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더불어 제중원은 근대 의료의 도입과 수용을 둘러싼 지금까지 우리 학계와 사회의 논의, 나아가 역사를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에 대해서도 집약적으로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꼼꼼하게 논의를 계속하려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께서 제중원에 관한 "사실"과 더불어 그러한 점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이 연재 글을 읽으면 더욱 좋겠다고 생각한다.
제중원의 성격, 제중원 운영에 대한 외국인 의사의 역할과 권한 등에 관련하여 외국인 의사의 봉급 문제가 있다. 어떤 연구자들은 외국인 의사들이 조선 정부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병원 운영에 참여(주도)했다는 유력한 근거로 그들이 봉급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구체적인 목소리를 들어보자.
병원 설립 안에서 제시한 것처럼 알렌이나 헤론은 보수(報酬·salary)를 받지 않았지만 약간의 돈이 '신수비(薪水費)'라는 명목으로 지급된 적은 있었다. 조선 정부는 개원 후 1년 이상이 경과된 1887년 (음력) 1월부터 신수비로 월 50원씩을 정기적으로 지급하여 생활을 보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를 보수로 보기에는 육영공원 교사 등 조선 정부에 고용된 다른 외국인들에게 지급된 보수와는 금액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고, 지급도 대단히 부정기적이었다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또 월급의 성격이면 제중원에 근무하는 모든 의사들이 받았어야 마땅할 터인데, 알렌과 헤론 그리고 엘러스가 있었음에도 한 사람에게만 지급했던 것이다.
알렌은 이 비용이 제중원의 약품 구입을 위해 지급된 것이었음을 밝혔다.
한편, 1899년 의학교가 개교하고 일본 의서를 번역하기 위해 고용했던 아사카와(麻川松次郞)의 계약을 보면 봉급 이외에 신수비가 명시되어 있다. 이는 신수비가 정상적인 보수가 아니라 일종의 보조비적인 성격을 가졌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근대서양의학교육사>, 박형우 지음, 청년의사 펴냄, 36쪽)
위의 인용 글에서는 외국인 의사들이 봉급을 받지 않았다는 근거로 (1)"보수(봉급)"와 "신수비"라는 명칭의 차이, (2)지급 액수(육영공원 교사 보수와의 비교) (3)수령자의 제한성 (4) 지급 비용의 성격 등을 들고 있다. 이러한 근거들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자.
(1) 알렌은 <병원 설립 제안>(朝鮮政府京中設建病院節論)에서 "귀 정부의 연금은 비록 한 푼일지라도 받지 않고자 합니다(而於貴政府年金 則雖一錢不欲取矣)"라고 했으며, 실제로 1886년 말까지 제중원에서 일하는 데에 대해 "공식적으로" 봉급을 지급받은 적은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관해 헤론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나는 정부 병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정부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않습니다. 알렌 의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1886년 4월 8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다만 지난번(제10회)에 언급했던 1885년 5월부터 8월까지 알렌이 받은 봉급의 성격에 대해서는 앞으로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1887년부터 인천해관(세관)에서 알렌에게 매달 50원(멕시코 은화 50원으로 50달러와 같다)씩이 지급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887년 3월 23일(음력 3월 1일) 감리인천항통상사무(監理仁川港通商事務) 엄(嚴)씨는 잠상공사 경리 마르텐(麥登司)의 2월분 신수비(416원 6각 6푼)와 "제중원 의사" 알렌(安連)의 정월분 월봉(50원) 등을 세무사 쉐니케(史納機)에게 지급했다는 사실을 외아문에 보고했다.
이보다 한 달 앞선 2월 23일(음력 2월 1일) 인천해관에서는 1월부터 알렌에게 매달 신수비 50원씩을 지급하라는 외아문의 지시에 대해 해관의 관세 수입이 부족하여 지급하기 어렵다는 보고를 한 바 있었는데 사정이 나아져 1월분부터 소급하여 지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인천해관에서 잠상공사 경리 마르텐의 2월분 신수비 416원 6각 6푼과 "제중원 의사" 알렌의 정월분 월봉 50원 등을 세무사 쉐니케에게 지급했음을 외아문에 보고한 공문. ⓒ프레시안 |
그 뒤의 기록을 보면, "2월분 신수 양은 50원"(4월 17일), "3월분 월급 양은 50원"(4월 29일), "4월급 50원"(윤4월 27일), "윤4월 월급 50원"(6월 5일), "5월분 월급 양은 50원"(7월 7일), "월급 7월조"(9월 7일), "8월 신수 양은 50원"(10월 5일), "9월분 월급 50원"(11월 7일), "10월분 신수 50원"(12월 8일), "11월분"(1888년 1월 10일), "정월조 50원"(5월 11일), "2월조 50원"(5월 12일) 식으로 되어 있다. (여기의 날짜는 편의상 모두 음력으로 나타내었다.)
이 기록들에서 "월급"과 "신수비"가 혼용되고 있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월급(月給)과 신수비(薪水費)가 똑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같은 문서, 심지어 한 문장에서도 월급과 신수비가 혼용되었다.
▲ 인천해관 세무사 쉐니케(J F Schonicke)가 "제중원 의사" 알렌의 1887년 4월분 월급(墨洋銀, 멕시코 은화) 50원을 인천감리로부터 지급받고 6월 18일(음력 윤4월 27일)자로 발급한 영수증. 왼쪽은 영문으로 오른쪽은 한문으로 기록했으며, 영문 맨 끝에 쉐니케의 서명이 있다. 월급을 영문으로 "Salary", 한문으로 "薪水"라고 표현했다. ⓒ프레시안 |
아울러 인용 글 마지막 부분에 신수비의 의미와 관련하여 거론된 아사카와(麻川松次郞)와의 계약에 대해서도 주의 깊은 검토가 필요하다. <황성신문> 1899년 10월 16일자에 학부에서 아사카와를 고용하면서 월급 75원 이외에 신수비 10원을 별도로 지급하기로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신수비가 월급과 다른 뜻으로 쓰인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하다. 하지만 이 기록을 근거로 월급과 신수비가 "항상" 다른 뜻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알렌이 월급을 받던 시기에는 월급과 신수비가 똑같은 뜻으로 쓰였던 것이다.
▲ <황성신문> 1899년 10월 16일자. 월급 75원 이외에 신수비 10원이 별도로 설정되었다는 기사이다. 이것은 신수비의 의미가 그 이전과 달라진 시대의 이야기일 따름이다. ⓒ프레시안 |
(2) 알렌과 헤론이 받은 월급 50원은 길모어, 번커, 헐버트 등 육영공원 교사의 월급 160원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세 사람의 월급을 합친 480원을 한 사람의 월급으로 간주하여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위의 인천항 공문에 나오는 잠상공사 경리 마르텐의 신수비 416원에 비교하면 8분의 1도 안 되는 액수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의 수입에 비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봉급이기도 하다.
그보다도 알렌이 일본공사관의 의사로 받은 봉급은 연봉 500달러였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달러와 원(元)의 가치는 같았다.) 알렌이 청국공사관, 영국영사관에서 받은 급료도 연봉 500달러 내외였다. 조선해관 의사로 받은 연봉은 720달러였다. 이런 것들로 보아 월 50원(달러) 내외가 당시 서양인 의사들의 급료 수준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알렌의 또 다른 기록도 그 점을 뒷받침한다.
"이곳(제물포) 해관이 저를 고용할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들은 지금 월 30달러로 일본인 의사를 고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서울(해관)에서 받았던 60달러와 같은 액수를 요구하려 합니다." (알렌이 1890년 3월 26일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
"제중원 의사" 알렌은 월급을 별 연체 없이 꼬박꼬박 받았다. 그와 달리 헤론은 거의 2년이나 밀린 급료를 1889년 말(음력) 한꺼번에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연유가 어떻든 간에 조선 정부의 잘못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미국공사관이 외아문에 보낸 공문들 가운데 연체된 미국인 봉급을 빨리 지급해 달라는 독촉장이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였다.
봉급과 관련하여 종종 비교 대상이 되어온 육영공원 교사들에 대한 월급 지급은 어떠했을까? 1892년 3월 15일 감리원산항통상사무가 외아문에 보낸 공문 "체불된 육영공원 교사 월급액 지급에 관한 건"의 내용은 이렇다. 육영공원 교사들의 신수비를 1886년 12월분부터 지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는데 현재 원산해관의 관세 수입이 적어 우선 1887년 7월분까지만 먼저 보내고 1887년 8월부터 1891년 12월까지의 신수비는 원산항 세무사에게 수표(어음)를 발급받아 보냈다는 것이다.
▲ 1892년 3월 15일 감리원산항통상사무가 외아문에 보낸 공문 "체불된 육영공원 교사 월급액 지급에 관한 건." ⓒ프레시안 |
1886년 9월에 개교한 육영공원의 교사들은 처음 몇 달 동안만 월급을 받고는 무려 5년이나 급료가 체불되어 있었던 것이다. 육영공원의 교사들은, 무료로 일하겠다며 제중원에서 근무를 시작한 알렌이나 헤론과 달리 정해진 봉급을 지급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고 미국에서 조선에 왔던 사람들이다. 조선 정부나 국왕의 체면이 참으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 1890년 8월 13일 외아문이 인천감리에게 보낸 공문. 제중원 의사 알렌의 신수 50원은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뒤 헤론이 수령했는데, 이제 헤론이 사망하여 알렌이 다시 근무하기로 했으므로 이달부터 신수 50원을 알렌에게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헤론이 사망한 지 20일도 안 된 시점의 공문으로 당시 실정에 비추어 매우 신속한 조치이다. ⓒ프레시안 |
(4) "알렌은 이 비용이 제중원의 약품 구입을 위해 지급된 것이었음을 밝혔다"라고 하면서 그 근거로 알렌이 엘린우드에게 보낸 1890년 8월 11일자 편지를 들었다. 하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알렌과 헤론에게 매달 지급된 50원은 월급이지, 병원 운영에 필요한 약값이 아니다. 또한 알렌의 1890년 8월 11일 편지에는 비용(월급)이 약품 구입을 위해 지급된 것이라는 이야기는 없고, 대신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제가 떠난 이래로, 헤론은 약품 구입을 위한 용도로 적절하게 병원에 배정된 연(年) 600달러를 인출해 왔습니다. 제가 선교부에서 사임하고 병원에서 살게 된다면 그 돈은 제 소관이 될 것입니다. 저는 사임하지 않았지만(필자 : 알렌은 이틀 뒤인 8월 13일 선교부에서 사임했다. 이에 앞서 7월에 조선 주재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취임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돈을 약품 구입에 사용하는 데 동의했습니다(Also, since my departure, Heron has drawn $600 per annum which rightfully belonged to the hospital for medicines. It was made to me if I would resign from the mission and live at the hospital. I didn't resign but agreed to use it for medicines)."
그리고 9월 18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7월 달에 사망한 헤론이 약값 600달러를 이미 다른 데에 썼기 때문에,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알렌은 자신의 월급을 약값으로 사용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저는 매년 헤론에게 해관에서 나온 돈 600달러를 맡겼습니다. 그 돈은 다른 어떤 용도로도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제게 월급으로 매달 50달러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규칙적으로 지불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월급을 사라져 버린 해관 돈을 대신하여 약값으로 사용했습니다(I turned over to Heron $600 per annum from the Customs which was not to have been used in any other way. Already they have given me $50 per month (and it is paid regularly) as a salary, but I have turned it over for medicines in place of the Customs money now lost)."
이야기가 길어졌으므로 위의 약값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헤론과 조선 정부 측 기록, 그리고 빈튼과 에비슨이 받은 봉급 등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다루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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