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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넘어가던 조선…대원군은 왜 '쇄국'을 고집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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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숨 넘어가던 조선…대원군은 왜 '쇄국'을 고집했나?

[망국 100년] 대원군도 벗어나지 못한 세도 정치의 틀

철종조(1849~63)는 안동 김 씨의 세도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철종이 죽었을 때 대왕대비 조 씨가 흥선군 이하응의 아들 이재황을 다음 왕으로 찍은 것이 안동 김 씨 세력의 의표를 찌른 일이었다는 이야기가 그럴싸하게 떠돌아 왔다. 아마 그 당시부터 떠돈 얘기일 것 같다. 흥선군이 안동 김 씨의 경계심을 피하기 위해 짐짓 건달 행세로 지냈다는 얘기도 이에 곁들여 떠돌아 왔다.

음모론에 솔깃해 하는 세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 씨가 권력 운용의 핵심 기제인 왕위 관리를 그렇게 허술히 했겠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요즘 한국방송(KBS)에 떠도는 말 '게이트 키핑'을 그토록 못 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옛사람들을 너무 우습게 보는 짓 같다.

고종 추대 과정을 좀 더 석연하게 확인할 길이 없나 찾아봐도 뾰족한 길이 없다.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상식적 차원의 해석으로 만족해야겠다.

1863년 시점에서 안동 김 씨는 권력 독점 상태에서 한 발짝 물러날 뜻이 있었을 것 같다. 민란과 대외 관계 등 감당할 수 없는 상황임을 아무리 권력에 도취되었더라도 모를 수가 없게 되어 있었다. 물러난다면 어디로 물러날 것인가? 너무 멀리 물러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안동 김 씨는 60년의 세도 기간 중 몇 차례 풍양 조 씨와 권력을 분점한 경험이 있었다. 자기네와 어차피 혼약까지 되어 있는 흥선군을 조 대비를 앞세워 끌어들이면서 권력을 조금 풀어주는 대신 책임을 나누려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 즉위 후 대원군의 정치 참여를 안동 김 씨가 반대했다고 흔히 말하는데, 철저한 반대는 아니었을 것 같다. 반대하는 시늉을 했다 하더라도 '수위 조절'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안동 김 씨들은 독점하고 있던 권력의 일부를 풍양 조 씨와 흥선군에게 나눠주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우리 권력이 부러웠지? 조금 나눠줄게, 놀아 봐. 만만치 않을 걸? 지금은 누가 나서도 욕먹게 돼 있는 판이니까 앞장서서 욕 좀 먹어 봐. 우린 뒷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가 너희들이 감당 못할 때 언제든지 다시 나서줄게. 우리야 기본 실력이 있잖아?"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니 책임을 분산시킬 상대를 끌어들이자는 데는 안동 김 씨 구성원들 사이에 넓은 공감대가 있었겠지만, 권력을 어느 수준까지 넘겨주느냐 하는 수위 조절 문제를 놓고는 위기의식의 심도에 따라 편차가 있었을 것이다. 대원군의 권력 강화에 안동 김 씨 중 순응한 사람도 있고 반발한 사람도 있었던 것은 성격 차이보다 위기의식의 심도에 따라 갈라진 면이 있었을 것이다. 위기를 가볍게 본 사람은 대원군의 조그만 전횡에도 발끈하고, 무겁게 본 사람은 대원군의 책임이 커지는 것을 반겼으리라는 것이다.

세도 정치에는 현상에 안주하는 성향이 있었다. 세도가는 명분 있는 주권자가 아니므로 국가와 사회의 질서에 포괄적이고 궁극적인 책임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명분을 넘어서는 권력을 수중에 장악한 입장에서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을 운용한다. 먼 앞날을 걱정할 필요 없이 당장 펑크 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속을 챙기면 된다. 대한민국 군대에서 흔히 "군대는 그때뿐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세도가의 개인 성격에 따라 '비교적' 양심적이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세도 집단 전체의 행태에서는 개인적 편차가 완화되어 주어진 여건을 이기적으로 활용하는 추세가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간혹 양심적이고 강력한 독재자가 출현해 자기 출신 집단을 배반하고 더 큰 사회를 위해 움직일 수도 있지만, 안동 김 씨 세도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원군은 안동 김 씨나 풍양 조 씨보다 원대한 정치적 목표를 가진 입장이었다. 왕권 회복은 곧 유교 정치 원리의 회복과 통하는 것이었고, 회복된 왕권은 한 때의 이용 대상이 아니라 먼 장래까지 국가를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차이가 단적으로 드러난 정책이 서원 철폐였다. 서원은 전국 각지 토호 세력의 본거가 되어 있었다. 67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몽땅 간판을 내리게 한 것은 국가의 기본 질서를 세우기 위해 요긴한 일이었다. 그런데 명분 없이 권력을 점유하고 있던 세도가들에게는 각지 실력자들의 미움을 받을 이런 짓을 할 동기가 없었다.

고종 즉위 직전 진주 민란을 위시한 각지 민란에서 양반층 참여가 두드러진 현상이었다. 이것이 민란의 전체적 성격을 좌우할 만큼 큰 요소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지만, 진주의 경우 교리 정도의 고위직을 지낸 양반이 관여되었다는 것은 음미할 점이 많은 사실이다. 그런 고급 양반층에게까지도 문제 해결을 위한 공식 루트가 막혀 있었던 것이다. 한편, 난민의 공격은 수령들 못지않게 일부 아전들에게 쏟아졌다. 유교 국가의 정상적 질서 아래라면 질서의 운용을 맡고 있을 양반층이 항의하는 입장에 있었고, 아전들이 항의를 받는 입장에 있었다는 것은 "세상이 뒤집힌" 상태에 와 있었던 것이다.

대원군 집권 후 민란이 사그라진 사실을 구명한 연구 문헌을 접하지 못했지만, 세도 정치 시절과 차원이 다른 개혁 정책이 추진된 효과였으리라는 개연성은 떠오른다. 대원군 집권기의 정책 역시 미봉적인 수준에 그쳤다고 하는 비판도 있는데,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식의 부적절한 기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종 즉위 당시의 조선은 망국에 가까운 상태였다. 숨넘어가는 환자를 일단 살려놓기 위해서는 장기적 효과에 관계없이 당장 숨통 틔워줄 수단을 뭐든 써야 할 것이 아닌가?

대원군이 아무리 원대한 정치적 목표와 고매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현실에는 엄중한 제약이 있었다. 가장 큰 제약은 관료층의 기강 해이와 부패였다. 앞 회에서 1827년 이조원의 옥사를 예시한 것은 무엇보다 3사의 기능이 마비되다시피 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3사는 유교 국가 관료 조직의 핵심부다. 3사의 관직은 '청요직(淸要職)'이라 하여 관직 중의 관직으로 여겨졌다. 그런 3사가 현실적 의미도 없고 혐의도 애매한 일에 만사 제쳐놓고 달려들고 있었다. 순전히 당파의 정략 때문에.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과거 제도의 마비 상태였다. 과거의 등락조차 부패 현상에 상당히 휩쓸려 버렸거니와, 더 큰 문제는 인력 수요의 열 배가 넘을 정도로 많이 뽑음으로써 관료 선발의 실질적 의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중간 계층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필요보다 자주 과거를 실시하고 많이 뽑았다. 오늘날의 박사 실업자처럼 임용 자격자가 넘쳐나게 되니 매관매직 사업은 더더욱 번창할 수밖에. 이로 인해 관료 집단의 질은 형편없이 낮아졌다.

현실적으로 권력을 운용하는 방법에서는 대원군도 세도 정치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자금도 마련하고 사조직도 만들었다. 많은 인재를 거느린 안동 김 씨, 풍양 조 씨에 대항하기 위해 전주 이 씨를 종친 우대라는 명분으로 관직에 대거 끌어들였다. 권력의 규모가 커지자 친위 세력 확대를 위해 조선 명문가, 특히 노론 명문가의 하나인 여흥 민 씨를 외척으로 북돋워주기도 했다.

민 씨 집안이 대원군에 대항하는 '민비 일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원래는 대원군 친위 세력으로 자라났다. 대원군은 즉위 전 있었던 안동 김 씨와의 혼담을 파기하고 자기 처가의 외로운 집안 규수를 간택하게 했다. 민 씨의 핵심 인물이던 민승호와 민겸호는 대원군 부대부인의 친동생들이었다. 민승호가 민비의 집으로 입적해서 명목상 남매 간이 되기는 했지만, 이들은 원래 먼 일가 동생인 민비보다 자형인 대원군에게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 경복궁은 조선에서 왕권의 가장 큰 상징물이었다. 임진왜란 후 경복궁을 오랫동안 다시 세우지 못한 것은 왕권의 쇠퇴를 보여주는 일이다. 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재건은 왕권 회복을 위한 큰 상징을 가진 사업이었다. 그러나 거듭된 화재로 경비가 계획의 몇 배로 커지는데도 융통성 없이 집착한 것은 정치 철학의 빈곤을 보여주는 일이다.
ⓒ프레시안

조정에 친위 세력을 키우느라고 키워도 오래 묵은 세도 가문들의 기라성 같은 명망가들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원군의 정책 추진은 인동 김 씨를 중심으로 하는 구세력의 양해 하에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대원군의 개혁 의지가 강하고 구세력 중에도 상당한 위기의식이 일어나 있었다는 두 가지 조건 때문에 그 이전 단계에 비해서는 획기적인 개혁 노력이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세력의 양해라는 근본적 제약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 제약을 벗어나기 위해, 적어도 제약을 완화하기 위해 대원군은 친위 세력 확장에 무리할 정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로부터 파생된 문제가 민 씨 세력의 이탈이었다. 대원군이 키워준 민 씨 세력이 어떻게 그와 맞서게 되었을까?

여러 측면에서 살필 문제지만, 가장 중요한 측면은 왕과의 관계였다. 대원군이 구세력인 세도가들보다 도덕적·전략적 우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왕과의 특수 관계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와 맞먹는 수준의 특수 관계를 왕과 가지게 된 것이 민비였다. 대원군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대원군에 대항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길이 민비와의 결탁이었다. 민 씨 세력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지킬 경우 대원군 세력의 주변적 존재일 뿐이지만, 민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뭉칠 경우 대원군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부가 될 수 있는 입장이었다.

대원군 실패의 한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경연을 행하지 않은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경연은 유교 국가의 핵심적 제도다. 학술에서 실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놓고 왕과 좁은 범위의 신하들이 심층 토론을 벌임으로써 정치와 학문을 나란히 발전시키는 제도다. 스킨십을 통해 군신 간의 신뢰와 충성을 심화시키는 것은 부수적 효과다. 왕세자의 경우는 경연의 축소판인 서연을 군왕 교육의 중심으로 삼는다.

고종처럼 동궁을 거치지 않은 군주에게는 경연의 필요성이 더 절실한 것이다. 그런데 박규수 등이 경연을 제안하는데도 대원군이 이를 물리쳤다. 대원군이 고종을 허수아비로 키우고 자기가 실질적인 왕 노릇을 죽을 때까지 해먹을 배짱이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굳이 이해하려면 일모도원(日暮途遠)의 조바심 때문에 불요불급한 일에 정력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임금을 임금답게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을 불요불급한 것으로 여기고 어린 고종이 궁녀와 히히덕히히덕하기에 바빠 자기를 귀찮게 굴지 않는 데 만족했다면 대원군 자신의 자세가 유교 정치의 원리에 투철하지 못했던 것이다.

대원군이 경연을 소홀히 한 것은 임금을 임금으로 받들지 않은 자세를 의심하게 하는 일이다. 심지어 국정의 파트너로도 인정하지 않은 태도다. 경연을 통해 고종이 군주의 경륜을 키우는 것도 측근 신하들과 신뢰·충성의 관계를 키우는 것도 대원군은 바라지 않은 것이다. 대원군은 고종 주변을 비워놓았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민 씨 세력이 이 빈틈을 채웠다.

대원군의 개혁은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의 여건 속에 그 정도 적극적 개혁을 시도한 데서 원대한 목표와 강인한 의지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개혁의 방법에 집착하면서 개혁의 이념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 공학에 매달려 정치 철학을 소홀히 했으니, 왕권 강화를 내세우고도 실제로 강화된 왕권을 행사할 왕 자신의 자격을 확충하는 일을 무시하고 만 것이었다.

쇄국 정책의 한계성도 정치 철학의 빈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에서 쇄국도 일면의 타당성을 가진 노선이었다. 내부 체제를 어느 수준까지 정비할 때까지 개항을 늦추는 것은 합리적인 정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면의 타당성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에 대한 고려와 대비가 따라야 했다. 쇄국을 위한 쇄국이 되어 개항파와의 비생산적 대립으로 흘러가게 한 것은 왕권 강화를 위한 왕권 강화로써 왕권의 자연스러운 발전을 가로막은 것과 같은 모순이었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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