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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분홍신'은?…'홍대 앞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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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은? '분홍신'은?…'홍대 앞 잔혹사'

[여기가 용산이다] '작은 용산' 두리반을 지키자!

버스에 오른다. 10분도 채 달리지 않아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고 육두문자로 적힌 펼침막이 펄럭이는 게 눈에 띈다. 벌써 반 년 넘게 내걸린 절규다. 눈을 감는다. 홍대입구역 근방에도 저렇게 절규하는 '사람'이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불합리한 재개발에 맞서 처절하게 농성하고 있는 식당 두리반의 소설가 유채림!

한참 동안 침묵하고 달리던 버스가 홍대입구역을 알린다. 눈을 떠보니 공항철도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공사장이 시야에 잡힌다. 차창에 바짝 달라붙자 가림막 너머로 유채림의 농성장인 두리반이 겨우 보인다. 못 와본 사이 '토지는 10배 매입했는데 세입자는 알거지'라고 쓰인 펼침막 네댓 개가 내걸려 있다.

무사하구나.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미 지나친 두리반 쪽을 돌아보니 공항철도공사 현장이 길게 이어져 있다. 2010년 말 개통 예정인 공항철도 역사와 2호선 홍대입구역 사이에 환승 통로를 시설하는 것이란다. 2006년 3월 16일, 마포구청은 공항철도 역사가 들어설 인근을 '지구 단위 계획' 지역으로 발표했고, 그로 인해 이곳 상가 세입자들은 '도시 및 주거 환경 정비법'이나 '상가임대차보호법'의 보호도 전혀 받지 못하고 알몸으로 쫓겨난 터다.

세계 경제 대국 11위니 뭐니 떠벌리는 나라의 수도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만행이다. 투기 자본을 규제하고 서민을 보호해야 할 행정관청이 오히려 투기 자본을 부추겨 서민을 알거지로 내모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는 왜 이토록 잔인한가. 이런 작태가 언제까지 용인되어야 하는가. 묵묵히 일하는 것으로 이 사회를 떠받쳐온 민초들을 보듬기는커녕 왜 자꾸 벼랑으로만 내모는가.

볼일을 끝내고 서둘러 홍대입구역 두리반으로 향한다. 꽃피는 춘삼월에 칼끝 같은 황사바람이 몰아친다. 이쯤이야 별것 아니지. 농성장에서 기나긴 겨울을 난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삐 걸음을 놓는다. 철거 현장 안쪽을 따라 두리반으로 가는 동안 '아리랑'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했던 갈빗집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텅 빈 한옥은 문짝이 덜렁거리고 쓰레기가 쌓여 있다. 작년 이맘때쯤 보았던 용산의 스산한 풍경을 다시 보는 듯하다.

유채림이 농성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남아 있던 신발 가게 '분홍신'은 그새 사라지고 없다. 돈만 된다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자본에 밀려 억울하게 쫓겨난 '분홍신'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는 투기성 강한 이권 사업으로 서민들은 수없이 거리로 쫓겨나고 있는데, 이 참혹한 현실을 개선할 방도는 없는 걸까. 막개발로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그 대가로 민간 건설 업자들만 막대한 개발이익을 챙기는 부조리를 어떻게 하면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두리반에 들어선다. 먼저 와 있던 목사들과 이곳을 드나들며 안면을 튼 이들이 나를 반긴다.

▲ 홍익대학교 앞 '두리반' 식당은 그곳에 존재해야 한다. 누구도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상'을 의미하는 두리반을 걷어찰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다. ⓒ프레시안(최형락)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유채림이 이윽고 얼굴이 벌게진 채 투기꾼들을 앞세워 한국토지신탁이 행한 짓거리에 대해 성토하기 시작한다. 지금은 공터로 남은 자리에 원래 4층 건물이 있었고, 지하에 라틴댄스학원이 세 들어 있었다. 한국토지신탁은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유리창을 박살내고, 건물 벽에는 '철거' '위험'이라는 글자를 써갈겨대 아예 정상 영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라틴댄스학원은 끝까지 싸워야 했으나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냥 알몸으로 쫓겨나는 길을 택하고 말았다. 꽃집은 수도를 끊어 영업을 방해했고, 두리반과 다모아주점은 에어컨 실외기의 냉매를 빼내는 방법으로 영업을 방해했다.

사람의 생명만 그렇게 짓밟아댄 것이 아니다. 두리반 뒷마당에 있던 100여 년 된 느티나무를 보라. 건물과 토지를 매입하기 바쁘게 한국토지신탁은 느티나무부터 베어버렸다. 기존의 모든 생명을 가차 없이 쓸어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용산에서 그랬듯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것은 죄다 쓸어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 쫓겨나고 다 베어버린 자리에 두리반만이 남아 있다. 유채림은 투쟁할 수밖에 없어 투쟁하는 거라고 말했다. 먼저는 자신을 위해서지만, 줄줄이 계속되고 있는 재개발 지역의 상가 세입자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이 이겨야 한다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네 식구의 생계가 달린 문젠데 달랑 이사비용 300만 원만 받고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재개발 시행사인 한국토지신탁과 시공사인 GS건설, '지구 단위 계획' 지역이라는 행정 카드로 이들 자본의 반사회적이고 반인륜적인 행위를 합법화시켜준 마포구청을 상대하는 투쟁이기에 버거워 보인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 그와 같을까.

늦은 밤, 두리반을 나설 때는 철늦은 눈이 내린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난다. 길을 덮은 눈 때문에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간다. 그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두리반 생각으로 꽉 차 있다. 90여 일의 농성으로 수척해진 유채림과 그를 돕는 이들의 얼굴이 차창에 어린다. 그런대로 마음은 좀 놓인다. 유채림과 손을 잡고 이 사회의 불의, 부정과 맞장 뜨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다윗의 작은 주먹이지만 골리앗에게 돌을 던져보겠다는 그들의 의지가 결연하기 때문이다.

눈보라를 헤쳐 나온 버스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육두문자 펼침막 앞을 천천히 지나간다. 이 척박한 현실에서 가장 가능성 있는 대안이란 강력한 연대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 연대에 나도 기꺼이 어깨를 걸리라 다짐한다. 부디 유채림의 네 식구가 벌어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생활 터전이 주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면서, 반드시 봄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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