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편지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 헤론은 자신에게 월급(이 편지에는 "국왕이 의사에게 주라고 명령한 돈"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다음 편지에는 "월급"으로 명기되어 있다)을 지급하기로 결정된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헤론은 월급이 거의 1년치가 밀렸고 약값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자신이 월급을 받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올해 3월 이래 국왕이 의사에게 주라고 명령한 돈이 지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난 3월 병원 약값이 지불된 이후로 단지 소액만이 지불되었습니다. 대체 그것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I find that no money has been paid in on account of the money the king ordered to be paid over to the physician since the 3rd moon of this year, so that only a little has been paid since I dug it out to pay for the hospital drugs last March. I do not know if I can get it at all)." (헤론, 1888년 12월 6일)
그런 뒤 두 달 가까이 지나서도 월급이 지급되지 않자 헤론은 "기금"(다음 번 편지를 보면 병원 운영비, 그 중에서도 의사 소관인 약값일 가능성이 많다)에서 250달러를 인출하고는 그 돈을 생활비조로 써도 될지를 엘린우드에게 묻고 있다.
"국왕이 주는 월급에 관해서, 인출되지 않았고 지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제 생활을 안정되게 하는 데 쓰려고 기금에서 250달러를 인출했지만 아직 쓰지는 않았습니다. 박사님께서 제가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하시면 다시 돌려놓겠습니다(In relation to the salary from the king, I find that not having been drawn out, it has not been paid in. I drew from the fund $250, which I intended to use in insuring my life, but have not used yet. So that if you decide that I shall not use it, I will refund it)." (헤론, 1889년 1월 28일)
2월 17일자 편지를 보면 헤론은 엘린우드의 회신이 도착하기 전에 250달러를 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고는 엘린우드의 편지를 받은 다음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사용한 돈을 차차 돌려놓겠다고 엘린우드에게 약속했다.
"국왕의 돈에서 꺼냈던 250달러를 차츰 돌려놓겠습니다. 저는 그 돈을 생활을 안정되게 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박사님께서 괜찮으시다면 차차 갚겠습니다. 저는 본래 목적 외로 돈을 사용하는 것이 현명치 못하다는 박사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I will refund the $250, I have from the king's money, this is I will do so gradually. I used it to insure my life with and I will pay it back by degrees, if you are willing. I agree with you perfectly that it is not wise to use money from outside work)." (헤론, 1889년 2월 17일)
헤론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된 데에는 조선 정부가 월급을 장기간 연체한 잘못이 클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헤론의 올바르지 못한 행위가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후 다른 편지나 기록이 없어 헤론이 돈을 돌려놓았는지 여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지난 회에서 보았던 알렌의 편지는 헤론에게 대단히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헤론은 이미 사망했으므로 해명할 기회도 가질 수 없었다.
조선 정부 측 기록도 약값으로 책정된 돈에 문제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외아문에서는 1890년 1월 3일, 인천항감리서리에게 제중원 약값으로 부족한 300원을 해결하기 위해, 외아문에 책정된 300원을 즉시 헤론에게 획발(劃撥)하여 제중원의 약재와 구휼 품목 등에 사용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또 그와 거의 같은 시기인 1889년 12월 16일과 1890년 1월 3일, 외아문은 인천항에 대해 헤론에게 연체된 월급을 즉시 지급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 1890년 1월 3일(음력 1889년 12월 13일) 외아문에서 인천항감리에게 보낸 공문. 인천항감리는 인천항이 납부할 외아문의 경비 300원을 즉시 제중원 의사 헤론에게 획발하여 제중원의 약값과 구휼비로 사용토록 하라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
▲ 1890년 1월 3일 외아문에서 인천항감리에게 보낸, "제중원 의사 헤론의 22개월치 신수비 1100원을 즉시 지급하라"는 공문. 헤론의 신수비를 지급하라고 공문을 보냈고 헤론 자신도 신수비를 달라는 요청을 인천항감리에게 했는데도 아직 시행되지 않은 까닭을 모르겠지만, 즉시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프레시안 |
헤론은 환자 진료도 성심껏 했지만, 그가 더 심혈을 기울인 것은 선교였다. 그는 "주님을 위해 영혼을 구하겠다는 희망이 없다면 단 하루라도 조선에 머무르지 않겠다"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한 열심 덕택인지, 일본에서는 10년 동안이나 선교를 하여 고작 2명의 기독교인이 생긴 것에 반해 조선에서는 불과 3년 만에 주일 성수를 하는 교인만도 25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열성이 조선에서보다 크게 뒤떨어졌을 리 없으므로, 이러한 차이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일본과 조선의 감수성이나 태도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조선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졌다. 1883년 5월 16일,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를 비롯하여 순전히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솔내(松川)에 세워진 '소래교회'가 그것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 설립자 가운데 한 명인 서경조(徐景祚)는 뒤에 필자의 외증조부 김국주(金國柱)와 더불어 초기의 한국인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함석헌은 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한길사 펴냄)에서 김국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목사 중에 내 속에 존경하는 마음을 일으켜준 이 별로 없었다. 가장 인상 깊은 이는 처음에 나 자라던 교회의 목사 노릇을 했던 김국주 목사다. 주일이면 20리 밖에 있는 자기 집에서 당나귀를 타고 와서 예배를 보아주고 가곤 했는데, 그는 참 온순한 점잖고 말 적은 이였다. 인자해 뵈는 이였다." 김국주의 아들 성겸(聖謙)은 1913년 세브란스 의학교를 제3회로 졸업했다. ⓒ프레시안 |
▲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 있는 헤론(1856~1890)의 묘지와 묘비. 헤론은 조선에 와서 최초로 순직한 개신교 선교사이고, 헤론의 사망을 계기로 양화진 묘역이 조성되었다. 묘비 맨 아래에는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프레시안 |
"조선 정부의 법률 고문인 그레이트하우스 장군은 (미국 공사) 허드 씨에게 빈튼의 행동은 뉴욕 법에 따르면 월급을 받고도 그것에 해당하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횡령에 해당한다고 말했습니다(General Greathouse, legal adviser to the Government, told Mr. Heard that Vinton's action amounted to embezzlement, by New York law - accepting a salary and doing nothing to earn it)."
에비슨이 받은 월급에 대해서는 알렌 클라크(Allen DeGray Clark)가 지은 <에비슨 전기>(연세대학교출판부 펴냄)에 잘 나와 있다(84쪽). 에비슨이 자신의 봉급을 다 받았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나는 그곳(제중원)에서 여섯 달 동안 재직했으니까 국왕이 약속한 연간 기여금(하사액)의 절반은 이미 받았어야 하는데, 단지 그 절반의 반(즉 4분의 1)만 받았을 뿐이다(I had been there six months and should already have received half the annual contribution promised by the king, but had received only half of that half)."
"그(주사)는 내게 그러지 말라고 빌면서, 그 일본 의사를 내보내고 국왕이 제공한 돈 전액을 내가 받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He begged me not to do it, promising to get rid of the Japanese doctor and to see that I received the full amount of money provided by the King)."
▲ <에비슨 전기>. 저자 알렌 클라크가 이 책을 쓰는 데 사용한 주된 자료는 에비슨이 1940년 여든 살 때 작성한 두 권의 타자판 회고록이다(저자 서문). ⓒ프레시안 |
이들이 월급을 받은 것은 하등 이상한 일도 잘못 된 일도 아니다. 월급을 받았다고 그들의 공로와 업적이 퇴색하는 것도 아니다. 일한 데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철칙이기도 하다. 세월이 오래 지나고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그들이 월급을 받지 않았다는 "신화"가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과 유리된 신화에서는 빨리 벗어나는 것이 그 외국인 의사들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당시에도 알렌이나 에비슨이 월급을 일체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기억의 자연스러운 퇴색 탓이 아니라 의도적인 왜곡 때문이었을까? 1894년 5월 10일 미국공사 실(J M B Sill)이 외아문 독판서리 김학진에게 제중원 의사 에비슨이 제중원을 사직한다는 공문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
▲ 미국공사 실이 외아문 독판서리 김학진에게 보낸 1894년 5월 10일자 공문(한문 번역본) "제중원 의사 예비신(芮斐信) 자퇴의 건". 에비슨과 알렌이 신수비를 전혀 받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또 제중원은 미국공사관에서 설립한 것이라고도 언급되어 있다. ⓒ프레시안 |
어떻게 해서 미국 공사가 조선 정부의 외무대신 서리에게 이렇게 사실과 다른 공문을 보내게 되었을까? 공사가 사정을 몰랐기 때문이었을까, 알고도 그런 공문을 보낸 것이었을까? 두 경우 모두 작지 않은 문제다. 알렌은 당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이 공문의 발송에 당연히 관여했을 것이다. 제중원 설립 때부터 당시까지 제중원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알렌은 자신도 관련된 이 일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던 것일까?
이 공문은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이 에비슨(미국북장로교선교부)에게 이관되는 과정에서 신호탄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제중원 이관과 관련하여 나중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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