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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왜 <제중원> 학교를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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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왜 <제중원> 학교를 만들었을까?

[근대 의료의 풍경·16] 제중원 학당 ①

근대 서양 의학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과 교육 기능의 중요성, 필요성에 대해서는 국왕과 정부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외아문 협판 묄렌도르프 역시 국왕의 방침에 따라 의학교 설립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알렌의 <병원 설립 제안>에도 "더불어 조선의 생도들이 서양의 의법을 배워 약을 쓰는 방법을 알 수 있고 또 조리하는 절차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且有朝鮮生徒 亦學西洋醫法 能識用藥之法 又覺調理之節矣)"라고 하여 제중원의 교육 기능이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알렌의 제안은 <제중원 규칙>에 잘 반영되어 있다. 제3조와 제4조가 바로 그것이다.

제3조. 학도(學徒·student) 4명을 임명한다.
제4조. 학도들은 의사를 보조한다. 의사의 지도 아래 약을 조제·투약하고 외국인 의사들이 사용하는 기구의 사용법을 익힌다. 학도들은 환자를 간호하며 의사가 지시하는 것을 수행한다.


지난번(제9회)에 언급했듯이, 학도(學徒)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직책을 뜻하지만 그들은 "의사의 지도 아래 약을 조제·투약하고 외국인 의사들이 사용하는 기구의 사용법을 익히는" 일종의 피교육 과정의 조수직이다. 즉, 제중원에 교육 부서를 별도로 설치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학도에게 "조제, 투약, 의료 기구 사용법" 등을 교육하려 했던 것이다.

<제중원 규칙>대로 학도 4명이 항상 갖추어졌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중원 설립 초기부터 학도들이 근대 서양 의술을 배우면서 조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점은 다음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로 여성 환자의 진료를 위해 1885년 8월부터 배치된 기생 의녀(妓生醫女)도 비슷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증례 1은 첫 번째 입원 환자이자 최초의 수술 환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위험한 경우였다. 훈련받지 않은 조수들이 클로로포름 마취를 해야 했으며, 그래서 생긴 나쁜 결과는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Case I was the first hospital patient and the first operation. It was a critical one, since the chloroform had to be administered by the untrained assistants and a bad result would have injured young hospital)."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30~31쪽)

이것은 대퇴골 괴사로 부골절제술(sequestrotomy)을 받은 25세의 남성 환자에 대한 언급이다. 제중원에서의 첫 수술은 제대로 교육과 훈련을 받지 못한 조수들이 마취를 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위의 인용 글만으로 나쁜 결과가 생겼는지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상당히 위험한 경우였음은 익히 알 수 있다.

정확한 수술 날짜는 기록에 없지만 "첫 번째 입원환자이자 최초의 수술환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1885년 4월이었을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개원 초에 이미 2명 이상(assistants라고 표현했으므로)의 조수(학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로 거들 사람이 없어서였기 때문으로 생각되지만, 의사가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마취를 맡긴다는 것은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위험한 경우"라고 언급한 것이 환자에게 위해가 돌아갈 것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새로 세워진 병원에 타격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경악할 일이다.

의사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소양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히포크라테스 이래 시대를 뛰어넘어 의사들의 철칙은 무엇보다도 환자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말라(Do no harm)"는 것이었다. 동서(東西)의 차이가 없는 문제이다. 환자에게 이로운 치료를 하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 스기다(杉田成卿)의 저서 <제생비고(濟生備考)>(1850년)에 소개된 마취 방법. 스기다는 독학으로 5년 뒤에야 에테르로 마취하고 화상 환자를 수술하는 데 성공했다. ⓒ프레시안

알렌의 일기 1885년 12월 1일자의 "이런 사실은 지금 국왕의 통역관 일을 하는 나의 이전 학생(pupil)이 말해 주었다"라는 언급도 학도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또 헤론도 자신이 제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 1885년 6월 "한 조선인 조수는 우리 중 한 사람의 지도하에 약을 준비하기에 충분히 훈련되었다"라고 했으며, 언더우드는 엘린우드에게 보낸 1885년 8월 31일자 편지에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처방을 내릴 수 있는 조선인 학생(student)이 있다"고 했다.

요컨대, 앞에서 보았듯이 알렌의 병원 설립 제안에는 "교육 기능"에 관한 언급이 있을 뿐 "의학교 설립"에 대한 것은 없다. 그리고 조수 역할을 하는 "학도"는 제중원 진료에 참여하며 도제식 교육을 받았고, 의학교와 같은 별도의 교육 기관에서 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초안으로만 존재했던 '공립 의원 규칙'에 "생도 약간 명이 매일 학업하는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고 휴일 외에 마음대로 놀 수 없으며 학업에 정통하고 남달리 재능이 뛰어나 중망을 얻은 자는 공천하여 표양한다"라는 조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 병원 설립 제안에는 없었지만 제중원 설립 준비 과정에서 교육 부서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에 맞지 않아 취소되었다.

그럼에도 "제중원 설립과 함께 의학교 개설을 건의했지만 알렌의 건의 내용에 담긴 의학교 설립은 제중원 개원 1년이 지나도록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일각의 주장과 같이, 지금까지는 대부분 "왜 제중원에 의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예정보다 1년이나 늦어졌을까?" 하는 식으로 질문을 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대체로 "알렌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 바쁘기도 했고, 그보다도 시설과 가르칠 사람이 없었으므로 불가능했다", "제중원의 재정 형편이 어려운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라고 답하곤 했다.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32쪽의 재정 보고. 흔히 제중원의 재정이 1887년 이후에야 안정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재원이 인천, 부산, 원산 등의 세관 수입으로 고정됨으로써 이전처럼 임기응변식으로 조달하지 않아도 되었다는 점에서는 적절한 언급이다. 그렇다고 제중원 비용이 증가한 것은 아니다. 1885~86년의 첫 1년 동안도, 1887년 이후의 연 3000원과 마찬가지로, 3183.87원(달러)이 지출되었다. ⓒ프레시안
그러나 그러한 질문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별도의 교육 부서를 둘 계획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해답으로 얘기하는 사정이 1년 뒤라고 크게 달라진 바도 없다. 알렌과 헤론 두 사람이 환자 진료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제중원 학당에서 교육을 담당한 알렌, 헤론, 언더우드는 이미 1년 전에 조선에 와 있었다. 또 재정 형편이 크게 나아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설 문제는 국왕의 조치로 별로 어렵지 않게 해결되었다.

따라서 "제중원이 기왕에 도제식 교육 기능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별도의 교육 부서를 설치하게 되었을까?"라고 질문하는 편이 오히려 적절할 터이다. 1880년대까지도 미국과 캐나다의 의료인 교육에서 도제식(徒弟式)이 여전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에비슨이 약사가 된 과정이 좋은 예이다), 당시 제중원의 사정을 보면 도제식 교육이 더 현실적으로 보인다. 때문에 별도로 의학교를 설립하자는 알렌의 구상은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더욱이 알렌은 1881년 미국 오하이오 주의 웨슬리안 대학교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은 뒤 1년 동안 의학을 공부하고 1883년 3월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를 졸업했을 뿐, 연구와 교육 경력이 없으며 학교를 설립하거나 운영한 경험도 물론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임상 경험과 훈련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1887년 1월 3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알렌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다.

"박사님이 나중에 저를 다시 조선으로 파송하게 된다면, 저는 외과 분야에서 졸업 후 과정을 밟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 저는 조선에 오기 전에 경험이 전혀 없었고, 순전히 독학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이 제중원과 같이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는 병원에서 시술해야 할 큰 수술을 다룰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을 회피하고 있습니다(In case you wish me return to Korea after a time, it would be very desirable for me to take a postgradute course in surgery. (…) Yet I had no experience before coming, am altogether self-taught and consequently I have not confidence enough to tackle heavy work that should be done at an institution of the national influence of this Hospital. This work is therefore turned away, and it should not be so)."

헤론은 미국에서 4년간 교사(중등학교) 생활을 했지만 제중원 학당 설립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학당 개설 직전에야 알렌에게서 그러한 사실을 듣고 학당의 교육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면 왜 의학교 설립을 추진했는지 알렌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알렌은 병원의 영향력과 기회를 증대시킬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교육 부서 설치를 제안하고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것이 원래 의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알렌이 <병원 설립 제안>에서 의학교 설치를 제의했던 것은 아니다.

"병원 설립 제안에서 언급했듯이, 병원에 의학교를 설치하는 것이 원래의 의도였다. 물론 이 일이 당장 시작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설립한 지 1년이 다 되어 갈 즈음 병원이 매우 성공적이었으므로, 우리는 병원의 영향력과 기회를 증대시킬 방법과 비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교육 부서를 개설하는 것으로 보였다(It was the original intention, as expressed in the proposal for founding the institution, to include a school of medicine under the hospital management. Of course this could not be begun at once, but as the institution very successfully neared the close of the first year of its existence, we began to think of ways and means for enlarging its influence and opportunities. The "way" which best recommended itself seemed to be the opening of the school department)."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 5쪽)

알렌에 따르면, 교육 기관(부서)의 설립 계획은 다음과 같이 1885년 12월 이전에 시작되었다. 12월 1일자에 이런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상은 그보다 얼마간 앞섰을 것이다.

"조선 대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을 세웠다. (대리공사) 폴크는 처음에는 그 계획에 대단히 호의적이었지만 미국으로부터 교사들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지금은 전체 계획에 반대하고 있다(I have had a scheme for the founding of a Corean University. Mr. Foulk was very much in favor of it at first but objects to the full plan now as the teachers from America are not here)." (1885년 12월 1일자 알렌의 일기)

언더우드에 의하면, 알렌의 대학교 설립 계획은 어느 조선인이 언더우드에게 동문학(同文學)에서 영어 과목을 맡으라고 제안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언더우드에게서 이러한 얘기를 들은 알렌은 영어뿐만 아니라 여러 과목을 가르치는 대학교(근대식 중등 교육 과정이 없는 상태에서 대학교가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과 다른 것이다) 설립을 계획했다고 한다.

폴크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한 교사들은 다음 해에 조선 정부에 의해 설립될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교사로 일할 사람들일 것이다. 폴크로서는 교사로서의 자격과 경험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도착하지 않은 가운데 대학교를 개설한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리라고 생각된다.

민영익은 1883년 국왕의 특사(보빙사·報聘使) 자격으로 미국에 다녀온 뒤 영어를 본격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육 기관 설립 계획을 마련하여 1884년에 국왕으로부터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갑신정변 등으로 계속 미루어지다가 1886년 9월 23일, G W 길모어, D A 벙커, H B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3명이 초청되어 동문학을 대체하는 육영공원이 문을 열었다. 육영공원에서는 젊은 관료들과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영어 외에도 수학, 지리, 정치, 경제 등을 가르쳤다.

대학교 설립에 폴크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지만 알렌은 다음과 같이 국왕의 지원을 받아 학교 설립을 계속 추진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학교(school)와 12월 1일자의 대학교(University)가 같은 것인지, 구상이 변경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물론 폴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했다"라는 표현에서 알렌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으며, 그러한 자신감은 국왕의 신임과 지원에서 비롯되었던 것일 터이다. 또한 여기에 언급된 250달러는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학교 도구(school apparatus) 구입비 250달러"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국왕은 나의 학교 설치 계획을 간파하고 폴크에게 이를 적극 추진하라고 요청했다. 물론 폴크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들(조선 정부)은 화학, 철학(philosophical), 해부학 도구 구입비로 250달러를 지급했다(The king got wind of my school scheme and asked Foulk to push it through, of course he had to. They gave $ 250.00 for a chemical, philosophical and anatomical outfit)." (1885년 12월 20일자 알렌의 일기)

이후 학당 설립이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은 1886년 2월 11일, 외아문이 8도 감영에 내린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공문에 "생도가 아직도 많이 갖추어지지 못했다"라고 한 것은 거꾸로 이미 그 전에 생도 선발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 국왕이 학교 설립에 대해 재가를 하고 두 달도 채 안 되어 "제중원 학당"이라는 명칭이 정해지고 생도 선발이 상당 정도 진행된 것이다. 여기서 외아문 학당은 통역관 양성소인 동문학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외아문에서 관할했던 교육 기관은 동문학뿐이기 때문이다.

"본아문(외아문) 학당과 제중원 학당의 생도가 아직도 많이 갖추어지지 못했다. 지벌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총명, 영오, 근실한 14~5세에서 17~8세까지 3~4명을 가려 뽑아서 빨리 올려 보내 입학할 수 있도록 하라(本衙門學堂及濟衆院學堂生徒 尙多未備 無論地閥 必擇聰明潁悟勤實之幼童 自十四五歲至十七八歲 揀取三四人 不日起送入學事)." (<통서일기> 1886년 2월 11일[음력 1월 8일]자)

<통서일기>와 같은 내용을 담은 <구도사군관초(九道四郡關抄)> 2월 8일(음력 1월 5일)자에는 "아침저녁은 학당이 제공할 것이며, 이번 그믐 안, 또는 내달 초에 한성에 도착하여 수업을 받도록 하며, 늦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라는 언급이 덧붙여져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886년 3월 29일 제중원 학당이 개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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