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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중원> 초대 원장은 알렌이 아니다"

[근대 의료의 풍경·10] '공립의원 규칙'

이번 글에서도 제중원 운영과 성격에 관한 오해에 대해 좀 더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오해의 중심에는 <제중원 규칙>과 '공립의원 규칙' 작성의 시기적 선후 관계가 자리 잡고 있다. <제중원 규칙>의 초안 격인 '공립의원 규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생도(生徒) 약간 명이 매일 학업하는 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고 휴일 외에는 마음대로 놀 수 없으며 학업에 정통하고 남달리 재능이 뛰어나 중망을 얻은 자는 공천하여 표양한다.
제2조 생도는 약을 제합(合藥製藥)하고 기계 등의 설치를 담당하며 의사의 지휘를 어기지 말고 따라야 한다.
제3조 서기 2명은 모든 문서·장부와 계산을 담당하며 하나하나 상세하게 해야 한다. 6개월마다 전체 통계를 낸 뒤 병원의 각 부서에 고감(考鑑)하게 한다.
제4조 당직 2명은 각 방을 정결하게 하고 의약과 여러 도구 및 원내 물품을 관리한다. 이유 없이 물품이 없어졌을 때는 그 죄를 조사하여 처분한다.
제5조 문지기 2명 가운데, 1명은 바깥문에서 환자의 성명을 먼저 기록하고 차례대로 패(牌)를 지급한 뒤 들어가도록 하며, 다른 1명은 중문에서 갑·을 등의 기호가 적힌 문패를 받아 살펴본 뒤 의사를 만나도록 허락한다. 빈패(貧牌)를 가진 사람은 원패(元牌)를 가진 사람이 모두 들어간 다음에 입실을 허락한다.
제6조 환자가 바깥문에서 이름을 기록할 때 동전 2전을 내도록 하며 가족이나 의탁할 자가 없는 경우에는 빈자패(貧字牌)를 주어 들어가도록 한다. 패를 잘 살펴본 다음에 그것을 가지고 들어가도록 한다.
제7조 사환은 5명 이내로 2명은 주방 일을 담당하며, 2명은 뜰을 청소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나머지 사환 1명은 물을 긷는다.
제8조 환자가 거동하지 못해 의사를 청해서 의사가 왕진을 하는 경우, 매번 동전 50냥을 선납하고 나서 의사를 만난다.
제9조 입원 환자는 다음과 같이 자신이 비용을 내야 한다. 상등환자의 일비(日費)는 동전 10냥, 중등환자는 5냥, 하등환자는 3냥이다. 가족이나 의탁할 자가 없는 사람은 본 병원에서 대준다.
제10조 약값은 상·중·하등 환자가 사용한 물품에 따라 비용을 치르도록 하며, 가족이나 의탁할 자가 없는 사람은 본 병원에서 대준다.
제11조 본 병원에 임용되는 모든 사람은 세 사람의 보증과 추천을 받는다. 만약 물품이 없어지면 물품의 값을 그 담당자에게 징수하고 담당자가 감당하지 못할 때에는 곧 세 사람의 보증 추천인에게 징수한다.
제12조 간병하는 시간은 오후 2시에서 4시까지이다.
제13조 문병인이 아닌데 허락받지 않고 들어왔을 경우에는 그 사람을 중징계하고 문을 지키는 사람에게도 태벌을 가한다.
(제13조와 제14조의 "문병인(問病人)"은 환자를 위문하러 온 사람이 아니라 환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제14조 문병인을 제외하고 학도와 간사인을 보러 오는 자가 있을 때는 바깥문에서 문지기를 통해 연락한 뒤 들어온다.


▲ 외아문 일지 격인 <팔도사도삼항구일기(八道四都三港口日記)>의 표지(왼쪽). <팔도사도삼항구일기>에 1885년 2월(음력, 날짜는 적혀 있지 않다)자로 수록되어 있는 '공립의원 규칙'. ⓒ프레시안

'공립의원 규칙'은 지난 회에서 살펴본 <제중원 규칙>과 일견 비슷하지만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다. 가장 뚜렷한 차이는 <제중원 규칙>의 제1조와 제2조가 없다는 점이다. 즉, 제중원 직제와 운영의 핵심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체계상으로도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제중원 운영과 부합하지 않는다.

▲ 일성록 1885년 8월 6일(음력 6월 26일)자. "제중원 당랑"에게 북학학도를 천거하라는 국왕의 지시로, <제중원 규칙> 제1조, 제2조의 존재를 뒷받침한다 ⓒ프레시안
예컨대, "국왕은 내무부, 외아문, 전환국, 기기국, 제중원의 당랑으로 하여금 15세 이상 25세까지의 북학학도 1인씩을 각각 천거케 하다"(일성록 1885년 8월 6일자)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제중원 당랑(堂郞, 당상과 낭청)의 존재가 명백함에도 '공립의원 규칙'에는 그 핵심적인 부분이 빠져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별도로 원(院) 하나를 설치하여 광혜원이라고 이름 부르고 외서(外署)에서 전적으로 관할하게 하는 동시에 당상과 낭청을 차출하는 것과 일체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모두 해당 아문에서"(<고종실록> 1885년 4월 14일[음력 2월 29일]자) 등 <제중원 규칙>에 따라 제중원이 운영되었음을 입증하는 조선 정부와 선교사들의 기록은 상당히 많다. 이런 점에서 규칙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제1조와 제2조가 당연히 들어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 '공립의원 규칙' 제1조의 "생도"에 관한 규정 역시 실제 운영 상황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어쩌면 제중원 설립 준비 과정에서 생도(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부서와 교육 기능을 논의한 흔적일 수 있지만 그러한 교육부서(제중원 학당)는 1년이나 지나서 마련되었다. 이 조항도 당시 현실에 맞게 <제중원 규칙>의 제3조로 수정되었다. '공립의원 규칙'의 제11조~제14조도 규칙이 확정되는 과정에서 탈락되었다.

▲ 1895년 9월 7일(음력 7월 19일)자로 반포된 <소학교령>. "관립소학교는 정부의 설립이오 공립소학교는 부(府) 혹은 군(郡)의 설립이오." 이때부터 "관립"(국립)과 구별되는 "공립"이라는 용어가 법령에 의해 공식적으로 쓰였다. ⓒ프레시안
그리고 "공립의원"이라는 용어는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일본공사관 의원 카이로세의 아이디어인 것으로 생각한다. 1886년 8월 14일 알렌이 외아문 독판서리 서상우에게 보낸 편지에 "공립병원(公立病院)"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그러한 표현을 한 연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어 원문에는 "Government Hospital"로 되어 있다. "관립"(국립)과 구별되는 "공립"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95년부터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일각에서는 4월 3일 알렌이 전달받은 것이 "초안"이고 여기에 알렌의 의견이 반영되어 '공립의원 규칙'으로 수정되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조선 정부는 초안 제1조와 제2조에서 한국인 관리를 책임자로 파견한다고 명기하여 제중원의 운영을 관할하려는 의도를 보였"지만 "알렌과의 협의 과정에서 이 부분이 완전히 삭제"되었으며, "즉 재정 지원 등 조선 정부의 관심은 좋으나, 실제 의료에 있어 자신이 불필요한 간섭을 받게 될 여지를 없애 버린 것이었다. 조선 정부도 이러한 알렌의 의도를 수용하여 가이세(카이로세)가 작성한 초안에서 이 부분을 삭제하였다"라고 주장하여 제중원의 성격과 운영권에 대해 실제와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요컨대, 조선 정부는 재정 지원 등만을 했을 뿐 처음부터 제중원의 운영권은 알렌에게 있었다는 것이며, 그에 따라 "제중원 제1대 원장 알렌" 등의 표현을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살펴본 대로 <제중원 규칙>은 외아문 차원의 병원 설립 준비가 마무리되는 1885년 4월 3일, 알렌에게 전달되었다. 알렌이 그 규칙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그에 따라 수정되었다는 언급이나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알렌은 그것에 대해 "테시카의 능력"이라고 하며 만족해했다. 그리고 제중원은 '공립의원 규칙'이 아니라 <제중원 규칙>에 의해 운영되었다.

알렌은 "제중원 제1대 원장"은커녕 나중에 상세히 살펴보겠지만 1887년 이전에는 "제중원 의사", 즉 제중원의 정식 직원도 아니었다. 알렌을 비롯해 외국인 의사들이 제중원에서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활동은 적어도 1894년까지는 조선 정부가 설립하고 운영한 제중원의 틀 안에서 이루어진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정부는 재정 지원 등만을 했을 뿐이며 제중원의 운영권은 외국인 의사에게 있었다는 주장은 1894년 9월 제중원 운영권이 에비슨(미국북장로교선교부)에게 이관되었을 때부터만 타당하다.

▲ 1885년 9월 7일자 알렌의 일기. "나는 이미 제공한 봉사 기간을 포괄하기 위해 5월초부터 보수를 받아내려고 (해관 의사 임용에 관한 계약서 작성 일자를) 8월 31일로 했다(it was dated August 31st to draw payment from the beginning of the Fifth Moon in order to cover the period of services already rendered)." 알렌이 해관 의사로 일한 것은 9월 초순부터이므로 "이미 제공한 봉사"는 제중원에서 일한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중원에서 일한 4월부터가 아니라 5월부터로 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프레시안
알렌은 병원 설립을 제안하고 그것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이 병원에 대해 모든 권한을 갖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 정부가 자신을 철저히 이용만 했다고 여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렌은 거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제중원과 인연을 가지고 거기에서 일하게 된 것만 해도 큰 성과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길모어가 "Dr. Allen, by his shrewdness and conservatism, had thus opened the way for the working of missionaries in a land which a little over two years before had been sealed against them"(<Korea from its Capital> 295쪽)이라고 평했듯이 알렌의 통찰력과 신중함이 길게 보아 선교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1887년부터 외국인 의사를 "제중원 의사"로 정식 임용하게 될 것을 왜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의사의 급료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알렌 자신도 <병원 설립 제안>에서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조선 정부는 1885년 9월초 알렌을 해관(세관) 의사로 임명했고 월급은 소급하여 5월부터 지급한 것으로 보아(1885년 9월 7일자 알렌의 일기) 그러한 설명도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해결해야 할 연구 과제이다.

'공립의원 규칙'에 대한 또 한 가지 잘못된 해석은 그것이 작성된 시기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에 생겼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1885년 2월(음력)에 작성되었다. 날짜가 적혀 있지 않지만 3월 17일(음력 2월 1일)부터 4월 2일(음력 2월 17일) 사이에 작성되었다가 알렌에게 전달된 대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 1886년 2월 1일자 <한성주보>. '공립의원 규칙'이 열 달이나 뒤늦게 게재된 연유에 대해서도 연구가 필요하다. 이때는 제중원 학당의 생도들을 모집할 때인데, 그것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프레시안
오해는 이 '공립의원 규칙'이 <한성주보> 1886년 2월 1일(음력 1885년 12월 28일)자에 "금년 정월 25일에 총리아문에셔 聖諭를 奉하야 병원를 齋洞西邊에 刱達하고 院號는 濟衆이라 하고 官員을 設하며 학도를 모와 院中의 두고 美利堅敎師 哉蘭(알렌)과 憲論(헤론) 兩人를 延請하며"라고 때 늦었을 뿐만 아니라 제중원 설립 날짜 등 오류가 있는 기사와 함께 게재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팔도사도삼항구일기>에 1885년 2월자(음력)로 수록되어 있는 사실을 몰랐던 연구자들(필자를 포함하여)은 <제중원 규칙>을 개정하여 '공립의원 규칙'이 만들어졌다고 오해했던 것이다. 또 그러한 오해에서 제중원에 대해 여러 가지 잘못된 해석이 가해지기도 했다.

두 회에 걸쳐 <제중원 규칙>에 대해 길게 언급한 것은 그것이 제중원의 성격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잘못된 해석이 제중원의 성격을 크게 오도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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