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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고종은 왜 미국을 선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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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고종은 왜 미국을 선택했나?

[근대 의료의 풍경·8] 제중원의 탄생

제중원 설립에 우연적인 요소가 없지 않았지만 서양식 의료 기관을 세우려는 조선 정부, 특히 국왕의 의지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러한 점을 여러 대목에서 읽을 수 있는데, 우선 국왕은 묄렌도르프에게 서양식 병원과 의학교 설립 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했다. 1884년 여름, 잠시 조선에 왔던 일본 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Robert Maclay)가 김옥균을 통해 제안한 병원과 학교 설립에 대해 허가의 뜻을 밝혔다. 지난번에 살펴보았듯이 미국 공사를 통해 알렌에게도 의료 사업을 허락하거나 은근히 장려하겠다는 언질을 준 바 있었다.

국왕이 맥클레이와 알렌에게 준 언질이 독자적인 의료 사업의 허락을 뜻하는지, 국립병원 설립과 운영의 파트너로 생각한 것을 뜻하는지는 알기 어렵다. 맥클레이에게 한 약속에 따라 감리교 선교 의사 스크랜튼이 1885년 5월 조선에 와서 9월에 자체적으로 진료소(施醫院)를 열었다. 스크랜튼이 알렌에 앞서 왔다면 그가 알렌의 역할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양식 병원을 세우겠다는 국왕의 의지가 강했다 하여, 1882년에 대민 의료 구휼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를 폐지(革罷)한 데 대해 "서양식 의료 기관을 설치하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추론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다. 그 무렵 국왕은 위정척사파를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동도서기" 원칙을 밝힌 정도이지 서양 의술을 도입할 구체적인 계획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 "동도서기" 원칙을 밝힌 국왕의 전교(傳敎). <고종실록> 1882년 8월 5일자(음력). 임오군란이 발발한 지 두 달 뒤로, 국왕의 "개화" 의지가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국왕이 추진한 개화는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었다. ⓒ프레시안
기계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서양을 본받는 것을 보기만 하면 대뜸 사교(邪敎)에 물든 것으로 지목하는데, 이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그들의 종교는 사교이므로 마땅히 음탕한 음악이나 미색처럼 여겨 멀리해야겠지만, 그들의 기계는 이로워서 이용후생할 수 있으니 농기구·의약·병기·배·수레 같은 것을 제조하는 데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그들의 종교는 배척하고, 기계를 본받는 것은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설령 서양식 병원을 설치할 구상을 가졌다 하더라도, "백성"들을 위하는 생각이 있었다면 실제로 그것을 만들고 난 뒤에 혜민서를 폐지하면 될 일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혜민서와 활인서를 없앤 일은 국가의 최소한의 대민 복지(구휼) 기능마저도 포기한 것이었으며, 국왕이 내세우는 "인정(仁政)"이 허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1885년 1월 27일 알렌의 "병원 설립 제안"(朝鮮政府京中設建病院節論)이 조선 정부에 제출됨으로써 제중원 설립 준비가 시작되었다. 미국대리공사 폴크(George Clayton Foulk)의 추천서를 덧붙여 외아문 독판 김윤식(金允植)에게 제출된 병원 설립 제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귀 정부에서 다행히 저로 하여금 (백성을) 두루 보호할 방도를 베풀게 하신다면, 저 또한 서양 학문으로 조선의 병든 군사들과 병든 선비들을 지극히 필요한 방도로 치료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조선의 생도들이 서양의 의법을 배워 약을 쓰는 방법을 알 수 있고 또 조리하는 절차를 깨닫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貴政府如以使僕幸垂周護之道 則僕亦使西洋學文能有朝鮮病軍病士處極要之道 且有朝鮮生徒 亦學西洋醫法 能識用藥之法 又覺調理之節矣)

조선 정부에서 병원을 건립하여 운영한다면, 저는 책임자의 임무를 담당하겠으며, 귀 정부의 연금은 비록 한 푼일지라도 받지 않고자 합니다. (朝鮮政府如或營建病院 則僕當主首之任 而於貴政府年金 則雖一錢不欲取矣)

몇 가지 조건만 해결되면 충분히 병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1. 한성에 있는 공기가 잘 통하고 그윽하며 정결한 큰 집 한 채. 1. 병원 운용에 들어갈, 등불과 연료, 의사를 보조하는 간사 월급, 병자를 돌보는 간사 월급, 하인 등속의 월급, 그리고 가난한 환자들의 매일의 음식 등. 1. 각종 약재 가격의 차용금 300원. (此以數件事 亦足以設建 一 朝鮮京中空氣通行 淸幽精潔大一家屋 一 病院入用之財 則燈燭柴炭 與爲醫師幹事人月給 爲病者幹事人月給 下人等屬月給 又貧寒病人每日食飮等節 一 各種藥材價之假三百圓)

조선의 대군주와 정부에서 이 몇 가지 일에 대해 윤허해 주신다면, 저는 마땅히 의사 한 사람을 초청할 것이니, 비용이 들어가면서부터 여섯 달 뒤면 능히 이 병원을 세울 수 있습니다. (而朝鮮大君主政府 此等事件如有好允之道 則僕當招致醫師一員 自費六朔之後 能建此院)

한성에 병원이 건립되면 이것은 조선 정부의 병원입니다. (建院于朝鮮京中 此是朝鮮政府之病院)

이 제안에서 알렌은 "책임자의 임무를 담당하겠다(當主首之任)"라고 했는데, 병원 운영의 모든 권한을 갖기 원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국 진료에 한정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알렌이 1885년 6월경 선교본부에 제출한 <조선에서의 의료 사역>(Medical Work in Corea)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와 제중원과의 관계는 단지 의료에 관한 관리 업무를 제공하는 것으로 확실히 이해되었습니다. (Our connection with it is distinctly understood to be simply in furnishing the medical superintendence.)"

▲ 1885년 1월 22일자 알렌 일기에 기록되어 있는 병원 설립 제안(Proposal for founding an Hospital for the Government of His Majesty). 실제 조선 정부에 이것이 접수된 것은 1월 27일로 며칠 동안 한문으로 번역하는 등의 작업을 했을 것이다. ⓒ프레시안

이렇듯 알렌이 병원 설립 제안을 제출할 수 있었던 데에는 민영익의 부상을 치료하면서 왕실과 정부로부터 얻은 신임이 크게 작용했다.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정황은 1886년 육영공원 교사로 조선에 온 길모어(George William Gilmore, 1858-1933)가 남긴 다음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 길모어의 <Korea from its Capita>(Presbyterian Board of Publication, 1892년) 295쪽. 이 부분의 번역문('한국의 초기 선교 사업', <향토서울> 제4호, 1959)에는 "operation"을 "수술"로 번역하는 등 몇 가지 오역이 있다. ⓒ프레시안
반란(갑신정변)이 있은 지 얼마 뒤 (의사 알렌이) 국왕과 면담하는 중 서양의 병원 업무가 국왕의 관심을 끌었다. 의사가 병원의 운영 방식 및 그 이점(利點)들을 설명하자 국왕은 매우 흥미로워 했고 수도에 그러한 병원 하나를 세울 것을 제의했거나 의사 알렌의 그런 제안에 맞장구를 쳤다. 이에 대해 알렌은 깊이 반기는 바이었다. (<Korea from its Capita> 295쪽)


3개월여 전에 의료 사업에 대한 국왕의 언질을 공사 푸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받기는 했지만, 갑신쿠데타로 정세가 매우 어수선하고 개화에 대해 반동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가운데 알렌이 곧바로 병원 설립 제안을 제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길모어의 언급처럼 국왕의 제의나 내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실제 병원 설립이 알렌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수월하게 진행된 사실도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알렌은 병원 설립에 6개월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불과 두 달 남짓 뒤에 제중원이 탄생했다. 국왕이 새 병원의 설립을 재가한 날은 2월 29일(음력)로 춘삼월이 시작하는 바로 전날이었다. 봄에 의료 사업이 시작될 것이라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것이었을까?

국왕이 서양식 병원을 세울 생각을 가졌으면 소관 부서에 지시해서 추진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알렌에게 이니셔티브를 주는 방식을 취했을까? 여기서 국왕의 외교적 고려와 계산을 생각하게 된다. 임오군란과 갑신쿠데타 등을 겪으면서 국왕은 일본과 청나라를 매우 경계하게 되었고, 다른 서양 나라들도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오직 조선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여긴, "아름다운 나라 미국(美國)"만이 조선과 국왕의 편이 되어 주리라고 기대했다. 물론 청나라의 권고나 <조선책략(朝鮮策略)>과 같은 책의 영향도 있었다.

국왕으로서는 서양식 병원을 세우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러한 과정을 통해 미국과 더욱 돈독한 관계를 가지기를 원했다. 국왕은 알렌을 통해 "미국 끌어당기기"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렌의 일기와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알렌은 묄렌도르프가 병원 설립을 방해할까 두려워했다. 알렌이 갑신쿠데타 때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묄렌도르프가 왕진을 청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만약 묄렌도르프가 나의 병원 설립 제안 소식을 들으면 나의 모든 계획을 방해하거나 묵살할지도 모른다. (1월 22일자 일기)

저는 어떻게 해서든 묄렌도르프의 통제 아래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폴크 대위를 통해 (병원 설립을) 신청했는데 그는 푸트 장군처럼 묄렌도르프를 싫어하기 때문에 묄렌도르프가 제 선교 계획에 해를 입히고 제 병원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게 할지 모릅니다. (2월 4일자 편지)

묄렌도르프가 정부 일로 일본에 가 있는 동안 폴크 대위는 병원 일이 잘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우리는 병원이 순항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4월 3일자 편지)

저는 어제 묄렌도르프와 두 시간 가량 얘기했습니다. 처음 그는 병원을 없애겠다고 하다가 마침내 힘을 다해서 저를 돕겠다고 했을 뿐 아니라 몇몇 선교사를 정부 학교들에 고용하겠다고까지 약속했습니다. (4월 5일자 편지)

하지만 바로 위의 편지처럼 위협은 있었을지언정 실제로 묄렌도르프의 방해는 없었다. 병원을 없애겠다는 위협도 병원 일에서 배제된 데 대한 화풀이 성격이었다. 알렌은 개인적으로 묄렌도르프를 경쟁자로 경계했지만, 당시 더 중요한 측면은 조선, 미국, 청나라 사이의 세력관계였다. (묄렌도르프는 몇 달 뒤에는 왕실의 지시로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밀약 체결에 관여해 청나라의 눈 밖에 나게 되었지만, 이 무렵에는 청나라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다.)

병원 설립의 책임자로 몇 해 동안 근대 문물 도입을 주도해온 묄렌도르프가 아니라, 새로 외아문 독판이 된 김윤식을 선정한 데서도 미국을 고려하는 국왕의 방침을 읽을 수 있다. 묄렌도르프가 병원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건의안이 제출된 지 꼭 20일 뒤인 2월 16일에 병원 설립 책임자로 임명된 김윤식은 이틀 뒤 미국공사관을 직접 방문하여 홍영식의 집을 병원 건물로 결정했음을 통보했다. 갑신쿠데타 실패 후 책임자급으로는 유일하게 망명하지 않고 남아서 참살당한 홍영식의 집이 최초의 근대식 국립병원으로 정해진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몰수된 역적의 집이므로 따로 구입 비용이 들지 않고, 비교적 넓어서 병원으로 쓸 만하다는 점이다. 또한 제중원을 관할할 외아문 바로 옆에 있어 관리에 편리한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외아문은 종로구 재동의 헌법재판소 자리에 있었으며 홍영식의 집은 헌법재판소 북서쪽 담 안쪽에 지금도 남아 있는 약 600년 된 백송나무 근처에 있었다.

알렌의 기록에 따르면 3월초까지만 해도 폐허처럼 보였던 홍영식의 집은 불과 한 달 사이에 근대식 병원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병원으로 개조하는 데 든 600~1000 달러는 물론 조선 정부가 지불했다.

외아문의 준비 작업은 일단 4월 3일로 마무리된다. 즉 홍영식의 몰수된 집을 병원으로 단장했고 병원 규칙을 마련했으며 새로운 병원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공포했다. 이제 국왕의 재가 절차만 남은 것이다.

▲ 종각. 사대문을 여닫기 위해 치는 종을 달아두는 곳으로 고종이 1895년 "보신각(普信閣)"이라는 현판을 사액한 뒤로는 보신각으로 불린다. 1885년 4월 3일 새로운 병원의 설립을 알리는 공고문이 이곳에 내걸렸다. 공고에는 4월 3일부터 병원 문을 연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진료가 시작된 것은 엿새 뒤인 4월 9일이었다. ⓒ프레시안
외아문이 4월 3일(음력 2월 18일) 사대문과 종각에 게시한 공고문은 다음과 같다.

본 아문에서 시의원(施醫院) 한 곳을 설치했는데, 북부 재동 외아문 북쪽으로 두 번째 집에 위치한다. 미국 의사 안련(安連)을 초빙했으며, 아울러 학도(學徒)와 의약 및 제 도구를 갖추었다. 오늘 18일부터 매일 미시(未時, 오후 1~3시)에서 신시(申時, 오후 3~5시)까지 병원 문을 열어 약을 줄 것이다. 해당 의사의 학술은 정교하고 양호한데 특히 외과에 뛰어나서 한번 진료를 받으면 신통한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본 병원에는 남녀가 머물 병실이 있으니 무릇 질병에 걸린 자는 병원에 와서 치료받을 것이며 약값은 나라에서 대줄 것이다. 이를 숙지하여 하등 의심을 품지 말고 치료를 받으러 올지어다.

또한 외아문은 한성부에 지시하여 모든 계(契, 동의 상위 조직인 계는 당시 한성에 300여개가 있었다)에 공고문을 게시토록 했으며, 지방에도 각 읍마다 공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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