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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없인 못 듣는 '도토리'에 얽힌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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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없인 못 듣는 '도토리'에 얽힌 사연은?

[판다곰의 음식 여행·10] 헐벗었던 날들의 기억

요즘도 '개떡'이라는 게 있다. 보릿가루에 쑥을 버무려 넣고 쪄낸 떡인데 모양이 사나워 개떡이라 부르는 것이다. 보릿고개가 찾아올 무렵인 봄철에 덜 익은 보리 이삭을 따다가 그 즈음에 돋아난 쑥과 버무려 먹는 떡이 개떡이다. 헐벗었던 날들의 기억이지만 아직도 아련한 향수 때문인지, 먹을거리가 넉넉해진 요즈음도 개떡은 사라지지 않았다. 늘 고단했던 백성의 봄철이 그런 개떡의 기억으로 남았는지도 모른다.

호환, 마마, 전쟁보다 무서운 기근

평소에도 봄철만 되면 춘궁기로 고달팠던 살림에 홍수나 가뭄까지 찾아와 흉년이 들었다면 더욱 처절했다. 댐과 보를 쌓아 물을 다스리는 요즘도 홍수와 가뭄이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물론 예전에도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가두고 온갖 신경을 다 썼지만 그래도 기계의 힘을 빌리지 못한 옛날에는 가뭄과 홍수의 피해가 요즘보다 훨씬 더 심했다. 더욱이 농사가 나라 살림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던 시절이니 가뭄과 홍수로 찾아오는 기근만큼이나 괴로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요즘도 예측하기 어려운 홍수와 가뭄은 예전에는 이를 겪는 백성에게도, 또 이를 완화해야 할 위정자에게도 무한히 괴로운 일이었다. 게다가 풍년도 잇달아 오지만 기근도 몇 해를 두고 지속되는 경우가 많다. 자연계의 동물들에게도 먹이는 종족 유지에 크나큰 변수가 된다. 먹이가 늘어나면 개체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먹이가 줄어들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며 그 수가 줄어든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서 기근이 들면 인구가 감소하고 더욱이 영양실조 때문에 몸의 저항력이 약해져 질병에 전염병까지 창궐하고 국력이 눈에 띄게 약화된다. 그렇기에 통치자로서도 기근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한 임무였다. 그래서 풍년에는 구휼미를 비축하고 기근이 들면 이를 풀어 굶어 죽는 일을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구휼미를 비축하는 일이나 푸는 일도 재물과 관련된 일이라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설사 제대로 행한다 해도 이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구황절요>나 <구황촬요> 같은 책을 펴내 기근이 들었을 때 백성이 연명하는 방법을 가르치기까지 했다.

기근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특히 조선 중기인 1620년에서 1720년 사이는 세계적인 소빙하기였기에 유난히 기근이 많이 발생했다. 소빙하기에는 지구 전체가 냉해로 극심한 재해를 겪게 된다. 아마도 지구에 유성체들이 떨어진 여파로 지구가 먼지에 싸이게 되어 냉해가 발생한 듯하다. 우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기근이 발생했고 백성은 자주 초근목피를 찾아 산과 들을 헤매게 되었다.

기근이 가져온 음식 재료의 확대

농경 사회의 기본적인 음식은 바로 곡식이다. 인체가 소모하는 거의 모든 열량을 이 곡식이 책임진다. 육류의 섭취가 얼마 되지 않는 상황에서 곡식의 부재는 인체에 심각한 상황을 불러온다. 흉년이라 하더라도 산과 들에 풀과 나무가 자라긴 하지만 이들을 가지고 곡식이 주는 탄수화물을 보충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풀잎, 나뭇잎, 나무껍질을 먹고 허기를 면할 수야 있겠지만 여기에는 몸에 필요한 열량을 제공하는 탄수화물이 거의 없다. 대부분은 사람 몸이 소화할 수 없는 섬유질이고 약간의 비타민과 무기염류가 있을 뿐이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탄수화물이지, 비타민이나 무기염류는 아니다.

그래서 기근이 시작된 초기에는 부족한 곡식을 채울 요량으로 풀과 나뭇잎, 나무껍질과 뿌리를 이용해 양을 불렸다. 곡식을 조금 넣고 다른 재료들을 넣어 물을 붓고 죽을 끓이는 방법으로 음식의 양을 늘려 허기를 면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끼니를 때웠다 할지라도 몸에 필요한 열량이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몸은 여위고 과다한 섬유질의 섭취로 위와 장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

느릅나무껍질이 이런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구황식물 중에서도 뺄 수 없는 지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그나마 조금 있던 양식이 다 떨어진 다음에는 이런 편법도 통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산천을 누비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매게 되지만, 먹지 못해 기운도 없기에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구황식물로 쓰이던 것을 보면 솔잎, 송진, 느릅나무껍질, 도토리, 칡뿌리, 메밀꽃, 콩잎, 콩깍지, 토란, 마, 삽주뿌리, 메뿌리, 둥굴레, 천문동, 백복령, 백합 알뿌리, 연근, 마름, 순무, 새삼씨, 참소리쟁이, 고욤, 개암, 들깨, 팽나무 잎, 쑥 등 온갖 식물의 잎, 열매, 뿌리가 포함되어 있다. 동물도 잡히는 대로 잡아먹었겠지만 이를 잡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또 구황식품에는 벌집과 같은 것도 들어 있다. 벌집에 영양가가 있으니 이것도 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구황식품을 보면 먹을 것이 풍부해진 요즘도 먹는 것들이 꽤 여러 가지 포함되어 있다. 도토리나 칡뿌리는 여전히 인기가 있고 연근이나 순무, 토란, 마, 들깨, 쑥과 같은 것도 아주 친근한 식재료이며 둥굴레는 근래에 차로 개발해 많이 마시고 있다. 이런 사실을 보면 구황식물을 통해 음식의 재료들을 무한히 확대해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가 먹는 그 많은 산나물도 기근을 헤쳐 나가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근은 그것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괴롭고 심각한 문제였지만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확대해나간 긍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다.

도토리묵에 담긴 배고픔의 사연

도토리는 그 많은 구황음식 중에서도 아주 독보적이다. 다른 것들은 풍부한 열량을 주지 못하지만 도토리에는 탄수화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토리는 참나뭇과에 속하는 상수리나무, 신갈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 등의 열매로 이 나무들은 우리나라 숲의 주력으로 온대지방에 흔하다.

도토리에는 탄수화물인 녹말이 많이 들어 있지만, 다른 짐승들이 자신의 씨앗을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타닌이 포함되어 있어 맛이 무척 쓰다. 이 도토리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쓴맛에 적응한 다람쥐나 멧돼지 같은 짐승들이나 곤충들밖에는 없다. 하지만 타닌이 물에 녹는 수용성인지라 도토리를 갈아 물에 여러 번 침전시키면 그 쓴맛을 어느 정도 가시게 할 수 있다. 무척 고단한 작업이지만 기근을 이기는 데에 이것보다 더 좋은 열매는 찾기 어렵다.

다만 열매를 맺는 시기가 가을이라 기근이 가장 심할 때인 봄철과 여름철에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 큰 흠이지만, 가을 산에 가서 품을 들이면 엄청난 양을 수확할 수 있으니 이듬해의 기근을 대비해서라도 가을에는 이 도토리의 수확에 공을 들였을 것이고 도토리를 말려 가루를 내고 쓴맛을 제거하여 묵 가루를 만들어두었을 것이다. 도토리묵은 차츰 구황식품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음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여하튼 반복되는 기근은 인구 증가와 국력 신장에 큰 장애물이었다. 구휼 제도를 정비하고 기근의 대처법을 반포하는 것만으로는,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자연재해로 말미암은 기근의 피해를 조금 줄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도저히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했다. 많은 이의 배고픔을 가시게 해줄 진정한 구황작물의 등장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이 땅에 도착한 것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닿고 나서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프레시안(손문상)

구황작물 삼총사의 등장

콜럼버스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오랜 기간 떨어져 있던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다. 신대륙에는 놀라운 식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숨어 있던 식물들이 하나둘씩 구대륙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탐험가의 멋을 표현해주는 담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들불처럼 구대륙을 휩쓸었지만 먹는 작물들은 그렇게 빨리 퍼진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들 작물 가운데에는 구대륙의 인구를 혁신적으로 증가시킨 세 가지 작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옥수수, 감자와 고구마가 바로 그것이다.

밀이나 쌀, 보리 같은 구대륙의 작물은 생육 기간이 길다. 씨를 심어서 곡식을 거둘 때까지 보통 6개월은 지나야 한다. 아무리 조숙종이라 하더라도 다섯 달은 걸린다. 그렇기에 열대지방을 제외하면 1년에 한 번 농사를 짓는 것이 고작이다. 더군다나 생육 조건이 까다로워 일정 기간 햇빛이 필요하고 너무 추운 고산지방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안개가 많이 끼거나 기온이 낮은 지역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초지를 가꾸어 가축을 기르는 수밖에 없었다. 한정된 곡물의 생산, 기근으로 인한 식량 부족, 전염병 등은 오랫동안 인구의 증가를 막아온 장치였다. 그렇지만 이 신대륙의 작물들은 달랐다. 가장 뛰어난 생산력을 보인 것은 감자다.

감자는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유럽으로 전래되었지만 식량으로서 효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거의 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였다. 곡물 농사가 쉽지 않은 아일랜드는 거의 주식으로 삼다시피 감자가 확산되었고, 영국과 독일, 북유럽, 러시아와 같이 기후가 좋지 않은 지역에서도 주곡의 위치를 넘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825년 무렵 유라시아 대륙을 건너 중국을 거쳐 들어왔다. 1862년 김창한이 쓴 <원저보>에는, 1832년 영국의 상선 로드엠허스트 호가 태안반도에서 약 1개월가량 체류하면서 네덜란드의 선교사가 감자 종자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재배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감자는 19세기 후반 무렵에나 퍼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씨감자를 4월 초에 심으면 하지인 6월 말에는 벌써 수확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하지에 일찍 수확하는 감자를 하지감자라 부른다. 그때는 논에 모를 낸 벼들이 이제 조금 자랐을 시점이다. 석 달이 미처 못 되는 시간에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햇빛이 조금 모자라도, 기온이 낮아도 감자는 잘 자란다. 이렇게 빨리 탄수화물 덩어리를 제공하는 작물은 없다. 감자의 또 다른 장점은 조리하는 데에 곡식보다 시간이 덜 걸려 땔감을 적게 소모한다는 것이다.

수확이 감자보다 늦기는 하지만 옥수수도 한여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굵은 알곡을 인간에게 선사한다. 고구마도 감자보다는 생장 기간이 긴데, 이 셋 중에서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작물이다. 감자와 옥수수가 중국을 우회해서 늦게 전해졌다면, 고구마는 고추처럼 일본을 통해 들어왔기에 조금 더 일찍 들어올 수 있었다.

1763년에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보고 구황작물로서의 가능성을 본 것 같다. 그래서 이를 들여와 심었지만 재배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뒤로 이광려가 동래에 가서 고구마를 얻어다 기르며 고구마 재배와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서유구는 <종저보>라는 책을 지어 고구마 보급에 나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구마가 전국에 퍼져 제대로 구황작물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직은 그렇게 생산량이 많지 않았고 동래 지방을 중심으로 넓은 지역에서 재배된 것이 아니기에 그저 특별한 먹을거리에 머물렀던 것 같다.

옥수수의 재배는 18세기 초엽부터 명나라로부터 전해진 것 같지만 처음 문헌에 나오는 기록은 1766년의 <증보산림경제>에 그 이름이 보인다. 옥수수라는 이름은 전체 모습이 수수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알갱이가 옥과 같다고 해서 붙여졌지만 '강냉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강냉이는 원래 중국 강남에서 왔다는 의미의 '강남이'가 변해서 된 말이다. 옥수수는 벼 같은 곡물에 비해 생육 기간이 훨씬 짧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방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 옥수수는 이들 지방을 중심으로 차츰 그 세력권을 넓히게 된다.

구황작물이 퍼진 것은 일제의 수탈 때문

이 세 가지 구황작물이 18, 19세기에 이 땅에 상륙한 것은 틀림없으나 곧바로 활발하게 재배된 것은 아니었다. 재배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니와 새로운 작물이 전국적으로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어쨌거나 초창기에는 고구마가 감자보다 훨씬 강세였다. 1911년에 전국 감자 생산량은 230만 관에 조금 못 미치지만, 고구마는 1230만 관이나 생산한다. 그러던 것이 1940년이면 감자 1억 7800만 관, 고구마 8790만 관으로 상황이 역전되고 만다. 1940년 무렵 옥수수는 전체 곡식 가운데 비중이 0.03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보면, 구황식물로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은 가장 늦게 전래된 감자였으며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와서야 비로소 급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19세기 말까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온 구황작물이 큰 구실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감자와 고구마가 전국적으로 보급된 까닭은 일제의 쌀 욕심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 모자란 쌀을 반출해가면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대체 식량을 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 35년을 겪으면서 고구마, 감자, 옥수수가 전국적으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들이 떠나간 뒤에도 이 작물들은 우리 농토에 그대로 남았다. 그리고 이들 덕분에 헐벗고 가난한 시기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인구가 급증한 것은 이들 덕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헐벗은 날들의 기억을 되새기며

기근에 곡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에 필요한 또 하나의 필수품은 염분이다. 아무리 초근목피를 먹어도 소금이 없으면 몸에 필요한 전해질을 보충할 수 없어 대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소금의 대부분을 김치나 장으로 해결한다. 김치를 담글 여유는 없어도 장 담그는 것은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그렇지만 기근에는 콩으로 메주를 띄울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증보산림경제>는 더덕, 도라지, 콩잎, 느릅나무껍질을 이용해 장을 담글 것을 주문하고 있다. 약간의 탄수화물과 소금기라도 섭취해 죽음을 모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 아닐 수 없다.

기근을 겪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것이라도 먹으려는 노력이 애처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노력이 먹을거리의 저변을 넓히는 방편도 되었다. 아마도 그 많은 근채와 나물은 그렇게 개발되었을 것이다. 먹을 것이 너무도 풍족한 요즘이지만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면서 되새겨봐야 할 헐벗은 날들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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