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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한미 FTA', 삼성의 프로젝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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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무현의 '한미 FTA', 삼성의 프로젝트였다"

[인터뷰]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이 말하는 '노무현과 삼성'

김용철 변호사와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닮은 점이 있다. 이들은 각각 경제와 정치 분야 최고 권력 기관에서 일했었다. 그리고 둘 다 과거 몸 담았던 직장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들이 옛 동료와의 친분과 맞바꾼 것은 국민의 알 권리였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삼성 비리에 대해, 그리고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됐다.

경제와 정치 사이의 거리가 멀다면, 이런 닮은 점은 그저 가벼운 이야기거리에 불과하다. 그러나 경제와 정치 사이의 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깝다는 점을 일깨워준 것 역시 이들의 증언이었다. 김 변호사는 최근 출간한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펴냄)에서 삼성과 노무현 정부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다. 정 전 비서관은 한미 FTA가 그저 통상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관료와 재벌에 포위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던진 정치적 승부수였다는 점을 여러 번 이야기했었다. 정 전 비서관이 <삼성을 생각한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은 그래서 당연한 일이다.

정 전 비서관은 "(자신의) 체험에 비춰볼 때 <삼성을 생각한다>에 담긴 내용은 거의 전부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만 이 책에서 '참여정부'라는 명칭마저 삼성 구조본 회의에서 정한 것처럼 묘사된 부분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했다.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그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프레시안(김봉규)

"'삼성-재경부-조·중·동' 동맹이 청와대 흔들었다"

프레시안 :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온 뒤, 노무현 정부와 삼성의 관계가 화제가 됐다. 예컨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에서 일했던 윤석규 씨(전 열린우리당 원내기획실장)는 <프레시안>에 보낸 글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작성한 국정운영백서와 별도로 삼성경제연구소가 국정운영백서를 작성해 노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정태인 : 노 전 대통령 당선 직후 꾸려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나도 참가했다. 그런데 어느 날 삼성경제연구소가 인수위와 똑같은 방식으로 분과와 주제를 구성해서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때는 대단치 않게 생각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삼성경제연구소 보고서라는 게 수준이 대단치 않다. 내용이 풍부하지도 않고, 깊이도 얕다. 다만 보고서의 레이아웃이 깔끔하고, 내용이 이해하기 쉽다는 점은 장점이다.

삼성 측에 보고서 작성을 맡긴 노 전 대통령의 의도는 아마도 '균형 맞추기'였던 듯하다. 예컨대 각료 인선에서도 청와대에 개혁 성향인 이정우 경북대 교수를 배치하고, 내각에는 김진표 장관을 앉히는 식이었다. 금융감독위원회도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에 성향이 서로 다른 사람을 배치했다. 이정재 위원장과 이동걸 부위원장이다. 이런 구조에서 각각 다른 목소리가 나오면, 대통령이 취합해서 종합적인 판단을 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취임 3년차인 2005년에 접어들면서, 개혁 성향 인사들은 대부분 물러나고 그 자리가 모두 관료 출신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되면서 균형이 깨졌다. 보수 기조가 뚜렷해진 것이다.

청와대에서 일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다. 하루에도 여러 건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물론 자기가 전공한 영역에 대해서는 맥락을 파악해서 균형있는 판단을 하는 게 가능하다. 문제는 워낙 다양한 영역을 다루다 보니, 전공이 아닌 영역에 대해서도 판단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이런 경우에는 올라온 보고서에만 의존해서 판단해야 하는데, 이게 무척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외부에서 다른 방향의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주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보고서를 작성하는 관료가 사실상 정책 방향을 주도하게 된다.

문제는 관료, 특히 경제 관료가 재벌, 그 중에서도 삼성과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점이다. 나는 이런 체제를 '삼성-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조·중·동' 삼각 동맹이라고 부른다. 인수위 초기 나에 대해 비판적인 기사가 잇따라 나온 적이 있다. 각기 다른 매체에서 내는 기사인데, 내용도 비슷하고 사진도 똑같은 게 신기해서 알아봤더니, 재경부에서 언론사 경제부장들을 소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경제 부처와 재벌의 관계는 더 긴밀하다. 정부가 재벌보다 위에 있던 관계가 바뀐 게 1988년쯤이다. 당시 정부가 금리를 올리려 했는데, 재벌들이 반기를 들었다. 결국 양쪽이 타협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다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 선언이 나오면서, 경제 부처와 재벌은 사실상 한 몸이 됐다. 재벌의 논리를 경제 부처 관료들이 내면에 새기게 된 것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도입하면서 이런 현상은 정부 전체로 확대됐다. 그러니 청와대로 올라오는 보고서가 재벌 편향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신이 깊이 알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데, 이런 보고서에만 의존한다면 결론은 뻔하다.

"청와대 있으니, 삼성 사장이 만나자고 했다"

▲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프레시안(김봉규)
프레시안
: 신자유주의를 신념으로 여기는 관료들이 자발적으로 재벌 편을 들었다는 말로 들린다. 재벌, 특히 삼성 편향 정책이 오로지 자발적 동의에 의해서만 만들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윤석규 씨가 언급한 이광재 의원의 경우, 삼성 관계자들과 가까운 관계였다고 알려져 있다.

정태인 : 당연히, 다른 재벌에 비해 더욱 두드러졌던 '삼성의 관리'가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청와대에서 일할 당시, 나도 삼성 사장과 두 번 만났다. 청와대에 일한다면, 당연히 삼성의 관리 대상이다.

삼성 측에서 먼저 만나자고 했는데, 아는 기자와 동석했고 밥값도 내가 냈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산업 클러스터에 대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설령 삼성이 망해도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다"고 이야기했더니, 삼성 사장이 몹시 불편해했다. 그러고는 만난 적이 없다.

이광재 의원이 삼성과 친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의원이 '국민소득 이만 달러론'을 들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게 대표적인 삼성의 작품이었다. 이 의원은 '삼성, 중앙일보 예외론'과 같은 논리를 펴기도 했다. 재벌과 조·중·동은 개혁 대상이지만, 그 가운데서 삼성과 중앙일보는 예외라는 논리다. 이 의원과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던 인물 가운데, 권오규 전 경제부총리, 정만호 전 청와대 의전 비서관이 대표적이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명이 모두 강원도 출신이어서, '강원도의 힘'이라는 농담을 자주 했었다.

정권 핵심에 있던 이들이 삼성과 가깝게 지냈던 이유는 다양하다. 국회의원이 되려는 야심 때문인 경우도 있었고, 복잡한 정책에 대한 판단 능력이 부족해서 삼성으로부터 '머리'를 빌려야 했기 때문인 경우도 있었다.

"삼성家 숙원 사업 '금산 분리 완화', 청와대 정책실 모르게 추진됐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권 핵심 인사들과 삼성의 관계 때문인지, 삼성에 비판적인 이들이 대부분 정권 핵심에서 밀려났다.

정태인 : 앞서 언급했던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이동걸 전 금융감독위 부위원장이 대표적이다. 삼성 그룹 오너 일가의 최대 관심사는 경영권 승계다. 그런데 삼성생명 상장과 금산 분리 조항이 걸림돌이었다. 이 전 부위원장은 삼성생명 상장 문제를 놓고 삼성과 대립하는 주장을 하다 밀려났다는 게 정설이다.

이 전 실장은 금산 분리 문제 때문에 사표를 냈다. 국무회의에 금산법 개정안 관련 안건이 올라왔는데, 이 전 실장에게 통보되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정책을 총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 모르게 민감한 경제 사안이 논의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안건이 상정되기 전날 밤, 이 전 실장이 다른 경로로 알게 됐다. 이 전 실장은 새벽에 청와대를 찾아가서 대통령에게 금산법 개정안의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청와대 참모가 이 전 실장에게 "이 시간에 찾아가면 대통령께서 화내실 것"이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금산법 개정안 관련 안건은 결국 부결됐다. 그리고 이 전 실장은 청와대를 떠났다. 이게 2005년 7월의 일이다. 이로써 노무현 정권 핵심부에서 삼성의 영향력에 맞설 사람이 없게 됐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이듬해 초부터 한미 FTA 추진을 강하게 밀어 붙였다.
▲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프레시안(김봉규)

"한미 FTA, 삼성 프로젝트였다고 본다"

프레시안 : 노무현 정부 시절 통상교섭본부장을 맡아서 한미 FTA 체결 추진 작업을 지휘했던 김현종 변호사가 현 정부 출범 이후 삼성전자 법무팀 사장으로 옮겼다. 이를 놓고 한미 FTA의 본질을 보여줬다는 설명이 나왔었다. 기본적으로 재벌의 이익을 위해 진행된 협상이었다는 게다.

정태인 : 한미 FTA 역시 삼성의 프로젝트였다고 본다. 물론, 김현종 변호사가 삼성의 조종을 받아서 움직였다는 뜻은 아니다. 김 변호사는 신념을 실천했을 뿐이다. 한미 FTA에 관한 첫 청와대 브리핑에서 그는 "낡은 일본식 제도를 버리고 합리적인 미국식 제도를 도입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게 그의 소신이라고 본다.

당시 여권 안에서 한미 FTA에 관한 첫 논의가 이뤄진 것은 이광재 의원의 세미나 모임이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그렇다. 2004년 11월께, 삼성경제연구소 측이 이 모임에서 한미 FTA에 대해 발제를 했다. 물론, 이보다 먼저 한미 FTA를 진지하게 검토했던 여권 인사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삼성 측이 한미 FTA를 원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프레시안: 삼성이 구체적으로 한미 FTA에 대해 어떤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보나.

정태인 : 핵심은 서비스 산업이다. 흔히 삼성전자의 수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주력 품목인 반도체는 어차피 관세가 낮다. 다른 품목 역시 생산 기지가 해외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FTA로 인한 긍정적인 효과를 크게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서비스 부문은 다르다. 예컨대 국민건강보험 체제가 무너지고, 의료 부문이 민영화됐을 때 가장 큰 이익을 얻을 곳이 어디겠는가. 삼성생명이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래칫(역진 방지 장치) 조항이 적용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 정부가 한번 개방한 폭을 다시 줄일 수 없다. 의료 민영화가 한번 이뤄지면, 되돌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삼성이 미국 자본과 손을 잡을 경우, 투자자-국가 소송제(ISD)를 활용할 수도 있다. 역시 한미 FTA와 함께 도입되는 제도다. 국가의 정책으로 해외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당했을 때, 투자자가 해당 국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중재심판소(ICSID)에 제소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미국 자본과 손잡은 삼성을 한국 정부가 견제할 방법이 없어진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초점을 둔 분야 역시 서비스업이었다. 흔히 수출 제조업을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제조업은 뒤따라오는 중국과 앞서있는 일본 사이에 끼어 있다는 게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서비스업 부문을 산업으로 육성해야 하고, 그러려면 한미 FTA가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 역시 삼성 측 입장과 일치한다.

"참여정부 작명 논란, 인수위 회의 정보가 삼성에 샜기 때문인 듯"

▲ 정태인 전 청와대 비서관. ⓒ프레시안(김봉규)
프레시안
: 이건희 삼성 회장도 지난 2007년 초 한국 제조업이 샌드위치 위기(선진국에 비해 기술과 품질이 부족하고, 개발도상국에 비해서는 인건비가 비싸서 문제라는 뜻)에 처해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미 FTA를 밀어붙인 노 전 대통령과 이 회장의 인식이 비슷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정부 정책의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삼성 구조본 회의에 올라왔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이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정태인 :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밝힌 내용은 거의 전부 사실이라고 본다. 다만,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대목이 한 군데 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참여정부'이라는 명칭을 삼성 구조본이 정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참여정부라는 이름은 분명히 인수위에서 정했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당시 '공화주의'라는 표현에 집착해서 '공화정부'가 후보에 오르기도 했는데 최종 검토안은 '국민참여정부'였다. 그런데 이정우 교수가 이게 너무 길다고 해서, 결국 '참여정부'가 됐다.

아마 이런 논의 과정이 삼성 측에 전달된 게 아닐까 싶다. 그래서 구조본 임원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그 기억을 김 변호사가 기록한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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