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5년 05월 20일 05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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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이 컨베이어벨트처럼 이어져"…누구나 '자발적 학살자'가 될 수 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8]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6
[A: "나는 단지 내 지역에 사는 유대인의 목록을 갖고 있을 뿐이야. 나는 유대인을 모으지 않았어. 그저 요청을 받았을 때 그 목록을 넘겨주었을 뿐이야." B: "나는 이 주소로 가서 그 사람을 체포하고 기차역으로 데리고 가라고 들었어. 그게 내가 한 일의 전부야." C: "내 일은 기차의 문을 여는 것이야. 그게 다야." D: "내 일은 사람들을 열차로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
"1000만 유대인 죽였으면 만족했을 것…나는 명령 수행 관리였을뿐"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7]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5
12.3 계엄 때 윤석열과 손잡았던 장군들은 지금 감옥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란에 성공했다면 그들이 누렸을 법한 권력과 부귀영화를 상상하고 있을까. 차마 그렇진 못할 것 같다. "왜 나는 그때 윤석열의 친위 쿠데타 계획을 말리지 못했을까" 또는 "왜 나는 동참하라는 그의 말을 거부하지 못했을까" 하며 스스로를 꾸짖으면서 한숨 쉬고 있을 것이다.
"500만 죽였다" 허풍 떤 아이히만, 법정에선 "나는 도구였다" 발뺌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6]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4
윤석열의 12.3 계엄이 실패로 끝난 데는 여러 요인이 얽혀 있다.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는 계엄군으로 동원됐던 장병들이 '당나라 군대'마냥 일부러 굼뜬 걸음을 걸으면서 사실상 태업을 했다는 점이 꼽힌다. 대한민국 정예병의 활력 넘치는 잽싼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나중에 국회 청문회에서 드러난 사실이지만, 이들은 상부의 옳지 못한 명령을 처음부터 탐탁지 않
아이히만, 회스,이근안은 냉혹한 괴물인가? 평범한 인간인가?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5]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3
흔히 어떤 엽기적인 범죄가 벌어졌을 때 프로파일러들이 나선다. 그들은 피의자의 얼굴을 마주하고 무엇보다 먼저 그의 정신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를 알아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1901-1947), 독일 국가보안본부(RSHA) 제4국 B과장(유대인 업무 담당)으로서 유대인 박해에 앞장섰던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 이 둘의 정신 건강은
"우린 동물이 돼선 안 된다" 자존감으로 버틴 자가 살아남았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4]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2
나치 독일에 저항한 혐의로 붙잡혀 들어간 정치범이든, 유대인이라는 원죄로 갇힌 보통사람이든 일단 나치 수용소에 갇힌 이들은 절망하기 마련이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견뎌냈을까. 그들은 언젠가 수용소에서 벗어나 나치의 전쟁범죄를 증언하는 날들이 언젠가는 오리라 믿었을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 특히 1940년대
"내 팔뚝에 새겨진 문신이 나치 전쟁범죄의 증거"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3]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1
지난 글 끝에서 나치 독일은 수용소 독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들의 '피 묻은 금'을 스위스 은행과의 '더러운 거래'로 세탁해 전쟁자금으로 썼다고 짧게 짚었다. 죽은 유대인들의 입을 벌려 금니를 뽑아내는 끔찍한 모습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그런 야만적 과정을 거쳐 모은 금니, 또는 막 이송돼온 유대인들의 가방을 뒤져 모은 금 목걸이나 반지 등 귀금속은 베를린
수용소 여성을 성노예로 만든 나치 친위대 '위안소'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2]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40
수용소와 인권은 서로 어긋나는 개념이다. 아우슈비츠 수감자가 친위대 경비대원에게 '인권'을 따진다면 돌아오는 것이 말이 아닌 주먹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현장 사살은 너무 흔하게 벌어졌다. 죽음을 각오하지 않은 바에야 "왜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느냐?"고 묻는 상황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인권은 땅바닥에 내팽겨지고 수감자가 한 인간으로서 지닌 목숨의 무게는 휴지
수용소 적응 힘들었던 지식인들, 끝내 '무슬림' 좀비로 숨졌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1]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9
지난 주 글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 장 아메리, 이탈리아 유대인 프리모 레비, 이 두 지식인이 나치의 전쟁범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음을 살펴봤다. 이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난의 시간을 보냈던 이른바 '홀로코스트 생존자'이고, 훗날 '자유로운 죽음'을 말하면서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 죽음을 앞당겼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의미 있는 또 다른 공통점을
하루에 1만 명 죽이고 불태운 아우슈비츠, 그곳은 생지옥이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10]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8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올해로 80년을 맞았다. 적어도 5000만 명에서 7000만 명쯤이 숨진 그 큰 전쟁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억한다. 우리 한국인들로선 일제 강점기 시절에 벌어졌던 징병과 강제노동, 성노예 '위안부' 학대가 남긴 깊은 상흔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731부대의 세균전 실험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견주어 유럽에서는 나치 독
유대인 600만 사망설의 출발은 아이히만의 입이었다
[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109] 독일의 전쟁범죄-홀로코스트 37
1933년 1월 말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뒤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는 1945년 4월 말까지 12년은 '야만과 광기의 시대'였다. 나치의 폭주 기관차는 멈추었지만, 죽은 이들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논란으로 남았다. 500만~600만 유대인을 포함한 1200만 명이 나치 전쟁범죄의 희생양으로 추정될 뿐이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의 최대 희생집단