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를 시작하며 오십 줄을 넘어서기까지 먹기를 좋아하는 '판다곰'은 밥상머리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참으로 많이도 밥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 스스로 궁금한 것이 많아 책을 뒤적이기도 했고, 머릿속으로 수많은 공상도 했습니다. 맛이 궁금하면 장을 봐다 집에서 요리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여전히 많이 남아 아직도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이제 <프레시안>의 밥상머리에 앉아 여러 독자와 함께 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밥상 위의 곡식, 고기, 생선, 김치, 된장, 간장, 나물, 숟가락, 젓가락, 술과 차, 그 모든 것이 이 식탁의 이야깃거리입니다. 음식의 맛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음식의 역사와 변화를 함께 이야기할 것입니다. 여러 독자와 긴 시간을 함께하는 이 식탁이 즐겁기를 기대합니다. 이 연재를 하는 판다곰은, 짤막한 키에 먹기를 좋아해 살이 찐 둥그런 체격과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눈가에 진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제 스스로 붙인 판다곰이란 별명을 남들도 손쉽게 받아들였나 봅니다. 어려서부터 먹는 것을 밝히고 직접 요리도 했지만 바쁜 사회생활에 그다지 많이 음식을 만들지는 못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타이완에서 중국 미술사를 공부했지만 정작 직업으로 택한 것은 책 만드는 '출판쟁이'입니다. 현재 지호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자신의 취미대로 <설탕과 권력>, <음식의 맛, 자유의 맛>, <소금과 문명>, <감자 이야기>, <초콜릿>과 같은 음식과 관련된 책을 몇 권 냈지만 모두 절판된 상태입니다. 판다곰의 이름은 장인용입니다. |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모를 때가 있다. 일을 하다가도 때가 되면 '먹자고 하는 일인데' 하며 밥 먹자고 보챈다. 날마다 삼시 세 끼를 먹어야 하는 밥이지만 밥의 의미는 각별하다. "밥 먹었니"가 인사가 되고, 사람을 만나자는 이야기도 흔히 "밥이나 같이 먹자"라는 말로 대신한다.
밥상머리 마주하는 가족은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가 되고, 이 외연은 더욱 넓어져 한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는 '한솥밥' 먹는 사이가 된다. 한솥밥을 강화하는 의미는 회식으로 이어지며, 함께 밥 먹고 술 마시는 사이로 진전된다.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의 사귐도 모두 밥을 매개로 이루어지며, 애인을 사귀는 것도 그러하다. 혼자 먹는 밥이란 쓸쓸하기 짝이 없고, 다만 배고픔을 면하고자 억지로 먹을 뿐이다.
신도 밥을 먹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고 백일이 되면 '백일상'을 차려 잘 자라게 되었음을 축하하고, 한 해가 지나면 '돌상'을 차려 친척 친지들이 모여 무병장수를 기원해준다. 생일을 맞는다는 의미는 태어날 때 어머니가 먹던 미역국과 생일상으로 되살아난다. 입학, 졸업, 취업을 축하하거나, 꼭 그런 일이 아니어도 기쁨을 표시하는 일은 밥을 사거나 함께 먹는 일로 형상화되며, 인생을 함께하기를 기약하는 약혼식이나 결혼식도 언제나 같이 먹는 밥으로 마무리한다.
인생의 황혼에 장수를 축하하는 회갑과 고희도 모든 자식과 친지들이 참석해 그득히 쌓아올린 음식들과 함께하는 자리고, 죽어서 초상을 치를 때도 손님들에게 밥을 먹여 보내야 상주들은 안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죽어서까지 기일과 명절에는 밥을 사이에 두고 망자와 후손들이 재회한다. 제사를 올리는 자리에 음식이 없을 수 없으며, 가난에 시달려 평소에는 거의 굶더라도 제사상에는 쌀밥 한 공기는 올려야 하는 줄 알았다. 지상에서 사람들과의 나눔이 밥이었듯 망자와도 밥을 마주하고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신과의 접촉에도 어느 종교, 어느 문화권에서나 음식이 함께한다. 굿판이 벌어지면 온갖 떡과 음식이 가득한 상이 차려지고 이 음식들로 신을 맞는다. 아무리 없는 살림에 보잘것없는 신과의 만남에도 밥 한 그릇이 없을 수 없으며, 하다못해 부녀자가 치성을 드리는 데에도 맑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빈다.
동물을 키우는 유목민은 주로 동물을 신과의 교통에 쓰이는 제물로 쓴다. 농사를 짓는 정착민도 동물을 희생으로 쓰기는 하지만 역시 자신들의 농산물이 주를 이룬다. 기독교는 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구약에 나오는 야훼에 대한 제사는 동물을 희생으로 바쳤고 예수도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여 술과 떡을 제자들과 나누었다.
이렇듯 밥이 지닌 의미는 다른 그 무엇보다도 크다. 집과 옷의 의미도 크다고 하지만 밥은 생명과 직접 연관된 것이기에 이렇듯 많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다.
무엇을 먹을지 본능에 물어보라
현생 인류가 지구에 등장한 것을 대략 10만 년 전이라 치면 9만 년에 해당하는 세월에 대해서는 우리가 현재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저 구석기시대의 유물로 1만 년 이전의 생활을 조금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인류가 도구를 써서 사냥했으며 불을 이용했다는 것은 알지만 실제로 어떻게 고기를 찢고 불에 굽고 요리했는지, 또 열매와 고기를 함께 먹었는지, 요리라고 할 만한 게 있었는지조차 모른다. 다만 여느 동물들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바닷가에서 딴 굴을 움푹 파인 돌에 바닷물을 붓고 짜게 조리했을 수도 있으며, 사냥한 짐승의 고기를 동굴에 매달고 훈제를 했을지 모르며, 우리가 생각지 못하는 그 어떤 조리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사냥한 동물의 내장을 다 먹었는지도 지금은 알 수 없다. 예컨대 어떤 서구인이 대양을 지나다 조난을 당했다. 다행히 낚시 도구가 있어서 낚시로 허기를 메울 수 있었다. 서구인인지라 처음에는 살코기만 먹었다. 시간이 지나자 이 표류하는 서구인은 자신의 관습에 반해 내장을 먹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먹고 싶어졌다는 것이고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아주 맛있었다고 회고했다. <디스커버리>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내용이다. 생선의 흰 살에는 미네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의 뇌가 미네랄을 섭취하기 위해 내장을 먹으라는 명령을 내리고 그에 따라 미네랄을 보충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람에게는 본능적으로 몸이 원하는 것을 섭취하고자 하는 능력이 있음을 시사한다.
구석기 이전의 원시시대에도 사람에게는 다른 동물들처럼 몸에 필요한 것을 자연에서 찾아 먹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농사를 짓고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채취 생활에서 먹음직한 것을 골라 씨앗을 심고 수확을 기다렸다. 수렵 생활도 변하여, 온순하고 먹기 좋은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며 길러 알과 고기를 얻었다.
음식물을 얻는 방법만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음식을 이전보다 훨씬 세심하게 가공하고, 재료들을 섞고 조리하는 방법도 더욱 안정되어 갔을 것이다. 조리 기구도 이전보다 훨씬 정교화하기 시작했다. 한곳에 머무르는 생활은 수확기가 아닐 때를 대비하는 방법도 발전시켰다. 곡식을 갈무리하고 채소를 저장하며, 고기를 말려 추운 겨울을 대비하는 지혜도 익혔다. 정착 생활은 단순한 보관만이 아니라 재료들을 발효시키는 것과 같은 화학적 변화에 이르기까지 음식의 조리 기술을 발전시키고, 단순히 익히는 방법에서 벗어나 끓이고, 찌고, 굽고, 볶고 하는 여러 기술을 개발했다.
ⓒ프레시안(손문상) |
오락으로 바뀐 음식
무엇보다도 농사와 목축이 가져온 변화는 음식의 주재료들이 어느 정도 고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기후와 토양에 맞는 작물들을 저마다 심었으며, 그 이전보다는 음식 재료가 단순화되는 과정을 겪었다. 농사를 짓는다고 해도 일정 정도는 채집이나 수렵 활동을 했겠지만 그 기회나 시간은 현저히 줄었다. 그 대신 재료의 선별과 융합을 통한 실험으로 새로운 조리 방법을 고안하거나 재료의 특성을 더욱 개발하는 쪽으로 음식의 발전이 지속되었다. 그런 면에서 주재료 맛이나 풍미나 향기를 위한 재료들을 모으고 재배하는 기술도 발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재료의 수집과 혼합이라는 것은 굉장히 독창적인 형태의 발전이다. 가령 재료를 섞고 단계마다 첨가할 재료들을 추가하고 조리 방법을 정연하게 만드는 것은 상당히 고난도의 창의적 작업이다. 어느 정도 요리 형태가 이루어지고 그 형식이 보편화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보수적인 가족의 입맛부터 극복해야 하며, 그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세대가 걸릴 수도 있다.
신석기시대 이후, 부와 권력의 집중은 음식에 대한 기호를 극한으로 향하게 한다. 음식은 이제 생명 연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식도락이라는 즐거움을 찾는 하나의 오락으로 변모하고 만다. 로마시대의 귀족들은 한 끼에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게 아쉬워 식도락을 위해 입에서 맛만 보고 뱉어내는 극한의 방법까지 썼다.
전문적으로 음식을 하는 요리사라는 직업이 나타났고, 이 요리사들은 창의력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요리법과 음식을 개발했다. 재료에 대한 수요도 끝이 없어 머나먼 곳의 희귀한 재료를 수입했으며, 많은 종자를 가져다 재배하기까지 한다. 로마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권력층들은 부를 이용해 식도락을 탐미했다.
종자와 가축의 이동은 무역상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후추와 같이 기후와 풍토 때문에 재배할 수 없는 재료들은 수입으로 해결했다. 구대륙에서 이루어지던 점진적인 이동은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함께 요동치게 된다. 수많은 신대륙 작물이 구대륙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하고 식물들은 저마다의 경로를 통해 구대륙으로 번져간다.
구대륙의 작물들도 신대륙에서 노예 노동을 통해 상업적 재배가 대량으로 시작된다. 상업적 재배는 다시 소비자를 필요로 하며 산업혁명으로 늘어난 노동자들은 이렇게 대량 생산된 식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점차 시민사회로 접근함에 따라 노동자들도 풍족한 식생활을 즐길 여유가 생겼지만 아직도 지구의 곳곳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다.
순대에서 부대찌개까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식생활이 바뀐 것은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수렵, 채취에서 시작하여 농경 사회로 정착했으며 외국, 특히 중국을 통해 많은 종자를 들여왔다. 고대에는 그다지 큰 차이가 없었을 음식들이 차츰 '우리 것'으로 특징을 명확히 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새로운 재료가 들어온 근대의 큰 변화를 겪고도 뚜렷한 특색이 있는 음식 문화를 유지했다. 현대에 이르면 그 변화는 거의 혁명적이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식생활은 여전히 한식이라는 커다란 테두리를 유지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린 시절 길들인 입맛을 유지하는 것이다.
어릴 적 입맛이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손맛이다. 그 어머니의 손맛은 다시 할머니로부터 이어온 입맛이다. 물론 자라나 외지에 나가 살기도 하면서 입맛이 변하기는 하지만 그 어릴 적의 입맛은 늙어 노인이 될 때까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 맛에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은 그치지 않는다. 가족이란 핏줄과 함께 입맛을 나눈 사이고, 그래서 명절이면 함께 모여 음식을 마련하고 정뿐만이 아닌 입맛을 나눈다.
입맛을 나눈다는 것은 가족만의 일은 아니다. 고향의 친구들과 동향 사람들은 대개 같은 입맛을 가지고 있다. 동향 사람임을 확인하는 일은 고향의 옛일과 사람들의 친분으로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고향의 입맛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동향 사람들의 만남은 제 고장의 음식을 먹으면서 비로소 고향의 훈훈한 정감이 살아나고 동질성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평양냉면, 함흥냉면, 설렁탕과 같은 향토 음식을 파는 곳에는 노인들이 고향의 맛을 찾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온다. 고향의 사투리로 이야기하며 고향의 음식을 먹는 귀소본능이라 하겠다.
하지만 새로운 맛을 향한 갈구도 그에 못지않다. 이제 서울에서도 웬만한 서구나 동남아시아의 음식을 먹을 만큼 외국 음식을 파는 곳이 늘어났다. 피자와 햄버거, 프라이드치킨과 같은 패스트푸드가 이미 아이들의 입맛을 점령한 지도 오래다. 새로운 입맛에 길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아이들은 적응력이 빠르다. 어른이라 하더라도 외국 여행을 통해서도 새로운 입맛에 많이 동화된 편이다.
하지만 새로운 입맛을 찾는 것과 먹던 것만을 찾는 이 두 입맛은 서로 공존할 수 있다. 식생활의 변화는 느린 것 같지만 아주 꾸준하게 변화한다. 새로운 것은 받아들여지는 데에 시간이 제법 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는다. 다만,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완전히 대체하는 방향이 아니라 기존의 방식에 흡수되는 형식으로 변화한다.
전통의 변용이,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다. 아주 이질적인 것들은 자리 잡기가 쉽지 않지만 서로 섞일 수 있는 것이라면 혼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순대를 먹던 사람이 소시지를 받아들이는 데에 큰 문제가 없고, 소시지는 다시 찌개에 들어가 부대찌개로 변화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과연 밥은 무엇인가
음식이란 것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정치, 경제, 사회, 기술 등 여러 요소가 혼합된 인간 문화의 정수다. 우리가 먹는 음식과 재료, 그 가공과 조리 방법, 음식을 먹는 방식과 태도, 연회와 제사는 인간의 문화에서 아주 핵심적인 것들이다.
요즘 들어 삶의 질을 강조하면서 풍부해진 음식과 재료에는 아주 많은 신경을 쓰지만 우리 음식 문화에 대해서는 막연한 생각만 할 뿐이다.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법과 건강식은 유행하지만 정작 우리가 먹는 음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거의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먹는 것은 전통이 깊어서 아주 훌륭한 것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그 배경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문화인류학에서 음식이 아주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관심이 조금 멀어진 듯하다.
우리에게 밥이 과연 무엇이고, 먹는다는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은 바로 우리를 이해하는 일이다. 밥이 생명이고 인생이며 즐거움인 것은 틀림없겠지만, 밥에 담긴 내력과 함의는 결코 만만치 않다. 이제 밥상머리에서 밥과 반찬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하나하나 귀를 기울여보자. 밥은 결국 하늘이고 우리 자신을 키운 것이라는 사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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