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선거 이후에는 권력구조 개편을 중심으로 한 개헌 논의가 어떤 식으로건 촉발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각 정당 및 유력 정치인들은 "개헌이 필요하다"는 원론에는 동의하면서도 각론에선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대통령 임기말에 촉발된 개헌 논의가 그러했듯이 이번 개헌 논의도 자칫 정치논리에 휘둘려 논란만 무성할 뿐 생산적 결실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기도 한다.
이처럼 민감한 화두인 개헌 문제를 정치권에 내맡기지 않기 위한 학계의 고민이 짙다. 28일 대화문화아카데미 주최로 열린 '새로운 헌법 필요한가?' 심포지엄에 참석한 학자들은 이른바 '1987년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개헌의 필요성에는 한 목소리를 냈지만 시기와 방법, 내용 등에서는 적지 않은 차이를 보였다.
"상례적 여소야대 극복 위해선 4년중임제 개헌해야"
먼저 양건 한양대 법학과 교수는 발제문을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를 일치시켜 동시 선거를 하며 4년 중임제를 실시하면 여소야대의 개연성이 축소되고 빈번한 선거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임제에는 초선 대통령이 재선에만 몰두할 염려가 있고, 재선 대통령은 처음부터 레임덕에 빠지기 쉽다는 단점도 있지만 여러 면에서 5년 단임제 보다는 낫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1987년 이래의 헌정체제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여소야대의 상례화'라는 게 양 교수가 개헌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출발점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합당, 의원 빼내오기, 연정(DJP연합) 등 비정상적 방법으로 여대야소를 조작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도 여소야대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양 교수는 "우리는 오랜 권위주의 경험 때문에 대통령제의 독재 위험성에 과민한 반면 여소야대가 지닌 문제는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며 "앞으로는 '제왕적 대통령'보다 '식물 대통령'의 위험성에 더 유의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 교수는 또한 "여소야대의 구조적 문제점 외에도 대통령 5년 단임제의 폐해도 심각하다"며 "졸속적 쟁책추진,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불일치 등으로 잦은 선거가 행해지고 국정운영도 자주 중단된다"고 4년 중임제 개헌을 촉구했다.
양 교수는 "영토조항이나 경제조항에 손을 댈 경우 개헌논의가 국정 효율성 차원이 아닌 소모적 이념논쟁으로 흐르기 쉽다"면서 "전면적 개헌은 시간을 좀 더 두고 준비하고 지금은 부분적 개량을 위한 개헌을 본격 검토할 때"라고 권력구조에 국한된 개헌을 주장했다.
"현정부에서의 개헌은 위험…차기 정부로 넘겨야"
정종섭 서울대 법학과 교수는 개헌의 필요성에는 적극 동의하면서도 개헌 시기는 차기정부가 들어선 이후를 적기로 봤다. 임기 말에 촉발되는 개헌 논의가 자칫 정치권의 입맛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정 교수는 "차기 정부부터 적용할 개헌이라면 이미 실기했다"며 이같이 주장했다.
이에 따라 정 교수는 "올해부터 준비해 2009년 말 경에 개헌을 실현하고 신헌법에 따라 2013년 신정부를 출범시키면 된다"는 개헌 로드맵을 내세웠다.
정 교수는 또한 "5년 단임제와 4년 중임제는 서로 장단점을 잘 따져 결정해야 한다"면서 "결선투표제의 도입과 부통령제의 도입은 고려해 볼만하고 입헌군주제에서 군주를 보좌하는 직위에서 비롯된 국무총리제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정 교수는 "영토조항은 반드시 존속되어야 하며 통일 후 영토의 확정을 위해 중국, 러시아와의 국경도 명시되어야 한다"고 영토조항을 포함한 전면적인 개헌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반체제 정당, 헌법적 대정당의 공격에서 헌법과 체제를 보호하는 조항을 강화해야 하고 19세기적 노동인식에 머물러 있는 노동권도 전면적 재검토해서 결사의 자유로 통합하고 나머지 노동권은 법률에서 정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토조항 수정, 경제민주화 규정 강화, 평화권 삽입 등도 중요"
반면 박명림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교수는 "다음 대선과 총선이 1987년 이후 처음으로 겹치고 다시 겹치려면 20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만큼 현 정부 하에서의 개헌이 가장 적기"라고 '즉각 개헌'을 주장했다.
박 교수도 4년 중임제, 부통령제 부활, 국무총리제 폐지 등 권력구조 개편에는 정종섭 교수와 비슷한 의견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또한 대선과 총선을 함께 실시하되 양원제를 도입해 비례대표 의원 선출을 위한 정당명부제 선거는 임기 중에 실시하자는 의견도 곁들였다.
그는 "비례대표 의원을 지역대표의 2분의 1 수준으로 증가시키고 비례대표 정당명부제 선거를 대통령 임기 중반에 실시하면 '중간평가' 성격을 지닐 수도 있다"면서 "이렇게 되면 임기불일치, 선거주기, 분할정부, 정당발전 문제에 대한 동시접근이 가능하고 주권충돌과 책임성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권력구조 만큼이나 경제와 사회에 관한 문제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실제 적용도 불가능하고 국제적 현실과 일치하지도 않는 영토조항은 최소한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밖에도 박 교수는 "임시정부와 건국 헌법 이래 핵심가치로 지켜 온 경제민주주의 가치와 조항은 존속해야 한다"면서 "한국의 경제현실을 고려할 때 균등경제와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 항목이 폐기된다면 결과는 크게 부정적일 것"이라며 일각의 경제민주화 조항 삭제 움직임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또한 박 교수는 EU헌법과 스위스헌법의 예를 들며 "21세기의 헌법 경향을 고려할 때 평화권, 생명권, 인격권의 삽입도 고려해야 하고 이주노동자 등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거주자들에 대한 인권 보장도 교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독점적 엘리트의 영역이던 헌법개정을 기본적 민주주의의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치권과 사회, 학계의 준비가 미흡하면 1987년처럼 권력구조와 대통령임기 문제가 졸속 타결될 수 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박 교수는 올해 지방선거 이후 정당-사회단체-학계 수준에서 '민주헌법제정 시민사회연대' 또는 '민주헌법제정 국민연합' 구성→2006년 말부터 국회 내에 당파성 없는 민간인(학자와 시민단체)으로 '민주헌법연구회' 설치→2007년 상반기에 국회 차원의 '헌법개정협의회'를 통한 헌법 제정 및 국민투표로 이어지는 3단계 로드맵을 제시했다.
한편 이 날 심포지엄에는 법학자와 시민단체 활동가 외에도 고건 전 총리, 김근태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이홍구 전 총리 등 정치권 안팎의 인사들도 다수 참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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