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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과 '엘리티즘' 사이, 보수 권력의 균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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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과 '엘리티즘' 사이, 보수 권력의 균열점

[의제27 '시선'] 유리하면 '국민여론', 불리하면 '포퓰리즘'

언제부턴가 보수 진영에선 진보개혁 세력의 비판과 대안들을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게 유행이다. 일찍이 참여정부 시절부터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과 참여정부의 제반 정책들을 포퓰리즘이라고 줄기차게 비난했었다.

정권 교체 후에도 포퓰리즘은 보수 진영의 단골 레토릭이다. 한나라당 정몽준, 김성조 의원 등은 4대강 사업 반대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었고, 이명박 대통령과 작가 이문열 씨 등은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반대자들을 포퓰리즘 세력으로 규정했다. 경기도 교육청의 무상급식 정책에 대해 경기도의회 한나라당 의원들은 포퓰리즘 정책이라며 거부했고, 친환경 무상급식이 지방선거 의제로 확산되자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나서서 실현 불가능한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비난했다. 한마디로 '포퓰리즘'은 한국 보수에게 가장 포퓰러한(대중적인) 레토릭의 하나가 됐다.

21세기 보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길래

'포퓰리즘'이라는 정치레토릭은 현대정치에서 즐겨 활용되는 권력투쟁의 도구다. 그러나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포퓰리즘 논란은 단기적인 정치적 공방의 차원을 넘어서는 질문들을 제기한다. 한국 정치에서 왜 하필이면 2000년대에 들어 포퓰리즘이라는 레토릭이 급부상했는가? 보수 진영의 포퓰리즘 담론은 한국 보수의 시대적 환경과 정치논리에 모종의 중대한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하지 않은가? 반대세력의 포퓰리즘을 비난하는 보수의 레토릭은 보수 진영 자신의 포퓰리즘 정치의 일환은 아닌가? 보수의 포퓰리즘은 한국 보수의 오래된 엘리티즘과 어떻게 공존하며, 그것의 필연적 한계와 균열 지점은 어디에 있는가? 말하자면 현재의 포퓰리즘 논란은 한국의 정치환경과 보수 정치논리의 역사적 변동을 반영한다.
▲ 보수는 '포퓰리즘 비판'의 레토릭을 구사하는 한편 국민적 이익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포퓰리즘 정치'를 벌였다. 남이 하면 포퓰리즘, 내가 하면 서민정치다. ⓒ프레시안

포퓰리즘이 무엇이며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견해차가 존재한다. 흔히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 대중선동주의, 대중동원정치 등 부정적 의미로 이해된다. 대중에 호소하면서 정치적으로 도구화하는 정치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는 포퓰리즘을 '인민주의', '민중주의', '인민주권론' 등으로 번역하면서 포퓰리즘의 긍정적 차원을 부각시키기도 한다. 엘리트의 세상, 엘리트만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민이 주인 되는 정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평가가 대립한다. 라클라우(Ernesto Laclau)나 캐노번(Margaret Canovan) 등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라고 본 데 반해, 팩스턴(Robert Paxton), 그리핀(Roger Griffin) 등 파시즘 연구자들은 포퓰리즘이 파시즘의 본질적 요소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 대립은 포퓰리즘 현상 자체의 모순성에서 유래한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t)나 패스모어(Kevin Passmore)가 파시즘에 대해 말한 것이 포퓰리즘에도 적용된다. 포퓰리즘 현상의 핵심은 '모순'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인민의 대립구도 하에 인민의 주권과 존엄성을 강조하며 때론 이를 진정으로 추구한다. 하지만 포퓰리즘 정치는 일반적으로 구체적 사회개혁 강령을 갖고 있지 않으며, '인민'을 구성하는 이질적 사회집단들의 다양한 이해와 욕구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종종 노동조합과 사회단체 등 인민 자신의 독립적 조직을 와해하고, 인민의 대변인을 자임하는 지도자와 정치세력이 인민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권력과 자원을 독점한다. 이처럼 포퓰리즘은 '인민주권'과 '인민배제'의 양면성을 동시에 갖는 모순적 정치논리며, 바로 여기서 포퓰리즘 정치의 고유한 역동성이 생겨난다.

한국 정치담론의 장에서 '포퓰리즘' 담론이 전격적으로 부상한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부터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이나 참여정부의 정책이 과연 포퓰리즘적이었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이 시점부터 본격화된 보수 진영의 포퓰리즘 비판이 어떤 정치적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충분히 주목하지 않았다. 담론의 의미는 '무엇을 말했는가?'만이 아니라 '누가, 어떤 맥락에서 말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했을 때, 이 질문은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

보수의 포퓰리즘 비판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피플'을 둘러싼 특수와 보편의 정치학을 읽어내야 한다. 누가 '피플'이며, '피플'의 이익이 무엇인지는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특수한 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는 사회정치 세력들은 제각기 방식으로 '피플'(국민, 인민, 시민, 서민 등등)의 보편적 이익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친기업 세력은 기업의 이익이 곧 국가적 이익이자 모든 국민의 이익이라고 말한다. 친노동 세력은 노동자의 이익이 그런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2000년대 이전까지 한국 정치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열망하는 개개인의 이익은 '국가적 이익'이 될 수 없었다. '국가적 이익'은 정치권력과 기득권 세력의 특수 이익으로부터 도출됐기 때문이다. 보수는 '피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보수, '피플'을 고민하다

그러나 국가권력과 기득권층이 '보편 이익'에 대한 정의를 독점하는 이 정치논리는 김대중 정부의 등장으로 도전받게 됐으며, 노무현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진정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 2004년 대통령 탄핵 시도 좌절, 곧이어 제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참패로 보수의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됐다. 이 시점부터 보수와 기득권층은 참여정부와 진보개혁 세력의 '포퓰러'한 기반과 그 정치적 위력을 분명히 인식했다. '사익을 추구하는 부패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국민적' 정치세력의 이미지로 변신하기 위한 시도가 필요했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보수의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왜냐하면 이전까지 한국 보수와 기득권층은 국민으로부터 인정받을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피플'이 중요해졌다. 보수는 '피플'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참여정부와 진보개혁 세력에 대한 포퓰리즘 비판이 본격화된 것은 바로 이 맥락에서였으며, 또한 보수 세력 스스로 포퓰리즘적 정치담론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다. 이들은 한편으론 국가적 이익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포퓰리즘 비판'의 레토릭을 구사하고, 다른 한편으론 국민적 이익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포퓰리즘 정치'를 벌였다. 쉽게 말해, 남이 하면 포퓰리즘, 내가 하면 서민정치다.

먼저 보수 세력의 포퓰리즘 비판을 보자. 한나라당과 보수언론, 뉴라이트 인사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뿐 아니라, 당시 정부여당의 각종 개혁정책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했었다. 양성평등 정책은 여성유권자를 겨냥한 것이라 포퓰리즘, 저소득층 지원 정책은 서민을 등에 업으려는 포퓰리즘, 야간학습 규제는 철없는 학생들만 신나게 해주므로 포퓰리즘 등, 다수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책은 다 포퓰리즘의 의혹을 샀다. 정권 교체 이후에도 포퓰리즘 비판의 핵심은 동일하다. 4대강 사업 반대, 세종시 수정안 반대, 무상급식론 등 보수 진영에서 포퓰리즘을 이유로 비난한 의제들의 공통점은 '여론에서 밀린다'는 데 있다. 만약 자신들이 여론에서 우세한 의제라면 반대 진영을 포퓰리즘이라 비난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반대여론이 더 클 경우 이를 거역할 논리가 필요했다. 반대자들에게 포퓰리즘의 딱지를 붙이는 게 그 해결책이었다. 내가 우세하면 '국민여론', 네가 우세하면 '포퓰리즘'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보수 세력의 포퓰리즘 비판이 터하고 있는 근거는 바로 엘리티즘의 정치철학이며, 그것의 사회적 기반은 한국사회 기득권층의 이익이다. 한국 보수의 정치철학에서 '국가적 이익'은 '국민적 이익'과 분리되며, '기득권층의 이익'과 동일시된다. 즉 국가적 이익은 국민 개개인의 이익을 초월한 어떤 곳에 존재하는 것이며, 국민들의 이익을 즉각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것은 국가적 이익과 충돌할 위험이 있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피플'에 대한 근원적 불신이다. 이에 반해 기득권층의 이익은 국가적 이익과 쉽게 동일시된다. 재벌이 잘되고, 기업이 잘돼야 나라경제가 잘되고, 결과적으로 국민 개개인도 잘된다는 논리다. 부동산 투기가 잘돼야 건설경기가 살아나고, 기업법인세 깎고 해고요건 완화해야 기업도 살고 종업원도 산다는 논리다. 그러므로 이들이 기득권층이 아닌 일반 국민들의 권리와 복리를 추구하는 정책에다 '포퓰리즘'이라는 불명예스런 딱지를 붙이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한편 보수 세력은 반대자들에게 포퓰리즘의 낙인을 찍어놓곤 그 자신은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치를 벌여왔다. 2000년대 들어 보수 세력은 진보개혁 세력의 '포퓰러'한 요소들을 가져가서 자신들의 프레임 안에 통합시키기 시작했다. 2004~2005년경부터 뉴라이트와 보수언론은 사람들의 절실한 생활상의 문제들을 집중 탐구하기 시작했고, 이를 기업친화적, 부자친화적, 권위주의적 프레임 안에 위치시켰다. 그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이 최우선의 해결 과제로 부각시켰던 것은 무엇인가? 실업문제, 빈곤증대, 양극화, 중산층 몰락, 교육문제, 노후문제 등이다. 진보개혁 진영의 전통적 의제들을 모두 가져간 셈이었다. 한나라당은 각종 탈규제, 친기업 정책, 부자감세, 민영화 등이 이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공언했다. 국정목표는? '국민성공'이다.

이들의 정책담론의 기본 도식은 단순히 말해 이런 것이었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어주고 시장경쟁을 활성화해야 투자도 활성화되고 생산성도 높아진다. 그러면 일자리도 늘고 소득도 높아져서 국민 모두가 살기 좋아진다." 이 논리는 기업, 부자, 엘리트의 특수 이익을 국가적 이익, 모든 국민의 보편이익과 동일시한다. "보수 세력은 기득권층의 사익이 아니라 국민의 공익을 추구하지만, 그 공익을 달성하는 최선의 길은 기득권층의 사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라는 절묘한 논리다. 이에 반해 사회복지 등 국민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나라살림과 민생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포퓰리즘 정책으로 폄하된다. 보수의 '포퓰리즘 비판'과 보수 자신의 '포퓰리즘 정치'는 이렇게 만난다.

이처럼 기업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정책을 통해 서민복지를 위한 자원을 창출한다는 전략이 한국 자본주의에서 어느 정도의 물적 기초를 갖고 있는지는 섣불리 재단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업성공'의 엘리트주의 정치철학과 '국민성공'의 포퓰리즘적 정치담론이 갈등 없이 공존할 순 없다는 것이다. 포퓰리즘 정치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의 엘리트와 중심부, 주류 세력을 공격하는 전복적 성격을 내포할 때 비로소 파괴적인 정치적 동원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국 보수의 포퓰리즘은 그런 동력을 갖고 있지 않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권력블록의 다수 구성원은 이 사회의 전형적인 엘리트 집단이다. 나아가 정책적 측면에서도 현재의 친기업, 토건 정책들은 전혀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적하효과를 겨냥하고 있지 않다. 친서민의 외피와 반서민의 내연이라는 모순은 외견상 탄탄해 보이는 권력의 구조물에 점점 더 심각한 균열을 가할 것이다. 그러나 야당과 진보개혁 세력이 이 균열의 수혜자가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지금 진보개혁 세력에게 필요한 것은 보수 세력과 기득권층의 포퓰리즘 비판과 포퓰리즘 정치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는 포퓰러 민주주의의 기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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