들의 허락 없이는 중퇴할 수 없다는 의무도 지녔다. 시험 기간을 거친 뒤 상위 12명을 선발하여 정규 과정에 진급시키고, 하위 4명은 탈락시킨다는 것은 면학을 위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학당 운영의 최고기구로 여겨지는 이사회의 구성은 조금 불분명하다. 즉 "President of the Foreign Office, who acts as a board of trustees"라고 되어 있어 외아문이 이사회인지, 외아문 독판이 홀로 이사회를 구성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학당 교원은 이사회의 구성원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이 작성되는 시점에서(헤론이 4월 8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고서를 이미 작성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4월 8일 이전으로 생각된다) 생도들은 영어를 배우고 있었고 아직 과학 과목은 공부하지 않은 상태였다. 과학 과목으로 화학 이외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의학에 관한 것은 얼마나 포함되어 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일본 <아사노신문> 1886년 7월 29일자 '조선통보(朝鮮通報)' 난에는 다음과 같이 제중원 학당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의학당을 제중원에 설치하고 영재인 자제 13명을 선발하여 화학, 영문, 의술, 제약 등을 학습시켜 의도(醫道)에 정통하는 것을 기다려 널리 세민(世民)을 구휼할 목적이라 한다. 13명의 성명을 열거하면, 木(李의 오식이다)宜植, 金鎭成, 禹濟翌, 李謙來, 金震聲, 崔奎星, 崔鐘岳, 尹鎬, 李軫鎬, 秦學洵, 尙瀟, 高濟粢, 一人欠. 그리고 교사는 화학 교사 안륜(安綸), 의사 혜론(蕙論), 영어 교사 원덕우특(元德禹特)."

▲ <아사노신문> 1886년 7월 29일자. 기사가 작성된 시점은 6월 14일 이전으로 보인다. ⓒ프레시안

이 기사는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기록과 상당히 흡사하다. 더욱이 "의도에 정통하는 것을 기다려 널리 세민을 구휼"할 것이라는 학당의 목적이 나와 있다. 이 기사가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생도 12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 점이다. 이름이 누락된 1명을 포함하면 13명이 이 기사를 작성한 시점(신문 발간일은 7월 29일이지만 기사 작성일은 알 수 없다)에 학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보고서>의 16명과는 약간 차이가 있는데, 개교한 뒤 이 기사 작성 때까지 3명이 학당을 그만 둔 것일 수 있다.

<일성록>에 의하면 생도 가운데 이의식은 6월 14일(음력 5월 13일)자로 제중원 주사로 임명을 받았다. 이의식의 이력서에는 "제중원에서 의학을 수업하고 졸업"(受業於濟衆院醫學卒業)하여 6월 13일에 주사로 임명된 것으로 적혀 있다. 따라서 이의식을 생도로 보도한 <아사노신문> 기사는 6월 14일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학당의 생도이면서 제중원 주사일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름이 밝혀진 12명을 일부에서 주장하듯이 "1886년 7월말에 본과생으로 결정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근거가 박약하다.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들 12명이 학당 개설 초기에 생도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이 가운데 이의식은 이력서로 보아 생도였던 것이 확실한 것 같다.

나머지 11명은 이력서 등 다른 데에서 제중원 학당과 관련된 기록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겸래, 최종악, 윤호, 이진호, 진학순, 상소 등 이력서가 남아 있는 사람들도 제중원 학당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경쟁 시험을 거쳐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특혜를 받았다면 그러한 경력을 내세울 만한데 누구도 그러하지 않은 것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앞으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이의식의 이력서. 이의식이 제중원 학당을 다녔던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그의 이력서에 적힌 경력은 오히려 제중원 학당의 성격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 입학을 하고 두 달 남짓 만에 졸업을 하고 규칙에 정해진 대로 주사가 되었다면, 제중원 학당의 위상과 성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헤론은 학당 개교 직후인 1886년 4월 8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도들은 의학의 모든 과정을 마치고 관련된 과학 분야를 어느 정도 배우기 위해서 3년에서 5년은 다녀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했는데, 두 달 사이에 방침이 바뀐 것인가? ⓒ프레시안
이의식의 경우도 의아스러운 면이 있다. 즉 이의식은 입학한 지 불과 두 달 보름 만에 졸업을 하고 학당의 규칙에 따라 제중원 주사가 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러한 추론은 가능할 것이다. 이의식이 주사로 임명받은 것은 정부의 공식 기록에 나와 있으므로 확실하지만 "醫學卒業"은 이의식이 자의로 적은 것이라는 해석이다. 즉 이의식은 학당 졸업과 무관하게 제중원의 주사로 임명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일각에서 제중원 학당의 "2기 생도"라고 주장하는 김의환(金宜煥)은 지난 번(제9회)에 언급했듯이 <제중원 규칙> 3항의 학도(學徒), 즉 제중원 조수로 임명받은 것이지 학당과는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여러 기록이 대체로 일치하는 것은 학당의 교사에 관한 부분이다. 학당의 개설 초기부터 알렌, 헤론, 언더우드가 교사로 활동했다. 특히 정부의 문서인 <평안도관초>(음력 1889년 4월 30일자)와 <황해도관초>(음력 1889년 6월 5일자) 등에 "제중원 교사 元杜尤(언더우드)"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제중원 교사"라는 직책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교사가 가르친 과목은 <아사노신문>에는 화학(알렌), 영어(언더우드)라고 되어 있으며, 언더우드 부인은 언더우드가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고 회고하고 있다. 의학 교육과 관련해서는 <아사노신문>에 "화학, 영문, 의술, 제약 등을 학습시켜"라고 되어 있을 뿐 당시 다른 기록에서는 관련된 사항을 찾아볼 수 없다. 후대에 백낙준이 쓴 <한국개신교사>(영문판 1929년, 한글판 1973년)에 알렌과 헤론이 실용 의학을 가르쳤다는 정도의 기록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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