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연아가 영어 잘해서 금메달 땄나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연아가 영어 잘해서 금메달 땄나요?"

영어에 목숨 건 대학…교수·학생의 학습권은 어디로?

미국 대학에서 교수로 있는 A씨는 얼마 전, 한국에서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후배를 만났다. 학회 참석차 미국에 출장을 왔다가 연락을 한 후배는 A씨를 만나자마자 영어 강의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한 숨을 쉬었다. (☞관련 기사 : 대학교 영어 강의는 '개그쇼'?…교수도, 학생도 '영어 공포증')

A씨의 후배는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 대학에서 연구교수로 2년 동안 있었다고는 하지만 미국 학생을 대상으로 강의를 가르친 적은 없었다. 원서를 읽고 영문을 쓰는 것은 어느 정도 했지만 전공 내용을 영어로 강의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A씨에게 갑자기 영어로 강의를 하라니 제대로 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일반 상식도 아닌 전문 분야를 영어로 설명하자니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학과 계약을 맺을 때부터 일정 기간 동안 영어로 강의를 하기로 했기에 울며 겨자먹기로 강의를 진행해야 했다.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한국어로 된 교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영어 강의를 위해 원서를 교재로 사용하면서 강의뿐만 아니라 교과서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됐다. 결국 교수도 학생도 무엇을 가르치고 무엇을 배웠는지 모르는 악몽에 시달린다고 했다. 후배는 A씨에게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갈 때면 늘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던 A씨는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자신이 떠나온 한국의 교육이 완전히 몰락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사회과학부 교수들에게 영어 수업의 고충을 자주 듣는다"

우후죽순 늘어나는 대학교 영어 강의로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도 진통을 겪고 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쳐두고 영어를 강의에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A대학 교수는 "학교에서 영어 강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며 "하지만 유학 시절 배웠던 영어만 가지고 전문적인 용어 설명과 해석이 필요한 대학 강의를 한다는 건 사실상 무리"라고 설명했다.

▲ 대학교 영어 강의로 학생뿐만 아니라 교수도 진통을 겪고 있다. 모국어인 한국어를 제쳐두고 영어를 강의에 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기사와 관계가 없습니다.) ⓒ연합뉴스(자료)

하지만 대학에서는 글로벌화를 외치며 지속적으로 영어 강의를 늘리는 실정이다. 물론 무턱대고 영어 강의만 늘리는 게 아니라 안착화를 위한 노력도 동시에 기울이고 있다.

최근 대학에서는 신임 교수를 임용할 시 영어 강의 능력을 기본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재직 교수에게는 높은 인센티브 부여 등을 통해 영어 강의를 독려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학부 교육 선진화 선도 대학 지원 사업 등을 통해 영어 강의를 강조하고 있다.

<교수신문>이 조사한 내용을 보면, 전체 2444개 강좌 중 936개(38.5퍼센트) 강좌를 영어로 진행하고 있는 고려대의 경우, 2003년 이후 임용된 신임 교수는 최초 임용 3년간 전 강의를 영어로 진행해야 한다.

서울대의 경우 영어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에게 강의 개발비 200만 원과 강의 지원 수당 3만5000원(시간당)을 추가로 지급한다. 성균관대의 경우 2008년까지 강좌 당 80만 원을 지원했다. 부산대는 작년까지 강의 개설 시 일괄적으로 200만 원의 인센티브를 줬다.

하지만 영어 강의가 교육적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대표적인 영어 강의 대학 KAIST는 서남표 총장 부임 이후,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고 있다. 서남표 총장은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기 위한 선택"이라고 항변하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인문사회과학부 수업이 그렇다. 한국문학, 한국사, 동양사 등의 수업이 100퍼센트 영어로 진행됨에 따라 학생도, 교수도 제대로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대학 공과대학 최모 교수는 "사회과학부 교수에게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것에 대한 고충을 자주 듣는다"고 말했다.

공대 수업인 경우 학문 자체가 영미권이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는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게 한국말로 진행하는 것보다 나을 수도 있다. 최 교수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이공계의 경우, 원서가 영어이기에 원서를 가지고 공부를 하면 더욱 이해가 잘 되는 부분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수업을 진행하면서 세세한 부분을 설명할 때는 영어와 한국어의 표현차가 있기 때문에 나 역시 한국말로 진행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100퍼센트 영어 강의 시행 전과 후를 비교하며 "영어로 강의가 진행 된 이후 학생은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강의는 학생의 질문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실정"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교수도 학생도 모국어가 한국어인 상황에서 영어로만 강의를 한다면, 좋은 강의를 기대하긴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영어 강의를 100퍼센트 하도록 하는 건 어떻게 보면 폭력적인 처사"라며 "학습권과 강의권은 학생과 교수의 고유한 권리인데 특성에 맞춰 자율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 기본권 침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실 여건상 대학에서 영어강의를 제대로 진행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KAIST뿐만이 아니다. 여타 대학의 상황도 대동소이하다. 집중적으로 영어수업을 늘리고 있지만 정작 영어 수업의 효과는 이렇다 할게 없다. 그 이유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김명환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는 '한국 대학의 영어 교육이 나아갈 길'이라는 글을 통해 "교수·학생 비율, 현실 여건 등을 비춰 볼 때 대학이 영어 수업을 제대로 진행하긴 어렵다"고 지적했다. '인프라'조차 갖춰지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인센티브, 의무 수업 등으로 영어 강의를 강요한다고 이것이 제대로 진행되긴 어렵다는 이야기다.

김명환 교수는 "영어 강의는 세심한 배려 위에서 적절하게 제공되지 않으면 이미 존재하는 학생 간 영어 구사력 차이를 학점의 격차로 확대 재생산함으로서 영어가 능숙한 학생에게는 해이함을, 영어가 서툰 학생에게는 열패감만 심어준다"며 "더구나 영어 교육에 대한 피드백조차 없다면 더욱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보니 영어 강의 자체에 회의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대학이 영어에 몰입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학문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김무곤 동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멀쩡한 한국어를 놔두고 다른 나라 말로 강의를 하는 것은 한국의 대학이 세계 일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 간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영어를 더 많이 효과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데 이견은 없다"고 전제한 뒤 "하지만 최근 한국 대학의 영어 열풍은 그 도가 지나치다"고 말했다.

김무곤 교수는 "수단이어야 할 영어가 어느 순간부터 목적이 되어버렸다"며 그것의 문제를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내가 생각하기론 김연아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국제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연아의 국제화는 그의 기술력, 표현력 등이 글로벌에서 정상 수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영어 실력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영어는 그가 외국에서 활동할 때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김무곤 교수는 "대학에서는 국제화를 위해 영어 강의를 진행한다고 하지만 정작 국제화를 이룬다는 의미는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걸 의미한다"며 "하지만 대학에서는 국제화, 글로벌화를 외치며 학생들에게 영어만을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진정 필요한 전공 과정에서의 심화 학습, 전문성 등은 무시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당부했다.

"영어 강의 늘리는 건 필요하나 한국어의 중요성 간과하면 안 돼"

그렇다고 영어 강의를 아예 하지 않는 것 또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박찬길 이화여대 영문학과 교수는 "대학에서 영어 강의를 늘리는 것은 필요하다"며 "단 무작정 늘려가서는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았다.

박찬길 교수는 "학과 내용이 무엇인지 잘 따져보고 필요한 부분에서 영어 강의를 늘려가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모니터링을 통해 문제점을 진단하고 우리말로 진행할 때와 큰 차이가 없다고 판단 될 경우 확대하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영어 강의로 인해 간과되기 쉬운 부분을 지적하며 이에 대한 보완책도 주문했다. 박찬길 교수는 "아무리 영어가 국제적인 부분에서 쓰인다고 해서 한국어가 학문어, 즉 아카데미 능력을 상실하면 안 된다"며 "학문 언어로서 한국어의 장래도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천편일률적으로 강의에서 영어만을 사용할 경우, 한국어는 학문어로서 쇠퇴하게 될 거라는 게 박찬길 교수의 주장이다.

박찬길 교수는 "대학교에서 영어강의를 점차 늘려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대세라고 생각한다"면서도 "단 한국어와의 소통, 학생들 수준, 교수 수준 등을 고려해 유효한 강의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당부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대학에서는 영어 강의와 관련해 별다른 근본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학에서는 현재의 상황을 영어 강의 도입 초기 단계에서 발생하는 부작용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들은 이러한 부작용이 점차 안정화될 거라고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 대학내 영어강의와 관련된 부작용은 지속될 전망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