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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백송에 얽힌 사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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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백송에 얽힌 사연은?

[근대 의료의 풍경·11] 제중원 터

오늘은 식목일, 나무 이야기로 시작하자. 서울 재동의 헌법재판소 북서측 담 안쪽에는 수령이 600년이나 된다는 높이 17미터의 거대한 백송(白松) 한 그루가 서 있다(제8회). 제중원이 1885년 4월부터 1886년 11월경까지, 그 뒤 광제원(廣濟院)이 1900년 10월부터 1908년 초까지 사용하던 건물들은 모두 없어지고 '재동 백송'(천연기념물 제8호)만이 남아 묵묵히 세월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원래 '통의동 백송'(천연기념물 제4호)이 가장 유명했다고 한다. 그 백송이 1990년 여름 강풍을 동반한 벼락으로 인해 수명을 다한 뒤에 재동 백송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서울의 또 하나의 명물 백송은 지금은 조계사 경내이지만 100여 년 전에는 전의감 자리에 있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전통 의료와 근대 의료, 그리고 그 혼합체를 대표하는 의료 기관에 백송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 지금까지 알려지기로는 가장 오래 된 '재동 백송' 사진이다(<동아일보> 1924년 7월 1일자). "이 백송은 지금 경성녀자고등보통학교 재동 뎨이 긔숙사 안에 잇는데 몃 백 년 전부터 그곳에 그러케 흰몸을 벗틔고 섯답니다. 그리고 이 백송의 고향은 중국입네다"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동아일보

제중원 자리가 "북부 재동 외아문 북쪽으로 두 번째 집"(외아문의 1885년 4월 3일자 공고문)이며 홍영식의 집이라는 사실은 여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므로 대강의 위치는 짐작할 수 있지만, 백송과 제중원 도면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위치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 <Korea Mission Field> 1934년 8월호에 실린 광혜원(제중원) 사진(왼쪽). "현재 조선 소녀들을 위한 고등보통학교(Higher Common School for Korean Girls)의 기숙사 건물로 쓰이고 있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오른쪽 사진은 백송과 제중원 건물이 함께 찍힌 것 가운데 필자가 알기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동아일보> 1933년 7월 23일자). 사진 속의 건물은 창덕여고 시절인 1950년대 후반에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프레시안

사진으로나마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제중원 건물은 어떤 용도로 쓰였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박형우의 선행 연구가 있다. 그는 1932년도 경성여자고보 졸업생의 증언과 오늘날의 지적도 등을 종합하여, 아래와 같이 일제시대 경성여자고보 기숙사 배치도(도면 1)와 1886년의 제중원 배치도(도면 2)를 복원해내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사진 속의 건물이 외과병동(도면 2에 남색선으로 표시. 여기에는 일반 병동 및 안과 병동으로 되어 있지만 1885년에는 외과병동으로 쓰였다)이라고 추정했다.

도면 1(왼쪽) : 일제시대 경성여자고보(경기여고) 배치도(<제중원>, 박형우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010년, 80쪽). 빨간색으로 표시한 것이 백송의 (추정) 위치이다. 도면 2(오른쪽)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에 실린 도면을 박형우가 지적도에 맞춰 다시 그린 제중원 배치도(앞의 책, 90쪽). 박 교수는 남색선으로 표시된 일반 병동과 안과 병동을 <Korea Mission Field> 1934년 8월호에 실린 광혜원(제중원) 건물로 추정했다. ⓒ프레시안

도면 3 :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소장)에 실려 있는 제중원 배치도. 도면 1, 2와 비교하기 쉽도록 원래 배치도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프레시안
이번에는 알렌이 작성한 <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1886년)의 제중원 배치도(도면 3)를 살펴보자. 도면 3의 빨간색 원(d) 주위에 점으로 표시된 것은 나무를 뜻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오리지널인 도면 3의 남색선 부위에는 나무가 없는데 똑같은 장소인 도면 2의 빨간선 부위에는 나무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또 도면 1의 백송이라고 표시된 부위에도 1886년의 원 도면에는 나무가 없다. (알렌이 1885년 6월경 선교본부에 보낸 도면에는 도면 2처럼 나무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 뒤에 나무들을 뽑았거나 옮긴 것으로 보인다.) 즉 도면 1과 2의 나무 표시에 문제가 있으며, 따라서 백송 앞에 서 있는 사진 속 건물에 대한 추정은 잘못 된 것으로 생각된다.

▲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은 백송의 북쪽 편에 세워져 있다. 표석 자리는 틀림없이 제중원 구내이다. ⓒ프레시안
사실 문제는 그리 복잡하거나 까다로운 것이 아닌 듯하다. 백송이 제중원 구내에 있었다면, 그 위치는 도면 3의 빨간원(d) 오른쪽 아래 부분일 수밖에 없다. 다른 장소에는 아예 나무가 없으며, (d) 위쪽은 방향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송과 마주 보는 사진 속 건물은 도면 3의 검정색(14)으로 표시된 개인 전용 병동(private ward)으로 생각된다.

문일평(文一平)은 "재동여고(경성여자고보) 기숙사는 옛날 유명한 박정승(박규수)의 집터이다. 그 뜰에 있는 백송은 수령이 육백 년쯤 된 조선에 드문 진목(珍木)으로 본디 박정승집 중사랑 뜰에 섰던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호암전집> 제3권>). 그리고 백송의 바로 북쪽에 "박규수 선생 집터"라는 표석이 1988년에 세워졌다.

이에 대해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다. 한 가지는 개화파들의 스승인 박규수(朴珪壽, 1807~1876)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 홍영식이 재동 35번지의 그 집을 구입한 것이다. 재동 제중원은 구조가 복잡한 점으로 보아 둘 이상의 가옥이 합쳐진 것이라는 추정대로, 홍영식이 원래 자기 집 옆에 있던 박규수의 집을 매입하여 확장했을 가능성이다. 또 한 가지는 박규수의 집이 제중원 자리인 35번지 바로 남쪽인 75번지에 있었을 경우이다(도면 4 참조).

도면 4 :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경성부 지적도 <일필매(壹筆每)>(1929년 발행)에 실린 재동의 한 부분. 외아문은 재동 83번지 및 76번지에, 제중원은 35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중원 자리가 "북부 재동 외아문 북쪽으로 두 번째 집"이라는 기록에서 추정한 것으로 다른 사실들과도 잘 부합한다. 그리고 외아문과 제중원 사이인 75번지에 가옥 한 채가 있었다. 일제시대의 지적도는 아직도 사용되며 지번(地番)도 대체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프레시안
두 번째가 맞고 문일평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백송은 제중원 바로 바깥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로 살펴볼 때 백송은 제중원 구내에 있었을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좀 더 뚜렷한 근거가 나와야 확실히 말할 수 있겠지만, 홍영식이 박규수의 집을 구입하여 자신의 집을 확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만약 그렇다면, 제중원은 갑신쿠데타의 주역 홍영식의 집뿐만 아니라 개화파의 비조인 박규수가 살았던 집에 세워진 셈이다.

백송의 위치와 도면 3의 건물 배열, 그리고 지적도를 잘 감안하면 아래의 도면 5와 같이 제중원의 건물 배치를 실제와 가깝게 복원하고 현재의 헌법재판소 건물 및 부지와의 관계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면 5 : 1880년대와 2000년대. 왼쪽은 도면 4의 제중원 터에 도면 3(<조선 정부 병원 제1차년도 보고서>의 제중원 배치도)을 얹어놓은 것이다. 경성부 지적도의 재동 35번지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잘 부합한다. 오른쪽은 최근의 헌법재판소(흰색 목[目]자 건물)와 주변을 공중에서 촬영한 것이다. 1886년 제중원의 북쪽은 지금 헌법재판소의 북쪽 담, 서쪽은 북서쪽 담, 동쪽은 주차장의 서쪽 끝 근처, 남쪽은 헌법재판소 건물의 북쪽에 이르렀다. 실제 측량을 하면 더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양쪽 그림의 붉은 네모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서 있는 백송을 가리킨다. ⓒ프레시안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는 알렌이 작성한 도면 3의 하늘색 표시(c), 즉 "당산나무"(sacred tree)에 관한 것이다. 필자는 "sacred tree"(당시로는 기독교와 관련된 나무일 리는 없을 것이다)라는 단어를 보면서 백송을 떠올렸다. 백송 이외에 영험한 나무가 그곳에 또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백송은 건물(개인 전용 병동. 박규수 집의 중사랑채였을 가능성이 있다)을 사이에 두고 알렌의 1886년 도면에 있는 "sacred tree"와 정반대쪽에 있다.

지금으로는 세 가지 가설을 생각한다. 첫째, 이제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백송이 아닌 다른 당산나무가 있었을 가능성으로, 가장 합리적인 추정일 것이다. 둘째는, 당산나무의 위치를 잘못 표시한 경우이다. 셋째는, 가능성이 매우 적지만 무슨 연유에선가 당산나무를, 즉 백송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심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 헌법재판소 건물 앞쪽에 세워져 있는 표석. 거의 모든 부분이 사실과 다르게 기재되어 있다. "국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프레시안
모처럼 헌법재판소까지 찾아갔으니 제중원 표석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우선 표석이 헌법재판소 건물 바로 앞쪽(동쪽)에 세워져 있는데, 제중원의 실제 위치인 북쪽 방향으로 옮겨야 한다. "박규수 선생 집터" 표석 옆에 나란히 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그보다 더 문제는 표석의 내용이다. 병원의 처음 이름은 "광혜원"이지만, "제중원"으로 개부표(改付標) 했으므로 표석의 제목을 "제중원 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며, 설립 주체, 설립 날짜, 개칭 날짜, 국왕의 호칭 등도 모두 바꾸어야 마땅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상세히 언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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